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구나
지혜로운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서 자기 모습을 본다.
어리석은 사람만이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다른 ‘낮선’ 존재로 여긴다.
인류의 스승들은
지혜와 성스러운 능력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나 이렇게 될 수 있다.
우리에게는 영혼의 힘이 있으므로.
- 레프 톨스토이

도취의 아침
오 나의 선(善)! 오 나의 미(美)! 나를 전혀 비틀거리게 하지 않는 잔혹한 팡파르! 환상의 받침대! 전대미문의 작품과 경이로운 육체를 위해 환호하라, 처음으로! 이것은 아이들의 웃음으로 시작되었고, 그 웃음으로 끝날 것이다.
이 독(毒)은, 팡파르가 변하여 우리가 예전의 부조화로 되돌아가더라도, 우리의 혈관 속 곳곳에 남아 있을 것이다. 오 지금, 우리에게 합당한 이 고통들! 창조된 우리의 육체와 우리의 영혼에 가해진 이 초 인간적 약속을 열렬하게 모아들이자.
이 약속, 이 착란을! 우아함, 박식함, 난폭함! 우리의 아주 순수한 사랑을 인도하도록, 선악의 나무를 어둠 속에 묻고, 압제적인 정숙함을 추방하겠다는 약속을 우리는 받았다.
이것은 약간의 거부감으로 시작되었고, 그리고 끝난다, - 이 영원을 즉석에서 움켜쥘 수는 없기에 - 이것은 패주하는 향기들로 끝난다.
아이들의 웃음, 노예들의 신중함, 처녀들의 엄숙함, 이곳 형상들과 사물들의 혐오감, 모두 이 철야의 기억으로 신성해질 것이다. 이것은 온갖 상스러움으로 시작되었고, 이제 불과 얼음의 천사들로 끝난다.
도취의 짧은 철야, 성스러운 밤! 네가 우리에게 베풀어 준 마스크 덕분이었을 뿐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너를 확신한다. 방법이여! 이제 네가 우리 각각의 세대를 축복해 주었음을 우리는 잊지 않는다.
우리는 독을 믿는다. 우리는 매일 우리의 삶을 온통 내맡길 줄 안다. 이제 암살자들의 시간이다.
☞「아름다운 존재」가 전형적으로 묘사하는 격한 절정의 순간을 이 시는 긴 호흡으로 옮기고 있다. 지속의 열쇠는 해시시(haschich: 대마초에서 얻은 수지를 압축 정제한 형태의 약물, 환각제)다. 마지막 단어 암살자는 유사 음운과 어원적 연상을 통해 그것을 암시한다.
십자군 당시 이슬람의 광신 분파인 이스마일의 비말 결사는 해시시를 피우고 환각 상태에서 암살에 투입되었다는 사실에서 그 명칭이 비롯되었다고 한다.
“독”,“고통”,“착란”등의 표현과 전반적 환희의 어조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랭보는 이 ‘방법’을 통해서 일찍이 보들레드가 “시간에게 학대 받은 노예”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술이든 시든, 덕 혹은 악의 힘이든, 어떻게든 ‘도취’에 빠지라고 한 권고를 실천하는 셈이다. (‘도취하라’ - 『파리의 우울』)
고통과 환희가 교차하는 모든 감탄과 수식은 시간의 압제에서 벗어난 상태, 선악과 죄의식을 초월한 순수의 상태를 가리킨다. 후렴처럼 반복되는 아이들의 소리는 「이성에게」에서 보듯 새로운 삶, “새로운 조화”와 “새로운 사랑”을 환기한다. 그 삶과 사랑은 기독교적 원죄의 해방이라는 “초인간적 약속”을 전제로 한다.
도취 속 존재의 쇄신은 그러나 무한정 지속되지 않는다. 랭보의 먼 후계자 중 하나인 미쇼(Michaux)의 말처럼, “환각제는 고유의 낙원으로 우리를 괴롭힌다. […]우리는 한 백 년 낙원에 있을 수는 없다.” 강조된 마지막 말은 마지막 비명처럼 다시 침묵 속에 잠긴다.
<‘랭보 일류미네이션’에서 극히 일부 발췌, 아르튀르 랭보 지음, 김종호님 번역‧해설,엘도브출판> * 아르튀르 랭보(1854~1891) : 전복적이고 극단적인 가치관을 불같은 문체로 노래한 <지옥에서 보낸 한 철>, 그리고 헤아리기 어려운 초월적 세계를 보여주는 <일류미네이션>등 작품이 있다. 랭보가 여섯 살 되던 해 완전히 가족을 떠났다. 어머니는 극도로 독실하고 엄격했다. 불우한 가정, 정치적 혼란, 그리고 전쟁은 어린 시인의 마음에 종교와 사회 제도에 대한 반항심을 심었고, 좌절과 분노는 잦은 가출과 방랑으로 표출되었다. 반항심은 ‘절대적 자유’를 향한 폭발적인 글쓰기로도 나타났다. 안타깝게도 37나이로 타계했다. 프랑스의 천재시인 랭보, 문학과 유럽을 떠나며 그가 남긴 마지막 작품 『일류미네이션』은 우리에게 던져진 수수께끼다.

종교와 소설
최근에 나는 얼굴 한 번 본적이 없었던 사람의 추도식에 다녀왔다. 그는 내 친구의 남동생으로 어느 날 갑자기, 한창나이에, 아내와 어린 두 딸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다.
사람은 왜 죽을까? 이렇게 죽어버린다면 굳이 왜 살아야 할까? 인생의 의미라는 게 있냐? 우리는 왜 여기에 있나? 블랑쇼는 한 에세이에서 망연자실한 심정을 이렇게 전달한다. “각각의 사람들은 죽는다. 하지만 모두가 살아 있다. 이는 곧 모두가 죽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왜?라는 질문. 이는 죽음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던지는 질문이며, 따라서 신정론(神正論)적인 질문이다. 이는 신학과 형이상학간의 긴 역사 안에서 되풀이 되었던 질문으로, 신정론이 이미 답을 주었다고, 아니, 대답을 하긴 했다고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신정론이란 인생의 고통과 무의미를 전지전능하고 선한 신이라는 개념과 화해시키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공식 용어로 가끔은 기발하거나 교묘하고, 대체로 암울하나 필요하긴 하며, 엄숙하면서도 상투적인 프로젝트다.
신학적 정당성이라는 뭉개진 나사를 돌려보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자유의지론에서 *영지주의 (Gnosticism) 이단까지, 욥에 대한 하느님의 엄숙한 **꾸짖음(조용히 입을 다물고 형언할 수 없는 나의 전능함을 깨닫도록 하여라)에서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료샤가 형에게 건넨 입맞춤과 조시마 장로의 성스러움으로 구현해낸 도스토옙스키의 깨달음까지. 하지만 이는 문학적, 신학적 전통에 속하는 해설일 뿐이다.
이 세상의 수많은 부모들이 상처 주고 싶지 않은 마음에, 절망 속에서도 낙관을 끌어내기 위해, 평정심을 가장하여 자녀들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어쩌면 그 사람은 하늘나라에 있을지 몰라. 하느님의 뜻은 우리와 다르단다. 솔직히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엄마 아빠도 모르겠구나.
신정론의 질문이 한 인간의 생애 동안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신정론에 대한 대답 또한 3000년 동안 본질적으로는 바뀌지 않았다.
욥의 애끓는 질문에 대한 하느님의 대답은 막내딸 애니의 간절한 물음에 “그만 조용히 하고 방에 가서 책이나 읽어”라고 말한 부모님의 답만큼이나 별 도움이 안 된다.
우리는 모두 여전히 이 질문 안에서 살고 있으며, 어설픈 답을 더듬거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 왜라는 질문은 예민하면서도 종교적인 색채를 띠는 것이었다.
나는 지적이면서도 종교적인 가정환경에서 자랐는데 어린 시절부터 지적 호기심과 종교적 호기심이 항상 사이좋은 짝은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영국 더럼대학교의 동물학 교수였고 어머니는 여학교 교사였다. 두 분 모두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고, 특히 어머니는 장로교와 복음주의 신앙에 뿌리를 둔 스코틀랜드 집안 출신이었다. 성경 말씀은 우리 집안에서 숨 쉬는 공기처럼 떠다녔다.
아버지는 내가 처음으로 여자 친구와 교제하자 “덕과 거리가 멀다”라고 평했다. 한번은 어머니에게 하느님이 어디에서 왔냐고 묻자 어머니는 결혼반지를 보여주면서, 이 반지처럼 하느님은 시작도 끝도 없는 분이라고 말해주었다(사실은 그 반지도 누군가가 만든 게 아니냐고 묻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아직 마흔넷밖에 안 된 친구 동생을 죽음으로 몰고 간 바이러스 공격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왜 세상에는 이렇게나 많은 고통이 있고 이렇게나 많은 죽음이 있을까?
나는 부모님으로부터 하느님의 뜻은 너무 심오하여 헤아릴 수 없다는 말을 들었고 이해할 수 없는 섭리 앞에서 욥과 같은 순종적인 태도를 길러야 한다는 말도 들었다.
하지만 욥은 성자나 인내의 달인이 되기 전에는 불평과 탄식을 계속 늘어놓던 불평쟁이였다. 나는 내 유년기의 질문이 형이상학적 불평이라는 상태에 영원히 갇혀버린 건 아닐까 두렵다.
내가 어린 시절부터 유독 죽음을 예민하게 받아들인 이유가 있다. 우리 교회 신도 두 명이 이른 나이에 암으로 돌아가셨고 그중 한 명은 싱글맘이었으며 그녀의 아이들이 나와 자주 놀던 친구들이었기 때문이다.
문학, 특히 소설은 이러한 은폐와 거짓의 습관에서 잠시 벗어나 숨 쉴 틈을 허락해주었는데, 부분적으로 소설은 내가 하고 있는 일의 은유적 버전이라 할 수 있었고 책이라는 세계는 의미 있는 진실을 보호하기 위해 거짓말(혹은 픽션)을 사용하는 곳이었다.
청소년기에 장단편소설이 완벽히 자유로운 공간이라는 숭고한 발견을 했을 때 온몸으로 느꼈던 전율이 아직도 기억난다. 소설이라는 무한한 자유 공간 안에서는 어떤 생각도 할 수 있고, 어떤 말도 내뱉을 수 있었다.
소설 속에는 무신론자, 속물, 자유주의자, 간통자, 살인자, 강도, 광인, 방황하는 사람이 있었다. 서점에서 집으로 올 때는 포르노처럼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 페이퍼백을 몇 권씩 들고 아무것도 모르는 부모님을 지나쳐 내 방으로 들어오곤 했다. 부모님은 정말 몰랐을까?
세르반테스가 얼마나 신성 모독적이었고 얼마나 극렬한 반교권주의자였는지, 기독교 사상에 충실한 도스토옙스키가 어떻게 나의 무신론에 불을 활활 지폈는지.
<채털리 부인의 연인>은 여전히 ‘음란한’ 책으로 정평이 나 있었지만 어찌된 사정인지 로렌츠의 초기 대표작인 <무지개>는 엄격한 검열을 피해갈 수 있었다.
소설이란 ‘왜‘라는 거대한 질문이 자유로운 공기 속에서 둥둥 떠다니는 정원이고, 이 안에서 무엇이든 생각하고 말할 수 있다는 생각은 역설적으로 소설 밖 정식 기독교의 실체적인 공포와 대칭되는 것 같았다.
도스토옙스키는 신이 없으면 “모든 것이 허용 된다”고 말했다. 하느님만 빼내면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다. 혼돈과 혼란이 지배한다.
사람들은 온갖 종류의 범죄를 저지르고 온갖 종류의 생각을 할 것이다. 따라서 어떤 일이 일어나지 못하게 막으려면 신이 필요하다. 이것이 보수적인 기독교의 일반적인 노선이다.
그와 대조적으로 소설은 상식적으로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신이 우리 옆에 있을 때에도 모든 것은 언제나 허용되어왔다. 솔직히 신은 아무 관련이 없다.(도스토예스키,<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11편을 보라)”
물론 소설은 허구의 세계이기에 소설의 자유 발언 허가증은 세상의 허가증보다 획득하기가 더 쉬워 보인다. 소설은 수집할 수 없는 데이터에 대한 멈추지 않는 실험이다. 내가 소설을 사랑해왔고 지금도 사랑하는 이유는 종교적인 텍스트와 근접하면서도 최종적으로 다르다는 점이었다.
소설에서의 진실은 언제나 믿음의 문제이고 그것을 검증하고 확인하는 것은 독자에게 달렸다. 우리는 믿으라는 요청을 받지만 언제라도 그 요청을 자유롭게 거부할 수 있다. 소설에서의 믿음은 언제나 ‘마치 … 인 것처럼’의 믿음이다.
우리의 믿음은 은유적 믿음이며 실제 믿음과 유사할 뿐이다. 토마스 만은 <리하르트 바그너의 고난과 위대함>이라는 에세이에서 허구란 언제나 ‘꼭 그렇지 않은’의 문제라고 말했다.
예술가는 자신의 창작품을 진실처럼 믿고 진지하게 여기지만 그가 풍부하고 온전한 표현을 하기 위해 필요한 만큼만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모든 면에서 그는 진실이며 때로는 진심으로 눈물을 흘리기도 할 테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꼭 그렇지 않은 것에 불과하며 결과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소설이란 꼭 그렇지는 않음의 게임이 벌어지는 세계이며 완전히 - 믿지는 - 않음의 장소이다. 종교에서는 위험이 되는 바로 그것이 소설에서는 근본 구조가 된다.
* 영지주의 : 초기 기독교 시대에 출현해 이단으로 취급받은 종교 사상. 바빌론의 점성술, 이란의 이원론, 헬레니즘의 종교 혼합주의, 신비주의 등을 받아 들였다.
** <욥기> 삼8장 1절~42장 6절. 하느님과 욥의 대화.
<제임스 우드 ‘인생에서 가장 가까운 것’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제임스 우드 지음, 노지양님 옮김, 신형철님 해제,
- 제임스 우드 : 영국의 문학 비평가이자 에세이스트, 소설가. 1965년 영국 더럼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1990년 영국 언론상 ‘올해의 젊은 기자상’을 수상. 1994년 부커상 소설 부문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2009년 내셔널 매거진 어워드(서평 및 비평부문)를 수상했다. 2003년부터 하버드대학교 문학비평 실습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평론집<파괴된 영지: 문학과 신앙에 관한 에세이>,<무책임한 자아: 웃음과 소설에 관하여>, <짜릿한 것들 그리고 그밖의 에세이>, 대표 에세이 선집<진지한 관찰:1997~2019>, 소설 <업스테이트>, <신에 맞서는 책> 등이 있다.

'독서 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노년의 보살핌! (10) | 2026.03.25 |
|---|---|
| 너의 기쁨을 미리 준비하지는 마라! (6) | 2026.03.17 |
| 진로의 불확실성! (4) | 2026.03.11 |
| 사랑이 없는 애착! (18) | 2026.03.07 |
| 사랑하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살아 있다! (20) | 2026.03.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