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 난 형제가 날 미워하고 계속 트집을 잡아
이성 : 형제간의 우애보다 더한 사랑은 없어. 하지만 사랑이 미움으로 변하면 이보다 더 제멋대로인 것이 없고 이보다 더 사나운 질투도 없지. 그만큼 형제 사이엔 그들을 움직이는 경쟁심이 활활 타오른다네.
일단 올바른 길을 벗어나면, 상대방에게 굴복해야 한다는 수치심, 내가 더 나은 사람이었으면 하는 간절한 욕망, 둘이 함께 간직한 어린 시절의 추억, 서로 애정을 키워왔을 모든 것이 끼어들어 미움과 경멸이 더 커지는 거야.
짐짓 상대에게 잘 맞춰 주는 척, 겸손한 척하며 본성을 거스러는 이 마음의 광기를 살살 달랠 수 있겠지. 하지만 도저히 상대해 줄 수 없게 군다면 혹은 자네 자신이 최선의 태도나 가장 유용한 태도를 억지로라도 보이지 않는다면, 상황이 재앙으로 변하기 전에 쓸 수 있는 약은 하나밖에 없어.
이 병의 뿌리를 아예 뽑아 버리고 형제가 같이 살지 말아야 하네. 같이 사는 것이 모든 불화의 원천이야. 설사 자네가 권리를 좀 잃는다 하더라도 미덕과 좋은 평판을 얻게 된다는 걸 생각하면 쉽게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거야.
심술궂고 오만에 찬 질투의 그물코에 대적하기엔 선함과 유함이라는 너그러움보다 더 좋은 무기가 없지. 이건 순금 같은 무기라서, 형제간에 평화와 선의를 되찾아 주고 이를 가정에까지 되돌려 준다네.
너무나 맞는 말인 옛 격언을 기억해 보게. “모든 불화와 전쟁의 동기는 이 두 가지 - 내 것과 네 것 - 다.” 만약 인생에서 내 것과 네 것 두 가지를 뺄 수 있다면 형제는 확실히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을 거야.
<‘행운과 불운에 대처하는 법’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지음, 임희근님 옮김, 유유출판>
*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 1304~1474, 르네상스 최초의 인문주의자. 이탈리아 시인으로‘현대 사상가의 아버지’, ‘휴머니스트의 아버지‘로도 불린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지만 고전학문의 부흥을 꾀했다. 1340년 로마와 파리에서 계관시인으로 추대 받았고, 로마 철학자 키케로의 서한문을 발견한 뒤유럽에 ’편지열풍‘을 일으켰다. 대표작 <칸초니에레>로, 릴케, 밀턴, 셰익스피어 등이 모두 그의 영향을 받았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실수
단테의 <신곡> 지옥에서 벌어지는 이 모든 끔찍한 일은 콘트라파소(contrapassos) 즉, 인과응보다. 지상에서 저지른 악행을 지옥에서 형벌로 받는 것이다. 단테의 일곱 번째 지옥에 있는 모든 영혼은 끊임없이 공격받는다.
오직 지옥의 영혼들을 고통스럽게 하고 파괴하기 위한 이 공격의 행위가 모든 폭력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한 가지 분명히 해둘 것이 있다. 폭력과 분노는 분명히 다르다.
분노는 부당한 대우나 학대에 대한 정상적이고 건강한 반응이다. 반면 옥스퍼드 사전을 보면 ‘폭력’의 정의는 ‘어떤 사람 혹은 대상에게 상처를 주거나 해를 입히거나 죽이는 행위’다.
부당함이나 학대에 대한 분노는 인간에게 생물학적으로 내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중요한 무언가가 그것이 필요한 사람에게 배제되어 있을 때, 견딜 수 없는 무언가를 강요받을 때 분노로 대응한다.
높은 에너지의 분노로 불공정한 상황을 바로잡는다. 분노가 없다면 학대 관계를 떠날 사람도, 특정 집단에 가해지는 억압과 압제에 의문을 제기할 이도, 공정성을 위해 노력할 사람도 없을 것이다.
마하트마 간디는 “분노를 변화를 위한 연료처럼 긍정적으로 봤다”라고 한다. 하지만 폭력적으로 변해서 누군가를 상처 입힐 의도가 있다면 파괴의 힘에 동참하는 것이다. 분노가 무분별한 폭력이 되지 않고 긍정적 변화를 위한 도구로 활용되려면 지혜와 성숙함이 필요하다.
설령 살아 있는 것을 때리거나 해친 적이 한 번도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폭력적인 성향이 있다. 마음속에서 혼자 은밀히 했다고 해도 우리는 타인을 향해, 자신을 향해, 절망스러운 상황을 향해 공격을 퍼붓는다.
꽉 막힌 도로에서 다른 운전자에게 미친 듯이 분노가 치민 적이 있다면, 영화관에서 액션 영화를 보다 영웅이 악당을 죽일 때 팝콘을 쏟아가며 환호한 적이 있다면 폭력의 에너지에 동참한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그런 에너지를 은근히 좋아하고 즐기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본능 한구석에는 자신에게 위험이 되는 존재를 파괴하는 행위를 즐기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본능은 진화적으로도 유리하다. 위협을 가하는 존재와 싸울 의지가 없는 생명체는 이내 죽어서 사라진다.
흔히들 '이상적‘이라고 말하는 많은 것이 변화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전투적 반응이다. 이런 반사적 반응은 부당함을 인지하고, 불평등이나 고통을 초래하는 원인을 정확히 파악해 변화를 추구하는 것과는 다르다.
(예를 들어 루터 킹은 평등을 토대로 시민 권리를 촉구했지만 그를 죽인 얼 래이는 루터 킹으로부터 전혀 위협을 받지 않았다. 그의 행동은 오직 변화에 대한 두려움과 자기 독선에서 나온 반사적 반응이다)
뭔가를 옳다고 믿는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의 도덕 기준이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며 보편적 진리라고 믿는다. 하지만 연구에 따르면 이런 판단은 사실 특정 문화에서 형성된 감정적 반응이다.
폭력성은 이성에 귀를 기울이지 못한다. 이런 신념은 사려 깊게 판단하는 능력 자체를 차단해버린다. 정치적 지도자를 감정적으로 추종하는 이들은 그 지도자가 사회의 가치관을 명백히 위반해도 개의치 않는다.
자신의 정치적 신념이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토대로 하고 있음을 알게 되어도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 오히려 그 신념 체계를 더욱 단단히 다지고 또 다진다. 이런 모습이 매우 비합리적으로 보일 것이다. 당연하다. 실제로 비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익숙한 대상이 무엇이든지 간에 뇌의 이런 판단은 이성적 사고보다 더 크고 강하며 오래되었다. 심리학자 조너선 화이트는 인간의 합리적 뇌를 코끼리(직관적 감정)의 등에 올라탄 기수(논리적이고 의식적인 추론 능력)에 비유한다.
흔히 우리는 그 기수가 책임자이고 코끼리를 조종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보통은 코끼리가 조종한다. 화이트의 말을 빌리자면 “기수는 코끼리의 대변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때 기수가 코끼리의 본심을 반드시 다 알지는 못한다.”
우리의 머리에는 자동 반사 반응을 보이는 코끼리가 있어서 익숙하지 않은 것은 일단 틀렸다고 인식한다. ‘익숙한 것은 무조건 옳다, 옳다!’고 인식한다. 옳다고 믿는 마음은 순간적으로 진실을 압도하며 정의와 공정함에 대한 신념까지도 모두 압도한다.
옳다고 믿는 마음에 휘둘리면 온전함으로 가는 길은 잃고 기이한 자기 모순적 상태가 된다. 세계 평화를 옹호하면서도 자신의 의견에 맞서는 이들과의 전쟁을 옹호하는 이들처럼 말이다.
옳다고 믿는 실수가 처음에는 달콤한 이유
인간은 가깝게 협력하며 살아가는 집단에 소속되어 생존한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생김새, 행동, 말하고 생각하는 방식이 자신과 비슷한지 확인하는 생물학적 성향이 있다. 이런 성향의 단점은 집단 내 ‘우리’와 다르게 보이는 사람은 누구든 불신하려는 태도다.
남아프리카 코이코이족에서 부터 시베리아 유피잇족에 이르기 까지 수많은 부족이 ‘진정한 사람’을 의미하는 언어로 자기들을 부른다. 이 말은 부족 외 다른 집단 사람들을 진정한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다.
이를 ‘타자화(othering)'라고 하며 모두가 타자화를 하며 산다. 우리는 아주 어릴 적부터 익숙하지 않은 대상을 낮설게 느끼고 불안해했다. 18세기 사회개혁가 오웬은 반어적 표현으로 이런 현상을 꼬집었다. “당신과 나를 제외하면 온 세상이 이상하다. 심지어 당신도 좀 이상하다.”
일단 누군가를 타자화하고 나면 자신도 모르게 그 사람을 비인간적이고 열등한 존재, 심지어 혐오스런 존재로 보게 된다. 왜 그럴까? 바로 그 변칙적인 존재가 우리 존재 방식에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그들을 향한 불만을 터뜨리기 위해 같은 집단 사람들과 결속할 때 ‘싸움’ 호르몬이 치솟고 인위적인 목적의식과 소속감에 도취된다. 더 폭력적으로 말하고 행동할수록 자신이 더욱 옳다고 느낀다.
거듭 말하지만 이런 감정은 우리가 부당함이나 억압에 느끼는 분노와 다르다. 건강한 분노에는 분별력이 있다. 구체적 사안에 집중하며 변화를 향해 나아간다. 상황이 변하면 그 분노는 사라진다.
반면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실수를 저지를 때는 모호하고 불분명하며 모순되는 이유로 대상을 공격하며 상황이 변해도 그 분노가 수그러들지 않는다. 종종 뚜렷한 증거도 없이 판단한다. 반면 건강한 분노는 무엇이 공정하고 공정하지 않은지를 구분하기 위해 판단한다.
자신이 옳다는 믿음에서 출발해 점차 감정이 고조되면 진정한 가치를 외면하고,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인지 사실을 보지 못하며, 온전함에서 나오는 명료한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의심하지 않으면 끊임없이 공격하는 정신 상태가 될 수 있다. 그곳이 바로 단테가 말한 지옥의 일곱 번째 고리다.
건강한 분노 |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실수 |
판단을 내린다 | 판단을 건너뛴다 |
분노를 가라앉히는 행동을 하려고 한다 | 분노를 증폭시키는 행동을 하려고 한다 |
모든 사람을 관계 맺을 수 있는 존재로 본다 | 모든 사람을 ‘우리’와 ‘그들’로 구분한다 |
새로운 정보를 찾는다 | 새로운 정보를 피한다 |
다양한 주제를 공부한다 | 몇 가지 주제에만 집착한다 |
다른 사람의 관점을 헤아릴 수 있다 | 오직 자기 자신의 관점으로만 본다 |
중도의 입장으로 본다 | 모든 것을 흑백논리로 본다 |
자신이 틀렸을 수 있음을 인정한다 | 자신이 절대 틀릴 수 없다고 고집한다 |
<‘어두운 숲길을 단테와 함께 걸었다.’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마사 벡 지음, 박여진 옮김, 더퀘스트출판>
* 마사 벡 ; 하버드 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동 대하원에서 사회학, 사회심리학, 조직행동 및 경영관리를 가르쳤음. 내담자에게 불안과 혼란 그리고 공허함을 토론 하곤 한다.
☞ 단테의 <신곡>은 심리적 상처를 치유하고 온전함을 회복해 더 나은 감정을 느끼는 매우 강력한 지침서다. 단테는 14세기 유럽의 비유와 상징을 사용했지만 여기에 사용한 심리적 은유들은 현대에도 커다란 울림을 주며 우리가 여전히 가야 할 길을 보여준다.
먼저 온전함을 찾는 여정은 ‘어두운 과오의 숲’에서 시작된다. 상실감과 고단함, 근심과 불확실성이 자욱한 그곳에서 말이다. 단테가 말한 과오의 숲은 대부분 사람이 겪는 삶의 부조화를 상징한다.
그 다음 단계는 ‘지옥편’이다. 여기를 통과하면서 우리는 고통의 원인을 찾을 것이다. 내면의 지옥에 갇힌 자신의 본성을 찾아 자유롭게 놓아줄 것이다. 내면의 삶이 치유되기 시작하면 ‘연옥편(purgatory)’에 들어가게 된다. 연옥편은 ‘정화’를 의미한다. 이 단계에서는 외적 행위와 새로 발견한 내적 진실을 조화시킨다.
마지막으로 내적인 삶과 외적인 삶이 온전함에 가까워지면 드디어‘천국(paradise)'를 발견한다. 여기서는 따로 해야 할 일이 없다. 마음과 일과 삶이 무리 없이 순탄하게 돌아가는 것을 느긋하게 즐기기만 하면 된다.
다만 주의 할 점이 있다. 이 단계에서는 기존의 문화 속에선 일어날 수 없었던 아름답고 섬세한 경험을 시작할 수 있다. 경이로운 여정을 조종하는 법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당신은 빠르게 배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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