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을 맞으며!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 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
오월을 유난히 좋아하신 피천득님의 시 일부이다.
오월은 향기로운 순백의 찔레꽃에서 부터 붉은 장미꽃, 노란 유채꽃, 아름다운 패랭이꽃, 진청색의 붓꽃들이 연두색 잎 새들과 조화를 이루며 싱그러움을 더해주는 계절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잿빛 옷에 봄꽃만 걸친 삼사월보다 화사한 꽃과 신록이 있는 오월을 두고 계절의 여왕이라고 부르는 거 같다.
특히 이 달은 나를 있게 해준 가족친지 분들과 교감을 나누고 감사를 표하는 달이기도 하다. “부모님 사랑합니다. 은사님 감사합니다.” ‘우리 아들, 딸 사랑 해!“ 우리는 으레 오월이면 이런 끈끈한 정을 한번쯤 더 되뇌어 보게 된다. <중산>
20세기의 인류는 물질만 풍부해지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어 물질문명의 번영을 구가해왔다. 그와 동시에 인간의 욕망도 점점 더 비대해졌다. ‘풍요로운 사회’일수록 오히려 소비자는 ‘벽걸이 TV가 있으면’ ‘신형차가 있으면’ 하고 더 욕심을 내게 된다. 미국의 경제학자 갤브레이스는 이를 의존효과라고 불렀다.
편의점에 자동인출기가 등장하여 24시간 언제든지 예금이나 인출이 가능하게 되었다. 자택에서 ‘인터넷 뱅킹’으로 은행에 가지 않아도 잔액조회나 송금을 할 수 있다.
퇴직하면 유유자적하며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무엇을 하면 좋을지 몰라 집에서 뒹굴뒹굴하며 무기력하게 지내는 사람을 많이 볼 수 있다. 일본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땅바닥에 딱 달라붙어 움직이지 않는 ‘젖은 낙엽에 비유하는데, 그보다 더 심한 경우는 ’대형 쓰레기‘라는 표현이다. 그중에는 맘 편히 있을 곳을 잃고 초조해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일이란 인생의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이 젊은 층을 중심으로 늘어난다고, 15년 경력의 사토 에이로 씨는 말한다. 단테는 <신곡>의 서두에서 “인생이라는 여행의 한복판에서, 나는 올바른 길을 잃고 어두운 숲을 헤맸다.”라고 말했다.
이 세상의 거짓에 신물이 나서 모든 것에서 허무함을 느끼는 순간이 우리 모두에게 찾아온다. 무익한 일생이었다는 것을 깨닫거나,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산더미처럼 쌓인 것에 놀라는 것은 인생에서 가장 비참한 순간일 것이다.
MIT 철학과 교수 싱어는 <인생의 의미>에서, “모든 것이 순조로웠고, 또 아주 열심히 해온 일이, 문득 시시하고 무의미하게 생각된다. “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고 지적한다.
돈벌이에 열을 올리던 1980년대 미국에서는, 잡지 등에서 갑부들은 영웅으로 요란스럽게 다뤄지며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사람은 정상에 오를 수는 있어도, 길게 머무를 수는 없다.”는 말처럼, 많은 부호가 “도대체 이 많은 재산이 무슨 쓸모가 있는가!”
“돈을 더 벌었더라면 좋았을걸.‘하며, 임종 때 후회하는 이가 과연 있을까? 라는 의문을 품고 행복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사업가인 트럼프 역시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인생 최대의 목표를 성취해낸 사람 중에, 목표달성과 동시에 외롭고 허무하게, 방심에 가까운 감정을 품기 시작하지 않은 사람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인생의 목적’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않으면, 수많은 적들과 사투를 벌이고 험난한 길을 헤치고 올라서며 모은 돈과 재물과 명성도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인생의 목적’은 ‘퇴색하는 일’도 ‘희미해지는 일’도 없는 것!
목표에 도달한 만족감은 일시적인 것이므로 머지않아 단순한 기억으로 변한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영원한 행복입니다. 달성하고도 허무해지거나 단지 추억밖에 남지 않는다면 그것은 ‘인생의 목적’이러고 부를 수 없다. 쇼펜하우어는 보답받을 수 없는 인생을 “고통과 지루함 사이를 흔들흔들 오가는 진자(振子)”에 비유 했다.
스위스의 철학자 힐티(1833~1909)는 사랑은 “마음 속 깊이 스며드는 행복인 동시에 모든 것을 파괴하는 불행이 될 수 있다.”고 충고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애정을 통해 느끼는 행복에 완전히 몸을 맡기는 사람의 심정이 깊고 순수할수록, 그 사람은 확실히, 그리고 완전히 불행해질 것이다. 죽음으로써 그 고통스런 경험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힐티.<행복론>
“행복이 동시에 불행의 원천이기도 하다. 이것도 운명일까”라고 괴테는 한탄했다.<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연인이나 건강, 재산, 명예처럼 우리에게 기쁨을 선사하고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그와 동시에 불행과 눈물의 원인이기도 하다. 이러한 버팀목이 무너졌을 때, 행복 또한 무너져 슬픔에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행복을 경험하고 나면 그 이후의 인생은 괴로움의 연속이다. ‘무너지면 무너지는 거지 뭐, 추억이 남으면 되는 거야.“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지나가버린 행복을 아무리 한탄해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괴로운 현실을 잊고 즐거운 추억에 빠져들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단테의 <신곡>지옥편에서 “불행한 처지에 놓여 과거의 행복을 떠올리는 것만큼 비참한 일은 없다.”라고 했다. 너무 소중한 과거는 지옥 같은 현재를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
1999년, 일본 최고의 지성이라고까지 불리던 에토 준씨는 66년의 생애에 스스로 종지부를 찍었다. 아내 케이코씨가 몸져누운 지 3개월 후, 아내의 죽음과 그로 인해 위기를 맞이한 자신의 상황을 그린 <아내와 나>는 사실상 그의 유서였다고 한다.
사랑하는 개가 죽어 노이로제에 걸린 소년은 다람쥐 봉제인형을 몸에서 떼어놓지 않게 되었다. “봉제인형은 살아있는 애완동물보다 더 좋아요. 다정하고 배신하지 않으니까.” “죽는 것도 … 역시 배신이니까요.”라고 소년은 말했다.<자상함의 정신병리>
자식이 결혼해 곁을 떠난 후 우울증에 걸리는 어머니가 많은데, 이를 ‘빈 둥지 증후군’이라고 한다. 자식과의 이별이 그토록 괴로운 것은 배 아파 낳은 자식은 내 생명이기 때문이다.
배신당하지 않는 행복 말고, 생명을 다 바쳐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세상 모든 것이 소멸하는 가운데, 소멸하지 않는 행복이야말로 우리 모두의 바람이자 인생의 목적이다.
<‘왜 사는가’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타카모리 켄테스(일본 정토신종 신란회 회장) 아케하시 다이지(교토대학교 의학부 졸업, 정신과 의사) 이토 켄타(도코대학교 대학원에서 과학철학전공) 지음 김순희 최모네님 옮김, CUON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