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의 무게 - 망신 주기!
나의 아내는 길이 꽉 막혀 교통 흐름이 매우 느린 길에서 앞차를 살짝 들이받았다. 근처에 있던 경찰은 샅샅이 살펴보고 아무 일도 없다고 했다. 며칠 후 상대 남자는 836달러(약100만원) 를 보상하라고 연락했다. 전체 펜더를 교체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일이 2005년 뉴올리언스에 허리케인이 덮쳤을 때 일어났다는 점이다. 뉴올리언스는 아예 물에 잠겼고 수천 명이 목숨을 잃고 멋진 도시가 영원히 사라진 장면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 혼란 속에서 나는 그 남자의 차를 검사하러 갔다. 아무리 집중해서 들여다보아도 그가 주장하는 15센티미터 길이의 연필로 그은 듯한 주름은 보이지 않았다. 그 상황에 짜증이 난 나는 그 정도 일에 836달러를 내라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말했다.
당신 같은 사람 때문에 자동차 보험료가 이렇게 비싸진 것이라고도 했다. 카트리나 구호기금에 당신 이름으로 기부할 테니 그 미세한 범퍼의 흠집은 그냥 고치지 말고 다니라고 했다. 그 남자는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그날 내가 도덕적으로 우위를 점했다고 확신하며 화가 나서 자초지종을 친구와 동료에게 털어놓았는데 여러 사람이 내 모금 활동에 동조했다. 그 남자가 범퍼를 고치지 않으면 자기들도 돈을 기부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금액은 5000달러에서 2만 달러로 늘어났다. 나는 도덕적 사유를 무기로 나 혼자 뉴올리언스를 구할 수 있다는 꿈에 부풀었다. 그러나 속이 메스꺼워졌다.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은 뭔가 잘못되었다…!
그 사람에게 망신을 주는 것은 나쁜 일처럼 느껴졌다. 결국 내가 아내를 대신해서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했다. 남자는 흔쾌히 용서했고 돈의 일부를 카트리나 피해자를 위해서 적십자에 기부할 수도 있다고 했다.
나는 아내가 그 남자의 범퍼를 상하게 하기 전까지는 수치심과 죄책감 간의 차이를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나는 상대 차주의 빗나간 가치 시스템에 경멸을 느껴 망신을 주었다.
뉴올리언스 전체가 익사하는 마당에 어떻게 차 범퍼 주름이나 걱정하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런 행동에서 비롯된 죄책감 때문에 아내와 내가 불쾌감을 느낀 것이다.
무엇인지 정확히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무언가 잘못하고 있다는 내적 감정의 불평이었다. 그런 망신이 필요한 상황도 분명 있다. 차에 흠집이 난 것과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두 사건이 동시에 일어났다는 점 말고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면, 마이클이 여성혐오성 농담을 했다. 친구 조가 그것을 지적하며 마이클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창피한 줄 알라”고 한다. 마이클이 답한다.
“그래서 너는 완벽하니? 너는 동물 농장에서 알파카를 훔친 적도 있잖아!” 이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조가 알파카를 훔친 것은 마이클의 행동과는 무관한 일이다.
X를 이야기 하는 사람에게 X와 상관없는 Y가 더 급한 일이라며 망신을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이것을 ‘피장파장의 오류’라고 하며 요즘말로 ‘그쪽이야말로주의whataboutism'다. 이는 보통 방어 전략으로 사용한다.
마이클은 조가 저지른 도덕적 잘못을 이용해 조의 주장이 잘못되었다거나 효력이 없다는 암시를 주고 있다. 바보 같은 짓이다. 두 가지 모두 사실일 수 있다. 조는 알파카를 훔치는 짓을 저질렀고 마이클의 발언 역시 여성혐오성인 것이 맞다.
중요한 것은 조가 언젠가 알파카를 훔쳤다는 사실 때문에 마이클의 모욕적인 발언을 지적할 기회를 빼앗아야 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가장 기본 형태의 죄책감은 뭔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느끼는 내적 감정으로 개인적 실패에 따르는 불쾌하고 사적인 감각이다. 수치심은 스스로 느끼는 굴욕감으로 외부의 누군가가 나를 평가하는 데서 오는 감정이다.
신문만 정독해도 망신당해 마땅한 일을 무더기로 발견할 수 있다. 부정부패, 만연한 위선, 사익을 위한 권력남용, 직무유기, 인종차별, 전 미국 공화당 상원의원 크루즈 이야기다. 악행을 저지를 사람에게 망신을 주는 것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건 언뜻 생각해도 알 수 있다.
나쁜 사람들이 저지를 악행이 나쁜 것임을 스스로 알게 하고, 최소한 그들이 나쁜 사람이라는 점을 좋은 사람들에게 알려줄 수 있다. 하지만 망신을 줌으로써 나쁜 행동을 제지하려면 그 나쁜 행동과 망신당했을 때 드는 느낌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어야 한다.
누군가가 나쁜 행동을 했을 때 어느 정도 망신을 줄 수는 있다. 적당한 망신은 건강한 세계에서도 악행을 막는 무기로 사용하는 데 필요하다. 수치심을 느끼지 못하면 인간은 모두가 보는 광장에서 아무 걱정 없이, 평판이 깎일 두려움 없이, 원하는 대로 아무렇게나 행동할 것이다.
어떤 잘못을 했을 때 전혀 상관없는 다른 행동으로 주의를 돌리는 것은 논점 일탈이다. 논점은 ‘내가 잘못했다’이다. 어떤 행동과 전혀 관련이 없는 다른 사람의 행동을 기반으로 자신이 한 일을 평가해야 한다고 할 철학자는 아무도 없다.
이 점이 고정불변이지만 2023년 현재 상황을 보면 세상은 자기가 한 일과 관련이 없는 다른 일을 들이대며 면피하려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공개적으로 망신 주는 개념은 성서 시대 때부터 있어 온 일이다. 이를 테면 죄를 벌하거나 일종의 청교도적 복수 의지를 날려버린다는 의미에서 목과 손에 형틀을 채우고, 발을 결박하고, 소리를 지르고, 간지럽혔다.
19세기에 사라진 차꼬형(족쇄 달린 칼에 묶어 공개적으로 놀림과 학대를 하던 형벌)은 현대에 새로운 형태로 부활하고 있다. 조금이라도 유명한 누군가가 뭔가 거슬리는 짓을 하면 스마트폰과 컴퓨터로 SNS상에서 공개적으로 망신주기(SNS드래깅dragging)를 매일 자행한다. 문제의 인물은 잘못한 행동이나 말한 것이 노출되면서 그 값을 치른다.
여기에는 공공의 이익이 있다. 그들이 전에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형장에 끌려 나온다. 이런 폭로에는 해보다 득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더 큰 문제가 떠오른다. 망신주기가 윤리적 성과를 내는 데 과연 생산성 있는 방법인가 하는 점이다.
일단 망신을 당하면 행동을 바꾸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다. 그보다는 방어기제가 높아지고 고집을 부리며 저항한다. 망신을 주면서 기대하던 결과가 반대 효과가 나는 것이다.
형벌의 목적은 스스로 저지른 일의 결과를 책임지게 하는 것과 앞으로의 행동을 바꾸게 하는 데 있다. 그런데 샌드백처럼 공개적으로 두드려 맞으면 그게 어려워진다. 내가 차주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밝히거나 자동차 번호판 사진을 올리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은 명확했다. 그나마 머릿속 작은 목소리의 소소한 승리라고 할 수 있다. 내게 유리한 철학적 방패를 찾으려면 결과주의로 가야 한다. 어쨌거나 나는 그 사소한 펜더 사건으로 거대한 부의 재분배를 이뤄 도움이 절실한 사람들에게 가도록 만들었다. 망신당한 차주가 고통을 겪든 내가 모은 기부금이 창출한 행복이 다 갚고도 남는다.
하지만 결과주의에서는 내 행동이 초래한 사회적 손해도 합산해서 행복의 총량을 계산한다. 이제 사람들은 아무리 작은 일도 그 일의 중요성을 놓고 국민투표를 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일반적으로 그런 세상이 살기 좋은 사회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자신도 같은 일을 겪을 수 있는 세상임을 깨달음으로써 그것이 초래한 추가 고통을 더해 행복․고통의 총량을 다시 계산했지만 사실 추가된 고통은 그리 크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누구나 다른 사람들과 작은 논쟁을 겪으며 어딘가 에서는 항상 그보다 훨씬 큰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이 문제에는 공리주의적 ‘재계산’을 충분히 적용해볼 법하며 그 총합에 엄청난 양의 고통을 추가해야 한다.
또 칸트주의자는 뭐라고 할 것인가? ‘사소한 교통사고에 연루된 사람에게 보상 받기 전에, 국가적 재난 상황에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고려해 자동차 수리의 상대적 중요성을 따져보라고 강제하는 것‘은 분명 정언명령에 위배된다.
모든 사람이 따를 수 있는 규칙일까? 아니다. 그건 미친 짓이다. 두 번째 공식도 위반했다. 그 남자를 여러 가지 목적을 수단으로 이용했으니 말이다. 이 사고와 전혀 관계없는 사람을 돕는데 이용했고 하리케인 피해자 처우에 내 분노를 달래는 데 이용했으며, 자동차 보험의 불합리성을 이용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망신 주기 자체가 덕이 아니라면서도 이렇게 말했다. “지나치게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은 모든 일에서 부끄러움을 느끼며, 이는 과도하다. 수치심이 부족하거나 수치심을 전혀 느끼지 않는 사람은 명예를 모르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온화함을 설명한 방식을 다시 떠올려보자. 화를 내야 할 상대를 향한 알맞은 양의 분노, 이것이 온화함이다. 차주는 내가 행한 만큼 망신당할 정도로 잘못하지 않았다. 그가 자기 차를 얼마나 아끼는지 이야기하면 그만이었다.
나는 거기에 아무런 관련도 없는 허리케인까지 끌고 들어가 이 사건에 인류의 크나큰 고통을 덤으로 얹었다. 나는 그 방정식을 통째로 갖다 버렸다. 이는 무지막지하게 불공평한 행동이었고 그 때문에 그 사건이 공공연하게 커지자 갑작스러운 죄책감이 폭발하고 말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일을 처음부터 지켜봤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진짜 큰 실수했네.”
자신과 타인에게 도움을 주는 죄책감이나 수치심의 알맞은 양이라는 게 있다면 죄책감이 수치심보다 훨씬 더 많이 필요할 것이다. 죄책감은 자기 행동을 스스로 깨닫는 데서 나온다. 타인의 말보다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잘 반응한다.
결국에는 범퍼 사건이 좋은 일을 많이 했다. 일단 덕분에 윤리 철학에 관심이 생겼다. 이 모든 것을 겪고 난 후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 어제보다 오늘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더 좋은 삶을 위한 철학’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마이클 슈어 지음, 염지선님 옮김, 김영사출판> * 마이클 슈어 : 미국 NBC방송국의 스타 프로듀스, <더 오피스>,<브루클린 나인나인>,<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등을 제작했다. 미 방송계 최고 권위인 에미상을 2번 수상했다. <긋 플리이스>감수를 맡은 철학자 토드 메이와 인연을 맺으며 도덕 철학에 깊이 빠져들었다. 이 책은 윤리학과 철학을 향한 여정의 결과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