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리, 나리 개나리
입에 따다 물고요.
병아리 때 종종종
봄나들이 갑니다.
이 동요는 문학이 언어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모습, 그러면서 동시에 어떤 먼 곳으로 길을 열어가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리, 나리 개나리 입에 따다 물고요.” 개나리 잎과 병아리 잎이 혼동되는 이 대목은 기형도의 <입속의 검은 잎>(1989)을 생각나게 한다.
이 시집에서 나뭇잎은 언어나 텍스트에 해당한다. 위의 동요에서도 개나리 꽃잎은 단어, 이름, 말 등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개나리 꽃잎을 따서 입에 문다는 것, 그것은 글쓰기에 해당한다.
문학적, 시적 글쓰기는 일상어의 수풀에서 말을 따와서 일상과는 다른 세계로 가져간다. “병아리 때 종종종 봄나들이 갑니다.”의 의미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개나리 가지에 붙어 있는 잎과 병아리 입에 물린 잎은 어떻게 다른가?
문학은 일상어를 어디로 사르트르의 문학론에서 이 모든 것은 “언어의 물질성” 혹은 ”사물화“란 말로 풀이 된다. 즉 병아리의 입, 시인의 입에 물릴 때 말은 어떤 사물이 되어 순수한 물질성을 드러낸다. 시적 언어는 물질화된 언어다.
그런데 사물화된 말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거기에서는 하나의 의미만이 아니라 복수의 의미를 동시에 담고 유지하는 중력이 발생한다. 사물화되면서 무궁무진한 의미를 한 번에 담는 폭과 두께를 얻는다.
시적 유희 속에서 언어의 목적과 수단이 전도되는 것을 의미한다. 기호는 지시상의 정확성을 잃어버리는 대신 무한한 상징성을 획득한다. 물질화된 기호는 수많은 생각과 감정, 다양한 사물을 미분화된 상태 속에 끌어안고 있는 어떤 블랙홀과 같다.
시적 유희는 일상의 언어를 대낮의 광명이 사라지는 침묵의 밤으로, “비지(非知)의 암흑”으로 끌고 간다. 이것이 “병아리 때 종종종 봄나들이 갑니다.”의 속뜻이다. 봄나들이, 밤 나들이. 여기서 봄나들이는 자연의 심연, 무의식의 암흑 속에서 펼쳐지는 꿈으로의 여행이다.
바타유의 “밤의 사유”가 대변하는 것처럼 시인의 소풍은 원래 밤나들이로서 이루어진다. 시적 유희는 아폴론적 개방성의 세계에서 디오니소스적 개방성의 세계로 향하는 여정 속에서 이루어진다.
시적 글쓰기는 밤의 상상력 속에서, 심야의 기억 속에서 완료된다. 문학적 글쓰기는 언제나 두 평면 사이의 여행이고, 위대한 문학적 창조는 자연적 언어의 평면과 구별되는 새로운 평면의 수립과 같다.
글을 쓴다는 것은?
글을 쓴다는 것은 단순히 사물을 재현하거나 정보를 전달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가장 알맞은 표현을 찾으려 이미 쓴 글을 다시 고쳐 쓰는 것이다.
글을 고쳐 쓰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 생각을 고쳐야 한다. 글쓰기는 기존의 글을 고치면서 자기 자신을 고치는 수준으로 나아간다. 글을 이루면서 자기 자신을 이루는 데까지 이르러야 글쓰기의 참맛을 알 수 있다. 글쓰기의 즐거움은 성장의 체험과 이어져 있다.
학습의 네 단계와 창의적 글쓰기
창의적인 상상력은 천부적인 재능일 수 있다. 그러나 평범한 인간에게 창의성은 학습을 통해 획득해야 할 것이다. 네덜란드의 철학자 반 퍼슨은 보통 사람이 후천적인 배움의 길에서 창의성에 도달하는 과정을 서술한다.
글을 배우고 쓰는 능력도 그가 말하는 네 단계를 거쳐 발달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습의 첫 단계
파블로프의 개 실험과 조건반사 이론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동물은 유전적으로 고착된 자극(S)과 반응(R)의 체계를 지닌다. 개는 배고픈 상태에서 먹이를 보면 침을 흘린다.
개는 처벌과 보상에 다라 훈련을 반복하면 새로운 조건 반사가 자리를 잡는다. 가령 먹이 대신 종소리가 침을 흘릴 수 있다. 자극이나 대상이 달라지더라도 학습 주체는 똑같이 반응할 수 있다.
글쓰기는 어떤 학습과정에서 주어지는 능력이다. 글쓰기를 배 울 때는 두 가지를 마음에 새겨야 한다. 먼저 좋은 생각이 있어야 좋은 글이 나올 수 있다. 체험에서 얻은 내용이든, 폭 넓은 독서에 바탕을 둔 영감이든, 집중적인 고민의 산물이든 무엇이든지 좋다.
글로 옮길 수 있는 풍부한 아이디어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생각이 많다고 해서 좋은 글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글은 생각으로 통제되지 않는 고유한 자극과 반응의 메커니즘을 지닌다. 글은 생각의 논리와 구별되는 독특한 분절화의 형식에 따라 전개된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내용이 바뀌거나 심지어 처음의 의도와는 완전히 다른 곳으로 도착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많이 읽고 생각하다 보면 머릿속의 내용이 저절로 넘쳐 좋은 글이 된다고 믿는 사람은 평생 조야한 문장밖에 쓸 수 없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내용에 걸맞은 표현의 형식을 찾는 것이다. 주어진 내용을 정확하게 표현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아름답게, 때로는 극적으로, 때로는 내면적 울림의 효과를 가져오도록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때 필요한 것이 진부함에 대한 반감이다. 진부함에 대한 반감은 새로움에 대한 동경과 짝을 이룬다. 그렇다면 새롭다는 것은 무엇인가? 물론 새로운 것을 기피하거나 일탈하는 것과 혼돈하지 말아야 한다.
새로운 것은 이전의 것과 다르되 모범이 될 만한 것이면 된다. 익히고 배워서 자기것으로 하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새로운 것이다. 초보자에게 새로움은 다양함이다.
똑 같은 내용을 언제나 유사한 말로 옮기기보다는 문맥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새로운 느낌을 준다. 글쓰기를 처음 배우는 사람에게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표현에 만족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의 동일한 내용과 짝을 이룰만한 더 좋은 표현들이 있는지 둘러보아야 한다. 멋진 표현을 만났을 때는 그것을 익혀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런 수준에서 창조적 글쓰기는 대체의 유희로 나타난다. 기존의 말을 다른 말로 대체하는 유희인데, 멋진 은유와 환유는 그런 창조적인 대체의 유희에서 태어난다.
학습의 둘째 단계
학습의 첫 단계는 스키너의 쥐 실험으로 설명될 수 있다. 미로 한 가운데 있는 쥐에게 출구의 먹이를 찾도록 유도하는 실험을 반복하면 먹이를 찾는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다양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쥐는 점점 능숙하고 용이하게 목표에 도달한다. 여기서 학습은 똑 같은 자극에 대해 자신의 반응이나 선택을 교체하는 과정이다. 즉 자극이나 대상은 동일하게 남아 있는데, 그것에 관계하는 주체의 태도나 반응은 계속 달라진다.
모든 배움의 행위는 능숙한 행위를 목표로 한다. 능숙한 행위는 당연히 훈련을 요구한다. 능숙하고 숙달된 동작은 기계적인 성격을 띤다. 기계적인 성격의 동작은 보통 습관이라 불린다.
모든 배움의 절차는 우리에게 능숙함을 보장하는 일정한 습관을 만들어가는 절차라 할 수 있다. 사람은 천성이라 불리는 자연적 본성을 지니지만, 동물과 달리 학습을 통해 얻는 습관적 본성을 지닌다.
스키너는 습관을 들이는 과정을 동일한 자극에 대한 반응을 개선해가는 절차로 설명했다. 여기서 반응의 개선은 주체의 자기 교정을 의미한다. 습관은 주어진 자극에 반응하는 일정한 패턴이다.
자극과 반응의 패턴이 습관의 형태로 고정되기까지는 무수한 시행착오와 그에 따른 자기 교정의 절차가 있어야 한다. 글쓰기의 차원에서 습관은 최종적으로 스타일로 나타난다. 글쓰기의 습관은 스타일의 창조에서 완성된다.
글을 쓴다는 것은 단순히 사물을 재현하거나 정보를 전달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가장 알맞은 표현을 찾으려 이미 쓴 글을 다시 고쳐 쓰는 것이다.
글을 고쳐 쓰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 생각을 고쳐야 한다. 글쓰기는 기존의 글을 고치면서 자기 자신을 고치는 수준으로 나아간다. 글을 이루면서 자기 자신을 이루는 데까지 이르러야 글쓰기의 참맛을 알 수 있다. 글쓰기의 즐거움은 성장의 체험과 이어져 있다.
학습의 셋째 단계
학습의 셋째 단계에서는 자극과 반응 양쪽이 모두 자유롭게 교체될 수 있다. 이런 형태의 학습은 머릿속의 관념이나 상징이 자극과 반응 사이에 간섭할 때 일어날 수 있다. 가령 전쟁터에서는 깃발의 상징적 의미로 말미암아 무수한 군인이 목숨을 던진다. 오직 인간에게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고통의 원인이던 것이 만족감의 원천으로 전도된다. 아프게 하면서 즐거움을 주는 역설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고대인의 성격을 구성하는 것은 맑고 단순한 감정인 반면 현대인의 감정은 복잡하고 양가적이란 특징이 있다.
글쓰기의 현대성은 하나의 문장으로 여러 상반된 감정, 여러 대립하는 의미, 복수의 음색과 기조를 동시에 표현하는 데 있다. 그러나 이것은 현대성의 특징이라기보다 패러다임 전환기의 일반적인 특징일 수 있다.
하나의 문화적 패러다임이 절정기를 통과할 때는 언어의 혓바닥이 여럿으로 갈라진다. 언어가입을 열 때마다 다수의 의미와 정념이 동시에 발화되는 것이다.
상징적 체계에 의해 매개되는 학습의 단계는 여전히 습관의 개념으로 돌아가 설명할 수 있다. 왜냐하면 습관은 기계적인 동시에 무의식적인 선택의 기제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습관은 세포막이 그런 것처럼 선택 장치이기 이전에 먼저 보호 장치이다.
농부는 손잘의 두툼한 각질 덕분에 불필요한 자극에서 해방되어 대지에 편안하게 거주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감각상의 갖가지 습관 덕분에 인간은 불필요한 흥분과 자극에서 벗어나 선택된 대상에 집중하기에 이른다.
헤겔은 습관이 없다면 인간은 사소한 본능적 자극들 속에 함몰되어 정신착란이나 분열증에 빠질 것이라 했다. 습관이 가로막아주기에 정신은 수많은 자극에 무관심해지고, 그 결과 자신의 고유한 관심의 영역을 키워나갈 수 있다.
언어는 지극과 반응을 일정한 강도와 방향에 따라 흐르도록 만드는 수로와 같다. 언어에 의해 자극과 반응은 일정한 패턴에 따라 재분할된다. 이런 점에서 언어는 습관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언어는 습관이 만들어내는 관행의 한 종류다. 언어는 관행화 된 기호, 약속된 기호다. 글쓰기란 약속된 기호에 의지하여 과거의 약속을 현재 속에 실행하고 미래에서 오는 새로운 약속을 현재 속에 기입하는 행위다.
학습의 넷째 단계
학습의 넷째 단계는 기존의 자극과 반응의 체계를 변형하거나 기존의 상징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과 관련된다. 가령 물질이라는 하나의 단어는 아리스토텔레스 체계, 뉴턴 체계, 아인슈타인 체계를 지나면서 전적으로 다른 의미를 지닌다.
전적으로 다른 의미를 지니면서 이전의 체계가 부딪힌 문제를 해결하는 위치에 자리하는 것이다. 쇠퇴기에 이른 체계는 기존의 약속을 깨트리는 사례들에 봉착하여 위기에 빠진다.
서로 배타적인 요구를 동시에 만족시키려는 노력 속에 쇠퇴기의 언어는 혓바닥이 쪼개지고 목소리가 갈라진다. 이러한 국면에서 위대한 창조는 단순한 언어에 의해 일어난다. 혼돈에 종지부를 찍고 모순을 해결하는 간결한 구조에 의해 혁신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혁신은 단순히 자극과 반응을 자유롭게 대체하는 수준을 넘어 자극과 반응의 패턴 자체, 나아가 사고의 문법 자체를 재조직하는 데까지 이른다. 이는 장기짝을 바꾸는 게 아니라 장기판을 바꾸는 데까지 가는 학습 능력이다.
이런 창의적인 학습 능력에 힘입어 인간의 문화는 혁명적인 도약이나 진보를 이루어왔다. 이른바 패러다임 전환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습관화된 행위나 사고는 타성에 빠지기 쉽다.
습관은 일정한 시기의 문화적 생태를 떠받치는 두꺼운 지층으로 굳어지기도 한다. 위대한 창조는 그 묵직한 습관의 지층에 습곡과 변동을 일으키는 용암의 분출과 같다.
문제는 그런 분출이 일어나는 조건과 논리적 형식을 추려내는 데 있다. 일상어에 함몰되어 있던 청년과 원숙한 시인은 똑같은 모국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서로 다른 평면 위에 서 있다.
<‘이야기의 끈’-서사적 사고‘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김상환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 지음, 이학사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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