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깨침
사랑!
예쁘지 않은 것을
예쁘게 보여줌
믿음!
믿을 수 없는 것을
의심 없이 믿어줌
기적!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분명히 일어남.
- 나태주
부모에게 자기 자식은 모두 신동이다!
신동은 나이가 들면 더 이상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어려서 유럽이나 미국에 유학을 떠난 한국의 음악 신동들이 나이가 들수록 지극히 평범한 음악가로 주저 앉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악보를 달달 외우고, 작은 손가락으로 그 큰 악기를 기계처럼 다루는 연주 실력에 관객들은 처음에만 감동할 뿐, 곧 심드렁해지기 때문이다.
신동 모차르트가 성인이 되어서도 천재로 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수공업자의 예술’에서 ‘예술가의 예술’로의 전환이라는 시대적 맥락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엘리아스의 통찰이다.
바흐나 헨델의 경우를 보자. 교회나 긍정의 음악가였던 그들의 사회적 지위는 숙련된 수공업자에 불과하다. 그들이 작곡한 음악도 자율적 주체의 ‘창조적 행위’라기 보다는 교회나 궁정의 의례에 맞춰 끊임없이 생산해야 하는 ‘수공업적 행위’의 결과였다.
좌우간 오래 살면 천재고 영웅이고 다 포기해야 한다. 후세의 사람들은 아주 오래 산 그들을 차마 천재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바흐를 ‘음악의 아버지’, 헨델을 ‘음악의 어머니’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런 호칭은 순전히 일본인들의 작품이다. 독일에서 그런 호칭은 들어본 적이 없다.
모차르트에 비해 14년 늦게 태어난 베토벤을 우리가 천재라고 부르는 데 약간 주저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57년을 살았으니 요절한 것도 아닌데다, 출판과 예술만으로 먹고 살 수 있는 ‘예술가의 예술’을 할 수 있었다.
반면 모차르트의 사정은 많이 달랐다. 한편으로는 궁정 사회에서 인정받고, 재정적 후원을 받기 위해 귀족들의 주문에 맞춰 작곡해야 하는 수공업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다양한 실험을 통해 자신의 예술적 상상력을 마음대로 펼칠 수 있는 주체적 예술가로서의 삶을 끊임없이 시도했다. 이런 이중적 삶이 모차르트를 천재로 만들었다.
안정된 사회에서 천재는 나타나기 어렵다 안정된 사회란 발달 과정이 정형화된 사회를 뜻하기 때문이다. 천재란 한 사회에서 다른 사회로의 이행기에 집중해서 나타난다.
피카소의 천재적 예술 작품도 ‘표상’으로서의 미술의 사진이라는 기계적 수단에 의해 위협받던 시대의 산물이고, 잡스와 같은 천재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제가 아주 우연하게 한 개인에게 깔때기처럼 모인 결과다.
천재는 사회 문화의 변동이 한 역사적 개인에게 편집되어 나타나는 우연적 결과다. 따라서 자식이 신동이라 해도 천재로 만들려고 달려들 필요가 전혀 없다. 어차피 모든 부모에게 자기 자식은 모두 신동이다.
자식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천재가 되면 요행이고, 안 돼면 다행이다. 천재는 일찍 죽거나, 혹시라도 오래 살면 죄다 불행해지기 때문이다.
<‘에디톨로지-창조는 편집이다’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김정운님 지음, 21세기북스 출판> * 김정운 : 문화심리학자이자 화가, 고려대학교 심리학과 졸업하고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교 심리학과 박사.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교 전임강사 및 명지대학교 교수를 역임했으며, 일본 교토사가예술대학교에서 일본화를 전공. 여수에서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가끔 배를 몰고 나가 고기를 잡는다.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 <에디톨로지>,<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남자의 물건>,<노는 만큼 성공한다> 등을 집필했다.
코로나바이러스의 위기
원칙적으로 코로나바이러스의 위기는 감염, 입원, 사망자 수와 같은 상대적으로 간단한 현상의 계산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러나 데이터가 전혀 객관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명확히 드러났다. 감염자 수는 대개 PCR 검사 결과로 판명되었는데, 이 검사 자체가 무난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PCR 검사는 한 바이러스의 RNA서열이 체내에 존재하는가를 판단하도록 고안된 것이다. 이 RNA 서열은 악성 바이러스에서도 발견되지만 ‘죽은’ 바이러스에서도 발견된다. 즉, 감염 후 수개월이 지나도 양성 판정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양성 검사 결과율에 근거해 감염률 변화를 추산하는 것은 문제가 많다고 밝혀졌다. 예를 들어 공중보건 전문가들은 총 검사 실시 횟수를 조정하기를 완강히 거절했다.(그들은 양성 결과의 비율 대신 양성 검사의 절대 수치를 보고했다)
입원 관련 데이터도 극도로 상대적이었다. 입원 당시 양성으로 판정된 환자는 코로나19 증상이 있었든, 그밖에 이를테면 다리 골절을 앓았든 관계없이 전부 코로나19 환자로 여겨졌다.
어느 시점에 이르자 스코틀랜드 정부는 분류 방법을 바꿔, 검사 결과가 양성이면서 코로나19 증상으로 입원한 환자만 코로나바이러스 환자로 계산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애초에 코로나 환자로 분류했던 환자 중 13%만이 남았다.
병원 데이터를 왜곡한 것은 이 요인만이 아니었다. 2021년 봄, 벨기에 매체 보사에는 코로나바이러스를 철저하게 조사한 탐사 보도 중 하나를 발표했다. 병원을 비롯한 의료 기관들이 금전적 이득을 위해 사망 및 코로나19로 인한 입원 수치를 인위적으로 부풀렸다고 폭로했다.
정말 놀라운 점은 코로나바이러스 위기 동안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사망자 집계에 관한 데이터도 명확한 것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판명되었다.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으로 등록된 사례 중 95%는 하나 이상의 기저 질환이 있었다.
미국 질명통제예방센터에 따르면, 사망자가 가진 유일한 질환이 코로나19였던 경우는 겨우 6%뿐이었다. 또한 코로나바이러스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은 대개 고령이었다. 봉쇄전략은 영국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에서 개발한 모델을 기반으로 삼았다.
이 모델들은 대유행을 억제할 대대적인 조치를 발효하지 않는다면 2020 5월 말경에 전 세계적으로 4천만 명, 스웨덴이 8만 명이 사망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물론 그런 결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스웨덴에서 집계된 사망자 수는 6천 명이었다.
공중보건 관계자들도 일반 사람들도 전혀 의견을 바꾸지 않았다. 사회가 하나같이 열광적인 방식으로 똑 같이 반응하도록 무언가가 부추겼다. 마치 절박한 심리적 욕구를 충족하고자 행동하는 것처럼 말이다.
기계론적 이데올로기는 ‘객관적인’ 수치 정보를 기술관료가 주도함으로써 주관적 선호도와 권력 남용이 근절되는 사회 건설을 목표로 삼는다고 설명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수치의 객관성을 믿는 순진한 신념은 오히려 정반대 상황을 낳는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주도적인 이데올로기는 자신의 내러티브를 확증하는 수치를 끊임없이 대중 매체에 공급하고, 그 결과 대다수 국민이 확실히 믿는 대체로 허구적인 실체를 내놓게 된다.
다른 의견을 내놓는 목소리들은 ‘팩트체크’하는 사람들이 차고 넘치는 참다운 진실부Ministy of Truth에 의해 낙인찍히고, 검열과 자기검열 속에 발언의 자유가 축소되며, 사람들의 자기 결정권은 강요된 예방접종에 의해 침해된다. 그리고 이는 거의 상상할 수도 없는 사회적 배제와 분열을 일으킨다.
코로나 바이러스 위기를 둘러싼 담론은 20세기에 전체주의 체제를 등장시킨 유형의 담론이 드러낸 전형적인 특징들을 보여준다. ‘사실에 대한 극도의 경멸을 드러내는’ 수치와 통계자료의 과도한 사용, 사실과 허구 사이의 경계가 흐려지는 시대, 기만과 조작을 정당화하며 결국 모든 윤리적 경계를 넘어서는 광신적인 이데올로기적 신념 등이 그것이다.
이로써 허위의 안정에 도피하는 것은 불확실성과 위험 요소를 다루지 못하는 심리적 무능력, 즉 수십 년 혹은 수 세기 간 사회에 축적된 무능력이 가져온 논리적 결과임을 보게 될 것이다.
과학과 진실
전체주의는 인간 지성이 삶과 사회의 지침 원리가 된다고 여기는 신념이다. 이 이데올로기는 기술 관료와 전문가들이 그들의 기술 지식을 바탕으로 사회라는 기계를 결함 없이 운영함으로써 유토피아 같은 인공적인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전체주의 관점 안에서 개인은 집단에 완전히 종속된 채 사회라는 기계 속에 부착된 하나의 부품으로 축소된다(버트런드 러셀의 <사회에 대한 과학의 영향>을 참고하라) ~
<‘전체주의 심리학-기술관료와 대중 형성은 어떻게 21세기 전체주의의 기반이 되는가’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마티아스 데스밋 지음, 김미정님 옮김, 원더박스출판> * 마티아스 데스밋 : 코로나 19 팬데믹에 적용되는 대중 형성 이론의 세계적인 전문가이다. 벨기에겐트대학교 심리학 및 교육학부에서 임상심리학교수로 재직 중이며, 정신 분석적 심리치료를 제공하는 상담가이기도 하다. 저서로는 <심리학에서의 객관성 추구>, <주관성에 관한 라캉의 논리> 등이 있다. 2018년 정신분석 사례연구상을, 2019년 네덜란드 빔 트라이시버스 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