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의 첫째 단계
첫째는 체계 내적intra-systramic사고의 단계이다. 여기서 개인은 단일한 체계의 규칙을 익힌다. 규칙에 충실하면서 사고의 일관성, 안정성, 정체성을 획득한다. 원칙 없는 사고의 혼돈, 줏대 없는 판단의 무질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 단계의 주체는 이 세상의 문제 각각에 확실한 정답이 있다고 믿는다. 연령상 20대 초의 젊은 대학생들이 이런 유형의 정신이다. 갓난아이의 정신은 밀가루 반죽과 같이 고정된 형태를 지니지 않는다. 성인의 정신이 지닌 일정한 형태는 교육과 학습의 산물이다.
인간의 정신이 고정된 형태를 얻는 과정은 사회라는 말로 통칭된다. 사회화는 사회적 규범을 내면화하는 과정이다. 그 내면화 과정은 주체가 특정한 사회적 질서에 편입, 소외되는 절차다. 왜 소외라 하는가?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습성을 얻기 위해 자연적으로 주어진 성질을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화를 거쳐 일정한 정체성을 얻지만 그 정체성은 자연적인 본성을 포기한 대가로 주어진 제2의 천성이다.
인간은 처음부터 자율적 주체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정신분석이 설명하는 것처럼 처음부터 자기 욕망의 주인이 되기를 원하는 주체는 타인과 소통이 불가능한 인간, 광인이 된다. 인간은 자율적 주체로 태어나기 전에 먼저 타인과 말이 통하는 합리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
합리적이고 따라서 기대 가능한 개인, 계산 가능한 행동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럴수 있기까지 먼저 자신의 원초적인 욕망을 괄호 안에 묶고 타율적 훈육의 절차를 받아들여야 한다. 주체화는 예속화에서부터 시작된다.
성숙의 둘째 단계
둘째는 체계 간 inter-systramic사고의 단계다. 이 단계의 주체는 모든 문제는 복수의 답이 가능하다는 믿음에 도달한다. 그러나 체계 간의 갈등을 용인할지언정 아직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연령상 40~50대의 중년이 이런 유형의 정신이다.
이들이 터득한 다각적 비판 능력이나 갈등 조율 능력은 자신이 속한 체계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시선의 입지를 구축한 결과다. 답은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럿일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기 위해서는 먼저 진리가 거짓으로, 거짓이 진리로 전도되는 경험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전도의 경험으로 인하여 허무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기존의 기준을 반증하는 사례들을 오히려 더 큰 진리를 긍정하는 상향적 판단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단일 체계 내에서 성립하는 진리가 있는가 하면 복수의 체계 사이에서 성립하는 진리도 있다. 이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형식논리의 사유를 버리고 변증법적 사유를 연습해야 한다. 변증법적 사유에서 긍정은 부정의 부정이다. 여기서 진리는 부정된 오류(부정된 진리의 부정)라는 의미에서 전도된 오류다. 진리는 오류에 의해, 오류는 진리에 의해 매개되어 있다.
본질은 본질상 보이지 않는 것이므로 어떤 형태를 띠고 나타나기 위해서 자신을 비본질적인 요소로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가상화다. 본질이 가상화를 본질로 한다는 발견이 이루어지면서 가상은 본질의 내면을 구성하는 필연적 계기로 반전된다. 변증법의 묘미는 대립과 모순을 찾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안에서 바깥을 찾거나 바깥에서 안을 찾는 데 있다.
공자는 아는 자, 좋아하는 자, 즐기는 자를 구별했다. 아는 자와 좋아하는 자는 전형적인 체계 내적 사유의 주체에 해당한다. 좋아하는 자는 능동적으로 규칙에 복종하는 주체, 외부 규칙을 자율적 입법의 대상으로 내면화하는 주체다.
반면 즐기는 자는 특정 체계를 조직하는 이항 대립의 질서에서 벗어나 있다. 특정 규칙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무질서로 전략하지 않는다. 즐김의 주체는 체계 내적 사유를 넘어서는 것처럼 체계 간 사유도 넘어설 수 있다. 이는 변정법적 사유를 넘어선다는 것과 같다.
성숙의 셋째 단계
서로 다른 체계들이 상호 변형, 화해하는 통합적 단계다. 여기서 인간은 역사를 변화시키는 창의적인 지혜를 발휘한다. 이 단계에서 창의적인 지혜가 건너야 하는 마지막이자 최대의 간극은 로고스와 뮈토스, 논리-추상적인 사유와 서사-감성적인 사유의 차이에 있다.
우리는 여기서 개념적 논증과 서사적 연출이 서로를 촉발하고 변용하는 놀라운 지혜를 기대할 수 있다. 연령상 50~60대의 노년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이 최후의 단계에서는 논증하는 사고와 시적 상상력이 얽히며 하나가 된다.
논리-추상적인 사유는 과학에 의해, 서사-감성적인 사유는 예술에 의해 대변된다. 과학과 예술은 유의미한 새로움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같다. 과학적 상상력과 예술적 상상력은 미지의 것으로 향한다는 점에서 창의적 상상력이라는 상위의 범주 아래 함께 묶일 수 있다.
이때 우리는 두가지 물음과 마주치게 된다. 과학적 상상력과 예술적 상상력의 상호 변별적 특징을 어떻게 개념화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다른 하나는 양자를 하나로 묶는 창조적 상상력 일반의 형식적 패턴을 어떻게 그려볼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과학적 상상력은 인과적 질서의 테두리 안에서 펼쳐진다. 반면 예술적 상상력에서 사물들은 인과적 질서가 아니라 상관적 질서를 이루며 모여든다. 상관적 질서란 사실의 질서라기보다 상징의 질서다. 과학이든 예술이든 분야를 막론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위대한 창조의 배후에는 서로 배타적인 것처럼 보이는 두 유형의 사유가 함께하고 있다.
창조적인 상상력은 마지막에 가서 논리와 신화, 개념과 정념, 논증과 서사, 인과성과 상관성의 이분법을 뛰어넘으면서 전개된다. 우리는 경계가 소거되어 창조적인 상상력이 펼쳐지는 그런 사태를 즐김의 개념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유희의 개념에 담을 수 있다.
창조와 유희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정신의 발전 단계를 세 가지로 나누었다. 그 세 단계의 정신을 각각 낙타, 사자, 어린이로 묘사했다. 먼저 무거운 짐을 지고 물 없는 사막을 건너는 낙타는 인내와 복종의 주체를 상징한다.
낙타 유형의 주체에게는 자신이 이겨낸 과제의 무게가 행복의 무게와 비례한다. 그는 스스로 견디는 고통의 강도가 쾌락의 강도 자체가 되는 피학적 주체다.
반면 우렁찬 목소리로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고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으로 사냥에 나서는 사자. 그는 기존의 권위에 도전하는 주체를 상징한다. 사자 유형의 주체는 고유한 주장을 펼치는가 하면, 날카로운 비판의 칼날을 세워 자신과 어긋나는 주장을 갈기갈기 찢어 놓는다.
그는 스스로 무너뜨린 대상의 크기에 비례하여 쾌락의 양이 증가하는 가학적 주체다. 그러나 창조하는 정신은 낙타도 아니고 사자도 아니다. 그것은 어린아이다. 아이는 짐을 지거나 인내하지 않는다. 다만 놀고 있을 뿐이다. 놀이에 빠져 있을 때 우리는 단순히 능동적인 것도, 그렇다고 수동적인 것도 아니다.
다만 돌아가고 있는 팽이처럼 능동적이면서 수동적이고, 수동적인 동시에 능동적이다. 유희의 주체는 능동과 수동, 고통과 쾌락, 주체와 객체, 내면과 외면의 대립 저편에 있다.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는 놀이에 빠졌을 때처럼 우리 자신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자신을 잃어버릴수록 자신을 다시 찾는다는 것이 사랑의 역설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자신을 상실하되 사랑의 대상 속에서 자신을 다시 만난다. 더구나 거기에는 헌 몸을 버리고 새 몸을 얻는 놀라움이 있다. 평범했던 자기를 잃고 뜨거운 자기를 얻는 것이다.
슬픔이나 기쁨 같은 정념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정념은 이성적 사고를 마비시킨다는 점에서 우리를 노예 상태로 빠뜨린다. 그러나 위대한 결단과 행동은 뜨거운 정념의 힘이 없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다.
여기서 공자가 구별했던 세 유형의 인간을 비교해보자.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 여기서 아는자, 좋아하는 자, 즐기는 자는 각각 수동태, 능동태, 중간태에 놓여 있는 주체라 할 수 있다. 즐김의 주체는 대상에 관계하되 온몸으로 관계한다.
그러므로 사랑에 빠진 듯, 놀이에 빠진 듯, 자신을 상실하되 대상 속에서 다시 자신을 만난다. 일상의 자기를 잃어버리는 대신 자신이 몰랐던 자기, 자기 이상의 자기를 획득한다. 향유 속에서 인간은 정념의 주체로 태어날 뿐만 아니라 사회화 과정에서 거세되었던 자신의 고유한 욕망을 회복한다.
니체가 말하는 아이-되기의 의미는 여기에 있다. 위대한 창조는 아무에게나 기대할 수 없다. 그것은 적어도 아는 자나 좋아하는 자로 머물러 있는 사람에게는 결코 기대할 수 없는 사건이다. 물론 즐긴다고 해서 그대로 위대한 창조로 나아가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위대한 창조는 오로지 향유의 주체로까지 변신한 사람들 사이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향유의 주체는 노는 아이와 같은 유희의 주체와 짝을 이룬다.
위대한 창조는 어른 속에서 다시 자라나는 아이와 더불어 겨우 싹트는 가능성이다. 성숙은 미숙한 아이의 어른-되기에서 시작되면서 마지막에 가서는 어른의 아이-되기 속에서 완성된다.
<‘이야기의 끈’-서사적 사고‘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김상환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 지음, 이학사 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