구름이 산을 에워싸기 시작하면 나는 구름 사이를 뚫고 산을 오른다. 확 트인 하늘보다 구름 속이 훨씬 마음에 든다. 구름은 압축된 침묵을 선사한다. 고독의 농도를 짙게 만드는 것이다. 고독은 달걀의 흰자위다. 달걀의 제일 좋은 부위인 것이다. 고독은 글을 쓰는 데 필요한 일종의 단백질이다.
토파나(돌로미터 산맥의 동부에 위치한 고산지대, 3,244미터 봉우리를 도파나 디 메초라고 부른다)를 뒤덮은 구름이 부서지더니 우박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내게 동작의 우아함을 허락했던 고독도 거기서 끝났다. (…)
등반가의 본능이 나를 떠민다. 십자가를 붙잡으라고, 등반을 완성하라고 부추기는 것이다. 하지만 내 인조섬유로 만든 겉옷이 다시 바스락거리기 시작하고 어느 샌가 나는 다시 번개의 사정권 안에 들어와 있다.
주변 땅이 번개를 예고하며 부르르 떨기 시작한다. 그러면 나는 사과를 하고 몸과 머리를 숙이고 재빨리 그곳을 빠져나와 은신처로 향한다. 산에 오른 것을 행복해 하며 기분 좋게 입김을 뿜어낼 수 있는 마른 땅의 은신처로 향하는 것이다.
나는 이야기를 끝냈고 어느덧 잣나무는 그림자를 한 구석으로 옮겨버렸다. 황혼이 질 무렵이면 잣나무는 그의 실루엣을 하얀 눈 위에 새기는 것처럼 눈앞의 바위에 선명하게 그려 놓는다. 산에 사는 나무들은 허공에 그들의 이야기를 적는다. 그 이야기를 읽으려면 나무 아래 드러누워야 한다.
어둠이 내리고 바로 앞의 바위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사라지기를 기다린다. 그림자가 사라지자마자 파네스 위로는 첫 번째 별이 떠오르고 대낮의 열기는 기쁜 마음으로 빠르게 산을 내려간다. 내가 그곳에서 물러나기로 작정하는 것은 저녁 향기가 코를 자극할 때다.
나무의 손님은 그림자들이 사라질 때 물러날 줄 알아야 한다. 산에는 나무 영웅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허공에 뿌리를 박고 절벽의 가슴팍 위에서 반짝이는 메달이다. 해마다 여름이면 나는 그 나무들 가운데 하나를 만나러 산에 오른다.
그리고 떠나기 전에 말을 타듯이 허공 위로 뻗은 가지 위에 올라 안아 본다. 수백 미터 아래로 허공을 감싸며 부는 바람이 나의 맨발을 간질인다. 나는 나뭇가지를 껴안고서 고맙다고 오랫동안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주어서 고맙다고 말한다.
<‘나무의 무게’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에리 데 루카 소설, 윤병언님 옮김, 문예중앙 출판>
* 에리 데 루카 : 1950년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태어났다. 열여덟 살에 로마로 이주하여 기계공, 트럭운전사, 미장이로 일했다. 유고슬라비아 전쟁 당시 보급단의 운전기사로 참전했다. 스무 살에 쓴 소설,지금, 이곳은 아닌>을 1989년 마흔 살의 나이에 출간했을 때 그는 여전히 미장이었다. 현재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작가의 한 사람이며 등반가이고 , 주요 일간지<레푸블리카>의 고문이다. <나비의 무게>는 이탈리아에서 50만부 이상 판매되었고, 2010년 ‘패트라르카문학상’을 받았다. 저서로는 <행복한 하루 전날>,<식초의 무지개>,<신의 산>,<1의 반대말>등이 있다.
자아의 이해
만약 인간의 본질이 영혼에 있다면, 영혼의 본질은 사유하는 데 있다. 그렇다면 자아의 본질은 무엇인가? 나는 성찰과 자아이해를 하며 개인이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는 자아의식이 아닐까 생각한다. 고대 그리스의 델파이 신전에 가면, ‘너 자신을 알라’라는 글귀가 있다. 자신을 안다는 것은 아마도 자신이 성격이나 잠재력 혹은 장단점에 대한 이해를 의미하는 게 아닐까?
영화 <파이트 클럽>에서 불면증으로 병원을 찾은 주인공에게 의사는 심리그룹에 참여하길 권유한다. 하지만 그는 마음속 고통을 치유하지 못한다. 사실 환자의 근본적인 문제는 자신이 하는 일에서 가치와 의미를 차지 못하는 데 있었다.
노자는 ‘지인자지 자지자명(知人者智 自知者明)’이라 했다. ‘다른 이를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자신을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다. 소위 계명(啓明)이다.
도의 관점에서 자아를 이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타인과 나의 관계를 이해하고 자신의 고집을 버려야만 자신의 몸과 마음의 눈을 뜰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인생을 살면서 나타나는 수많은 집착은 모두 너와 나의 구분에서 비롯된다.
내가 나이고 네가 너이니 너와 나는 갈등하고 다툰다. 장자가 주장한 만물일체(萬物一體)가 바로 ‘제물론(齊物論)’의 제물이다. 도의 관점에서 보면 만물은 차이가 없다. 만물일체의 입장에서 보면 너와 나의 경계를 없애면 인간은 정신적 굴레를 벗어나 물아(物我)를 잊을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한다. 이 또한 이해가 해방보다 먼저 이뤄져야 함을 말해준다.
자아실현
자아실현은 최소한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인간 본질의 실현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여러 가지 잠재력의 발현이다. 전통적인 철학에서 말하는 자아실현은 전자에 속하며, 이는 인생의 의미이자 아름다운 인생을 위한 목표다.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고 한 유가에서는 선한 본성의 실현이 품격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의미 있는 인생이라고 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본질은 이성이며, 이를 충분히 실현하고, 사색하는 삶을 아름다운 삶이라고 봤다.
두 번째 의미의 자아실현은 뛰어난 운동선수나 예술가처럼 자신의 잠재역량을 십분 발휘해 최고를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매슬로가 말한 자아실현과 유사하며, 현대 문화가 추구하는 바이기도 하다.
자아실현은 최고 단계의 욕구이다. 자유로운 환경 속에서 잠재력을 발전시킬 수 있어야 한다. 영화<샤인>은 어느 천재의 자아실현 과정을 조명했다. 음악 천재 데이비드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하지만 교육만큼은 엄격하신 아버지의 뜻은 반드시 따라야만 했다. 데이비드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각종 대회에서 상을 휩쓴다. 그러나 단 한 번 1등을 내주고 만다. 아버지에게는 이는 실패를 의미했다. 그는 이러한 아버지를 견디지 못하고 정신병을 얻는다.
데이비드는 아버지와 연을 끊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이 어려운 결정으로 그는 결국 정신분열증을 얻고 요양원 신세를 진다. 시간이 흐른 뒤 사랑과 관심 속에 데이비드는 다시 밝게 빛나기 시작한다. 데이비드는 불행했다. 하지만 그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 실존주의 논리에 따르면 그는 자신에 대한 인지와 반성이 없었다. 또 아버지의 가치관에 종속된 채 자주성을 상실했다.
실존주의는 인간이 본질이 있다는 주장을 부정하며 ‘존재가 본질에 우선한다’는 명언을 남겼다. 인간은 결정을 통해 자신을 만든다. 실존주의는 객관적인 가치도 부정한다. 가치는 단지 개인의 주관적인 선택이라는 논리다.
가장 좋은 방법은 개인의 특성에 따라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아실현을 고려할 때 실존주의의 장점은 자체적으로 내린 결정에 무게를 둔다는 점이다. 하지만 인간의 자주성에 대한 지나친 과대평가는 맹점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모든 개개인은 선천적이거나 후천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 즉, 자신이 결정한다고 해서 모두 이룰 수 없다는 의미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잠재력을 갖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아실현이 천부적 재능 외에도 꾸준한 노력과 오랜 시간의 숙련이 동반돼야 하는 까닭이다. 때로는 우리 삶 속에 가치관이나 규범, 혹은 주어진 사회적 역할 등이 자아실현의 걸림돌로 작용한다. 예술가들의 삶이 대표적인 예다.
유가에서의 자아실현은 훌륭한 품성을 배양하는 것이다. 이러한 품성은 사회에서 좀 더 나은 역할을 하도록 하고, 더 나아가 사회질서를 유지한다. 대학(大學)에서는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수신을 근본으로 삼는다(自天子以至於庶人, 壹是皆以修身爲本)’고 했다. ‘선이 인간의 본질이므로 모든 이가 잠재된 도덕적 역량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는 의미이다.
문제는 첫 번째 의미의 자아실현을 강조하면 두 번째 의미의 자아실현을 가로막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인간의 본질이 이와 같다면 이 본질을 실현하기 위해선 개인의 잠재력은 뒷전이 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사람은 도덕적이어야 하는가’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량광야오 지음, 임보미님 옮김>
* 량광야오 : 홍콩 중문대학 철학박사, 미학을 전공했으며, 중국 철학 및 종교 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사고 학당>,<예술의 죽음>등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