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를 생각하며 / 이해인
우울한 날은
장미 한 송이 보고 싶네
장미 앞에서
소리내어 울면
나의 눈물에도 향기가 묻어날까
감당 못할 사랑의 기쁨으로
내내 앓고 있을 때
나의 눈을 환히 밝혀주던 장미를
잊지 못하네
내가 물 주고 가꾼 시간들이
겹겹의 무늬로 익어 있는 꽃잎들 사이로
길이 열리네
가시에 찔려 더욱 향기로웠던
나의 삶이
암호처럼 찍혀 있는
아름다운 장미 한 송이
'살아야 해, 살아야 해'
오늘도 내 마음에
불을 붙이네
나라는 존재!
제가 베빌라쿠아를 알게 된 것은, 물론 감옥에서였습니다. 저는 그와 이야기하는 것이 좋았고 , 그에게 제가 소장하고 있는 책에 대해 말하는 것이 좋았고, 제가 만들어낸 문학적 허구들을 그의 귀청에 울러 퍼지게 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저의 기억이 미치는 그 언제가부터, 저의 입술은 혼자서 저절로 움직였습니다. 타자기를 앞에 하면 자판을 두드렸고, 백지를 앞에 하면 글을 적어내려 갔습니다. 그 어떤 도구가 없으면 혀를 사용했지요.
밤에 잠을 방해하는 장애물 들을 마주하게 되면 저는 이야기를 지어냈는데, 그것들은 제가 어두움 속으로 빠져듦에 따라 흐트러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베빌라쿠아가 적격자였던 것은, 그가 그러한 흐트러짐을 막아주었기 때문입니다.
애초부터 그는 저의 신뢰를 얻었습니다. 마치 군대에서 본능적으로 덜 무모한 하사를 신뢰하게 되고, 더 익숙한 무기를 신뢰하게 되듯이 저는 그를 신뢰할 수 있다고 느꼈습니다.
색다름은 성공의 친구가 아니지요. 그리고 매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자 같은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든 미적인 관용을 기대하지 않는 것이 상책입니다. 정직함, 그것은 다른 것이지요. 그 자체에 약간의 관용이 내포된 정직함 말입니다.
그는 전혀 질투심이 없었습니다. 문학적 영감을 북돋는 질투심, 다른 사람의 모든 책이 실패하고 그것이 받는 모든 보상이 덧없는 것이기를 바라는 질투심 같은 것은 베빌라쿠아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의 감정들은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들이었지요. 질투심이란 조심성과 자제력의 발휘를 필요로 하고, 입꼬리와 피부색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의 미소는 부드러웠고 그의 피부색은 언제나 잿빛이었습니다.
복음서의 말씀처럼, 저는 저의 아버지의 집에 있었을 때가 가장 좋았습니다. 어떻게 하찮은 장소가 중대한 결과를 초래하는 만남들을 우리에게 안겨주는지 참으로 기이합니다.
이 경우, 베빌라쿠아에게는 중대했지만 저에게는 그렇지 않았지요. 인간은 두 종류로 나뉘는데, 신들은 재미삼아 이상한 숲으로 인도한 후 달빛조차 없는 한밤중에 절벽 가장자리에 내버려두는 사람들이 있고, 자기 혼자서 환한 오솔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결코 길을 잃어본 적이 없습니다. 원고지를 글자로 채워 넣을 때든 여행 가방을 지폐로 채워 넣을 때든지 간에, 항상 절도 있게 행동했고, 언제나 제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우리의 운명이 이뤄지기 위해서 별자리와 적절한 순풍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견고한 배 한 척과 우리를 위해 노를 저을 누군가가 필요할 뿐이지요. 어떤 가련하고 순종하는 불쌍한 녀석 말입니다. 베빌라쿠아가 저를 위해 그 역할을 해주었던 것이지요.
저의 운명을 결정지은 것은 바로 저의 육체였다고 생각합니다. 어렸을 적부터 <피노키오의 모험>의 충실한 독자였던 저는 제가 저 자신의 우스꽝스러운 캐리커처이자 저의 뒤바뀌어버린 영웅인 혐오스러운 나무 조각으로 변한 꼬마라는 사실을 언제나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엔 장점이 있었지요. 저는 저 자신을 엉터리로 흉내 낸 가짜에 불과했기에 사람들이 저를 놀릴 수는 없었습니다. 패러디를 패러디할 수는 없으니까요. 짧은 팔다리, 술통 같은 몸통과 욕망보다는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적합한 얼굴, 이것이 바로 저입니다.
특히 저의 얼굴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조각가들이 악마를 겁줘서 내쫓으려고 성당 부벽(扶壁)들에 만들어 놓은 것들과 비슷하게 생겼지요. 멍청해 보일 정도로 행복한 표정으로 내부 기둥들을 장식하고 있는 부드럽고, 섬세하고, 천사 같은 얼굴을 가지고 싶어서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아마 중간쯤 되는 것, 엄격하지만 아주 약간은 매력 있는 얼굴을 원할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그런 건 전혀 소용이 없기 때문이지요. ‘만일 … 했더라면’이란 것은 전혀 소용이 없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생겼다보니, 저에게 가능했던 경력은 오로지 두 가지뿐이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요. 군인 또는 문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둘 다에 전념했습니다.
제가 그려낸 간략한 자화상에 불쾌한 특징을 하나 더 덧붙여야만 하겠습니다. 바로 저의 냄새입니다. 청년 시절의 어느 날, 저는 아주 지독한 악취 한가운데서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그 냄새가 다른 사람에게는 존재하지 않고, 신의 은총으로 오로지 저에게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저의 화학적 구성 요소의 어떤 분자들이 계속적으로 악취를 풍기는 뭔가에 대한 느낌을, 후각적인 환각을, 다른 사람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유령을 저의 마음속에 만들어냈습니다.
저는 그것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것의 존재에 익숙해져서 저는 그것에게 이름을 ‘루벤’이라 지어주었습니다. 루벤은 저의 코 속에 밤낮으로 살고 있습니다. 저는 결코 혼자가 아니지요.
당신은 환생을 믿으십니까? 저는 믿습니다. 저는 이 살과, 이 뇌와, 이 통통하고 짤막한 손가락들이 재로 분해될 것이고, 또한 이 살과 이 뇌와 이 손가락들의 창의력 역시도 아직은 저도 모를 다른 형태로 다시 조합되리라고 믿습니다.
예를 들면 지금의 저의 코를 정당화해줄 개미핥기, 저의 글로 제가 그렇게 하듯 자기의 타액으로 자기가 디자인한 것들을 수놓는 짧은 다리의 키 작고 살진 거미, 또는 제가 태어난 모국의 땅을 파헤치며 몸을 비비 꼬아대고 있는 그리스어의 그 풍성한 ‘y'자 단어(yabas, yaicuajes…)이 그런 것처럼,
그 뿌리들을 오물 속에 내리고 있는 키 작고 강한 나무는 왜 아니겠습니까? 이상과 같은 것은 늪의 거주자 루벤의 멋진 재순환이 될 것입니다.
저의 아버님은 자손을 한 명으로 제한하셨습니다. 저를 보면서 느끼시는 혐오감 때문이라기보다는, 아마도 반골기질 때문이셨을 겁니다. 그분은 저에게 애정이 없으셨습니다. 애정 부족이 아마도 그분을 씨 뿌리는 것에 대해 지독히 인색하도록 만들었을 겁니다.
우리의 관계를 요약해주는 발길질과 구타는 어떤 면에서는 저의 생각을 입증해줍니다. 저의 어머님은 그분께 저를 죽이지 말아달라고 간청하고는 하셨습니다. 그러면 저의 아버님은 육체는 있는데 정신이 나간 것 같은 그런 경계점에서 멈추시면서, 그 말씀에 따르시고는 하셨지요.
그렇습니다. 저의 어머님은 저를 사랑하셨습니다. 저의 키가 그분의 무릎 정도였을 때부터 몇 년 후면 저도 다른 아이들처럼 될 거라고 저에게 장담하시고는 했고, 저의 지나치게 큰 귀와 비대한 어깨 사이에서 거의 없다시피 한 저의 목에 입맞춤을 해주시려고 애쓰시고는 했습니다.
물론 정상이 될 거라는 그분의 장담은 결코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존재의 가장자리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산 것은 나중에 어려운 순간들이 닥쳐 모든 것에 종지부를 찍고 싶은 나태함의 유혹을 느꼈을 때 저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는 현기증으로 고통 받지 않는 법을 배웠습니다.
저는 아주 젊었을 때 쿠바 군대에 들어갔는데, 이미 군대가 시에라마에스트라 산맥에서 반란군과 싸우기 시작했을 때였습니다. 우리의 임무는 식량과 군수품을 훔치려고 산에서 내려온 반란군을 찾아내는 것이었습니다.
언젠가 한번 우리는 해변에 있는 한 오두막에 도착했는데, 사람들이 거기에 가면 이웃 농장에서 돼지 두 마리를 훔친 한 농부를 발견할 거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저는 미소 띤 잘 생긴 청년들 줄 뒤에서 뒤처져서 따라갔습니다.
키가 작고 피부가 검은 한 여인이 누살을 찌푸린 채 우리를 맞았습니다. 우리가 들어가기 시작할 때, 그 여자는 나를 멈춰 세웠습니다. “이자는 안 되오. 이자는 내 집에 불운을 가져올 거란 말이오.” 그녀가 병장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저의 동료들이 집 안을 수색하는 동안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다른 것들보다 더 끔찍한 사랑의 조건이 하나 있지. 횡포하고, 배타적이고, 질투심이 많고, 전혀 분별력이 없는 것. 그 언어는 저속하고, 인정사정없고, 모욕적이지. 그 행동들은 때로는 부드럽고 때로는 무섭게 폭력적이지.
사랑은 결코 진실을 말하지 않아, 자기 스스로 두려워하기 때문이야. 사랑은 사람들이 그것이 그런 모든 것들이라고 믿지 않도록 거짓말을 하지. 그것은 거의 전적으로 상상된 몸으로 이루어져 있어.
커다란 손들, 커다란 눈들, 커다란 혀, 엄청나게 큰 성기, 다른 부분들은 위축되고, 오그라들어서 거의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말지. 그 연인은 다리도 턱도 없어. 그 코는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리고, 귀들도 마찬가지야. 숨결, 신음이 그것들을 변화시키고, 그런 다음에 그것들은 무(無 )로 되어버려.
이 사랑의 현실 속에는 나의 아버지가 지휘하셨던 군대들보다 더 잔인한 군대들이, 나의 최악의 악몽들 속 그 다섯 마리 암캐들보다 더 비정한 무리들이 있어.
꿈꾸는 자여, 지금 그대는 내가 그대에게 불러일으킨 악몽들에 대해 불평하지만 이 또 다른 악몽을 면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신들에게 감사하시오!
<‘모든 삶은 거짓말쟁이’에서 극히ㅡ 일부 요약 발췌, 알베르토 망구엘지음, 조명애님옮김, 세종서적> * 1970년대 중반 겨울날 새벽, 마드리드의 한 아파트 발코니에서 인도로 투신한 한 남자의 주검이 발견된다. 아르헨티나 촉망받는 신예작가 알레한드로 베빌라쿠아로, 그의 처녀작 출판기념회가 있은 지 이틀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그 미스터리한 사망 사건 발생 30년 후, 프랑스 한 가지는 생전의 바빌라쿠아를 알았던 네 명의 인물로부터 인터뷰, 편지, 꿈 등의 다양한 통로를 통해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저자는 우리가 저마다의 주관에 따라 인식하고 말하는 진실은 결코 절대적 진실일 수 없으며,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거짓말’이고, 또 그런 거짓말을 하는 우리 모두는 ‘거짓말쟁이’일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비록 의도적 거짓말이나 의도적 거짓말쟁이는 아니라 할지라도 말이다.
따라서 이때의 ‘거짓말’은,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꾸며대어 하는 말’이라는 의미보다는, 각자가 저마다의 관점에서 파악한 ‘부분적 진실’이라는 뜻으로 새겨야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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