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자료

배려!

[중산] 2023. 11. 27. 11:04

 

병산지

 

 

 

나 아닌 우리, 배려의 계약

 

마트의 카트를 쓰고 제자리에 갖다 놓아야 할까?

 

다른 사람들을 위해 하는 좋은 일 중에 늘 하면서도 가장 작은 일은 무엇일까? 길에 주차할 때 차 한 대 들어갈 정도로 넉넉히 남겨 다른 사람이 주차하도록 배려하는 것?

 

아니면 밤길을 걷다가 몇 미터 앞에 혼자 걸어가는 여자가 있으면 반대편으로 길을 건너 그 여자가 뒤에서 들리는 발걸음 소리에 불안해하지 않게 해주는 것?

 

예전에 어른들께 남들에게 사려 깊게 행동하라고 가르침을 받았거나, 누군가에게 그와 같은 비슷한 배려를 받고 기분이 좋았던 적이 있어서 그런 행동을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행동할 때, 작지만 기본적인 ‘다른 사람을 위한 일’을 할 때, 어떤 행복감을 느껴진다.

 

‘나는 좋은 사람이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오늘 ‘좋은 일‘을 했군.”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오로지 다른 사람을 위해 행함으로써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드는 일이다.

 

예를 들어 미리 차선을 바꾸지 변경하지 못해 어떻게 좌회전을 헤매고 있을 때 누군가가 정지하고 내게 먼저 가라고 손을 흔들어주면 나는 형언할 수 없는 행복감을 느낀다.

 

이는 나를 둘러싼 사람들이 타인의 생명과 감정을 중요하게 여겨 배려한 다는 뜻이고 나는 그런 배려야말로 사회를 지탱하는 힘이라고 믿는다. 반대로 ‘16~19시 좌회전 금지‘라고 적힌 표지판을 무시하고 샛길로 들어서려고 하는 사람들을 볼 때, 나는 눈에서 불을 뿜어 그 차를 고철 덩어리로 녹여버리는 상상을 한다.

 

윤리 규칙과 스캔론 사상(계약주의)

 

작은 친절의 중요한 점은 기본적으로 비용이 들지 않으며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준다. 윤리 규칙을 정하는 데는 스캔론의 사상을 받아들이면 실제 적용하기에도 훨씬 쉽다.

 

토마스 스캔론은 자기 이론에 ‘계약주의’라는 이름을 붙였다. 참고로, 스캔론의 계약주의는 루소의 “사회 계약론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이론이다.

 

스캔론의 사상은 칸트의 ‘규칙 중심’ 윤리학에 기반을 두지만 칸트만큼 요구하는 게 많지는 않다. 칸트는 뾰족한 가시투성이인 보편 준칙을 순수이성을 사용해 추상적으로 형상화할 것을 요구하며 까다롭고 시간이 많이 든다.

 

하버드대학교에서 스캔론의 제자로 수학한 히에로니미교수는 계약주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몇 년째 전쟁 중이라고 해보자. 심각한 교착 상태다. 둘 중 어느 한쪽에게도 유리한 상황이 아니며 앞으로도 희망은 없다. 요즈음 마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간의 전쟁과 같은 상황이다.

 

결국 언젠가는 지친 나머지 휴전 협정을 맺고 둘 다 살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하기로 한다. 양쪽의 관점이 얼마나 다르든 두 사람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규칙이 필요하다. 여기서 스캔론은 이렇게 제안한다.

 

"양쪽 모두에게 지금까지의 모든 규칙을 거부할 권한을 준 다음 규칙을 새로 만들게 한다. 모두가 규칙을 만드는 일에 적극이라 가정하되(둘 다 합리적이라는 전제)한번 통과한 규칙은 다시 거부할 수 없다."

 

이 경우 상대를 위한 규칙을 만들지 않으면 규칙으로 통과할 수 없으므로 결국 모두가 서로 다른 사람에게 정당한 규칙을 설계한다. 모두를 하나로 묶는 사회적 기본 끈끈이를 찾는 간단하고도 우아한 방법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모든 사람이 ‘합리적이라는’ 커다란 전제가 있다.

 

나와 누군가가 서로 동의하지 않을 때 상대방이 자신의 이익 추구를 억누르거나 조절하는 만큼 내가 내 이익 추구를 억누르거나 조절하려 한다면 나는 합리적인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모두를 위한 규칙을 만들고자 한다면 자신을 먼저 생각하기보다 서로의 필요를 충족해주는 세상을 만들기를 원하며, 무언가를 놓고 모두의 생각이 같지 않을 때도 모두가 조화롭게 공존할 방법을 찾는 걸 가장 중요한 일로 여긴다.

 

스캔론은 “사람들이 상대방도 충분히 받아들일 만한 정당한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개인적 필요를 바꿀 의지를 공유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스캔론 이론을 우리가 사는 세계에 적용할 경우, 계약주의는 나쁘거나 부정한 행동을 구별하는 좋은 잣대다.

 

예컨대 ‘긴급한 상황’이 아니면 고속도로 갓길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규칙을 제안했다고 해보자. 아무도 합리적인 이유로 이 규칙을 거부할 수는 없을 터다. 제대로 적용하면 모두가 똑 같은 혜택을 볼 테고 공공 안전에도 도움을 주니 말이다.

 

‘가능하면 다른 사람도 주차할 수 있게 충분한 공간을 남겨두고 주차해야 한다.’같은 규칙을 거부할 사람이 있을까? 없다. 아니, 어떤 합리적인 사람이 그런 규칙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이 계약주의가 칸트의 의무론보다 내 마음을 더 끄는 이유 중 하나다. 칸트는 문제가 생기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명상을 위한 독방 같은 곳에 혼자 들어가 문제를 마주하고 순수이성으로 보편 준칙을 찾아내 문제에 적용한 뒤 그 준칙을 따르려는 의무감에서 행동해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반면 스캔론은 이 모든 것을 같이하라고 한다. 서로 마주 앉아 “이렇게 하는데 동의하나요?”하고 묻는 것이다. 스캔론은 추상 추론을 믿지 않는 대신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우선시한다.

 

물론 좀 위험해 보일 수도 있다. 자기 운명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것은 위험한 도박처럼 느껴진다. 스캔론은 이 상황을 두고 뭐라고 말할까? 우선 제안할 만한 규칙은 ‘마트에서 카트를 쓰고 난 후에는 다음 사람이 쓸 수 있게 제자리에 돌려놓자’ 정도일 것이다.

 

합리적인 사람이면 매우 높은 확률로 거부할 이유가 없는 규칙이다. ‘만일 카트 수거 전담 직원이 있으면 주차장에 그대로 두고 가도 된다’라면 어떨까? 이 역시 거부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계약주의에는 전제가 있다. 바로 모든 사람이 함께 사는 세상을 위한 최소 기준을 정하기 위해 적극적일 거라는 전제 아래 모두가 동의하고 따르기로 한 기준을 정한다.

 

스캔론은 저마다 다른 사람들로 가득한 이 세상을 둘러보고는 모두가 따를만한 행동 기본값을 설정하려 한다. 스캔론 이론은 확실히 싫어하고 동의하기 어려울 만한 행동을 하지 않도록 하는 데 초점을 둔다.

 

자, 그렇다면 카트를 쓰고 나서 제자리에 두어야 하는 것일까? 아니다. 안 그래도 된다. 그래도 카트를 제자리에 갖다 둘 것인가? 그렇다. 그렇게 하는 것이 좋으니 말이다. 좀 더 수고가 들어도 가능하면 계약론에서 말하는 ‘없으면 안 되는 최소한의 필요’보다 더 하는 것이 좋다.

 

여기에는 하찮은 정도의 수고와 배려가 들지만 잠재적으로 꽤 많은 사람의 행복과 편의를 창출하고 스트레스를 줄여준다. 다른 사람을 돕는다는 말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여기서 공유하려는 목표여야 한다.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은 크고도 막연한 생각이지만 그 목표 없이 ‘다른 사람을 돕겠다.’고 선언하려면 그 의미를 정확히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다. 말 그대로 다른 사람을 돕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다.

 

친구가 이사할 때 계단에서 무거운 박스를 들어줄 수도 있고, 노숙자에게 무료 음식을제공하는 단체에 50달러를 기부할 수도 있다.

 

우리가 있어서 내가 있다(우분투)

 

‘다른 사람’이 중요한 이유를 설명한 것 중 세계관에 가까운 훌륭한 아프리카의 남부 ‘우분투ubuntu'라는 개념이 있다.

 

‘인간적임, 보살핌, 나눔, 존중, 연민 그리고 모두가 가족이라는 의식 아래 변치 않는 인간의 공통체적 삶에 행복을 가져다주는 가치에 기반을 둔 고대 아프리카의 포괄적 세계관’ - 이것은 남아프리카 철학자 요한 브로드릭이 정의한 ‘우분투'의 개념이다.

 

우분투는 스캔론의 계약주의와 같지만 한층 강화한 형태로 볼 수 있다. 우분투는 단지 타인에게 의무를 지는 데서 끝나지 않고 사람은 다른 사람을 통해 존재한다고 말한다. 타인이 건강한 것이 내가 건강한 것이고 타인의 행복이 내 행복이며 타인의 관심사가 곧 내 관심사다.

 

정치학자 마이클 에제Eze가 우분투의 특징으로 인용한 덕목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관대함, 나눔, 친절’을 떠올리게 하지만 우분투에서는 개인이 아닌 공동체를 강조한다. 우리는 우리의 빌어먹을 존재 자체 때문에 타인에게 의무를 진다.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존S.음비티는 이렇게 말했다.

 

"개인은 혼자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 수도 없다.(…) 사람은 존재 자체로 다른 사람에게 의무를 지는데 여기서 다른 사람이란 지난 세대와 동시대의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 개인은 전체의 일부일 뿐이다. (…) 한 개인에게 일어나는 일은 전체 공동체에 일어나는 일이며, 전체 공동체에 일어나는 일 역시 개인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개인이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이것뿐이다. 나는 우리로 인해 존재하고 우리가 있어서 내가 존재한다.”

 

데카르트 철학(개인)과 우분투 사상(우리) 비교

 

서양 사상에서 데카르트 철학의 제1명제, ‘코기토, 에르고 줌’(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 한다)을 잠시 생각해보자. 이를 우분투 사상 즉 ‘우리가 있어서 내가 존재한다.’와 비교하면 세상에나 이렇게 큰 차이가 있다니 하는 생각이 든다.

 

데카르트는 자신의 단일 의식으로 존재를 증명하고자 했지만 우분투를 실행하는 이들은 자신의 존재를 정의할 때 다른 사람의 존재를 조건으로 한다. 스캔론은 ‘서로를 존중한다는 걸 서로 알고 있는’ 윤리 체계를 확립하고자 한다.

 

도덕의 이러한 방향 전환은 우분투 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 내면의 이기주의에 제동을 걸고 주변 사람과의 관계를 개인적 ‘선량한 계량기’의 중심에 두게 한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창궐한 뒤 처음 1년을 지나는 동안 지속적으로 해로운 쟁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아무도 마스크를 쓰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수백만 명의 바보천치가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좀 더 수고가 들지만 사실 더 든다고 할 수도 없을 만큼 작은 수고다. 대신 마스크를 썼을 때의 장단점을 헤아려보면 쓰지 않는 게 미친 짓으로 여겨질 정도다.

 

우리가 할 일은 2달러짜리 마스크를 사서 밖에 나갈 때 쓰는 것이다. 이득을 보는 사람은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다. 묘하게도 전 지구에 퍼진 코로나전염병은 계약주의를 설명하는 데 이상적인 시나리오다.

 

이 상황에서 사람들이 지는 의무는 그 형태가 명확히 드러나는데 의무의 크기는 그야말로 미세하고 이득은 천문학적으로 막대하다. 계약주의는 불합리하거나 이기적으로 느껴지는 행동을 빠르고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더 좋은 삶을 위한 철학’에서 그히 일부 요약 발췌, 마이클 슈어 지음, 염지선님 옮김, 김영사출판> * 마이클 슈어 : 미국 NBC방송국의 스타 프로듀스, <더 오피스>,<브루클린 나인나인>,<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등을 제작했다. 미 방송계 최고 권위인 에미상을 2번 수상했다. <긋 플리이스>감수를 맡은 철학자 토드 메이와 인연을 맺으며 도덕 철학에 깊이 빠져들었다. 이 책은 윤리학과 철학을 향한 여정의 결과물이다.

 

 

 

선운사 도솔암
선운사 가는 길
11월 말의 마지막 단풍

 

첫눈 산행, 남덕유산 가는 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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