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자료

너의 기쁨을 미리 준비하지는 마라!

[중산] 2026. 3. 17. 22:01

진도의 조도군도

 

고향과 타향

 

나는 지금 미국에서 십팔 년째 살고 있다. 이렇게 오래 살게 될 줄 몰랐다고 말하는 것은 나약한 변명일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오래 머물고 싶지는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배은망덕하거나 심지어 무의미하고 정직하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분명 그러기를 원했을 것이며 얻은 것도 많다. 하지만 무엇을 잃게 될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개념이 없었다. 젊은 시절에 ‘나라를 잃는 것’ 혹은 ‘고향을 잃는 것’에 좀 더 많이 생각해보았더라면 어땠을까? 

 

애드워드 사이드가 그의 에세이 <망명에 대한 성찰>에서 적절한 용어로 정의 내린 것이다. “문학과 역사가 망명자의 삶에서 영웅적이고 낭만적이며 영광스럽고 심지어 의기양양한 승리의 일화들을 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모든 것들은 주체할 수 없는 소외의 슬픔을 극복하려는 노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망명의 성취는 그 뒤에 영원히 남겨진 것들을 상실함으로써 끝없이 빛을 잃어간다.”

 

사이드가 강조하는 자아의 ‘진정한 고향’은 다소 신학적이며, 플라톤 철학처럼 들리기도 한다. 강제적이든 비강제적이든 이러한 보편적 실향이 존재할 때, ‘진정한 고향’이라는 개념은 분명 어느 정도 가차 없는 수정을 거치게 된다.

 

아마도 사이드가 말하고자 한 것은, 원치 않는 실향은 오직 진정한 고향을 가진 이들에게만 아픔을 안겨주기에 그 태생지의 순수성을 강화하지만, 자발적 실향(순수한 이주)은 고향이 ‘진정한’ 고향이 아니라는 뜻일지도 모른다.

 

이 에세이에서 사이드는 망명자, 난민, 이주자, 이민자를 구분한다. 망명은 고대의 추방 형벌과 연관된 비극적 실향이다. ‘고향으로 가지 않는 것’이 ‘집 없음’과 정확히 같을 수는 없다. 이때는 자주 사용하게 되는 익숙한 단어인 ‘향수병’이 더 적합하지 않을 까 싶다.

 

논리적으로 본다면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건 바로 그 고향이라는 관념을 부정적인 방식으로 승인하는 일이다. 이는 사이드의 망명 개념이 원래의 ‘진정한 고향’이라는 관념을 승인하게 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것은 어쩌면 고향의 상실 혹은 고향의 결여로 인한 결과일 수도 있다. 운 좋은 이주자들은 실제로 나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고향에는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아요. 어떻게 가는지를 이젠 모르겠어요.”

 

그리고 ‘고향과 ’터전‘도 고려해야 한다. 나 또한 미국에서 터전을 마련했지만 내 고향이라고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나는 미국 시민이 되고 싶다는 강한 열망이 없다.

 

최근에 보스턴 공항에 도착했을 때 이민국 직원이 나의 영주권 보유 기간을 보더니 한마디 했다. “보통은 영주권 다음에는 시민권을 받습니다. 일반적인 순서죠.”

 

그의 어조에는 짜증 섞인 훈계와 감동적인 애국심이 동시에 스며있었다. 나는 그의 말이 전적으로 맞다며 뭔가 중얼거리고는 별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우리 대부분은 적어도 한 번은 집을 떠난다. 떠나야만 하는 필연적 이유가 있고, 돌아오려 할 때의 어려움이 있다. 시간이 흘러 인생의 후반에 이른 부모님이 쇠약해지기 시작했을 때에는 다시 돌아 와야 할 이유가 생기기도 한다.

 

세속적 실향은 에덴에서 항상 일어나야 할 일일 뿐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며 일어나고 또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카다레의 위대한 소설 <돌의 연대기>는 그가 두고 온 도시에 바치는 유쾌하고 코믹한 헌시이다.

 

책의 마지막에서 그는 고향을 향해 말을 건넨다. “나는 종종 외국 도시들의 넓고 환한 대로를 걷다가 어쩐 일인지 아무도 걸려 넘어지지 않는 곳에서 휘청거릴 때가 있다. 행인들이 놀라서 돌아보지만 나는 그것이 항상 너라는 사실을 안다. 나는 불현 듯 아스팔트에서 솟아올랐다가 곧바로 다시 가라앉는다.”

 

이 문장은 공작의 저택을 걷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했을 때 불현 듯 자신의 기억을 떠올린 프루스트적 순간을 카다레가 소박한 버전으로 표현한 것이다.

 

십팔 년 전에 영국을 떠났을 때, 나는 그 떠남이 얼마나 이상한 방식으로 귀환을 지워버릴지 알지 못했다. 어찌 알았겠는가? 이는 시간이 줄 수 있는 교훈이고 어느 날 문득 깨닫게 되는 일이다.

 

태어난 나라에서 그렇게 오래 떨어져 살아온 것이 특수하고 심지어 약간 씁쓸하기도 한 이유는 내가 오래전에 큰 결정을 했다는 사실이 서서히 드러나게 되지만 정작 그 당시에는 그렇게 느끼지 못했고, 이를 깨닫는 데 수년이 걸렸다는 점이다.

 

프로이트는 ‘사후성’이라는 훌륭한 용어를 만들어냈는데, 나는 프로이트와는 아주 다른 맥락에서, 심지어 훔쳤다는 말을 들을지언정, 이 단어를 빌려오고자 한다.

 

고향과 고향으로부터의 떠남을 생각하는 것,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과 다시는 고향으로 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 모든 것은 ‘사후성’이라는 놀라운 감각으로 채워져 있다.

 

즉 이제는 무언가를 하기에는 너무 늦었고, 무엇을 해야만 했는지 알기에도 너무 늦었다. 그리고 그 또한 괜찮을지도 모른다.

 

<제임스 우드 ‘인생에서 가장 가까운 것’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제임스 우드 지음, 노지양님 옮김, 신형철님 해제,

- 제임스 우드 : 영국의 문학 비평가이자 에세이스트, 소설가. 1965년 영국 더럼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1990년 영국 언론상 ‘올해의 젊은 가자상’을 수상. 1994년 부커상 소설 부문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2009년 내셔널 매거진 어워드(서평 및 비평부문)를 수상했다. 2003년부터 하버드대학교 문학비평 실습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평론집<파괴된 영지: 문학과 신앙에 관한 에세이>,<무책임한 자아: 웃음과 소설에 관하여>, <짜릿한 것들, 그리고 그밖의 에세이>, 대표 에세이 선집<진지한 관찰:1997~2019>, 소설 <업스테이트>, <신에 맞서는 책> 등이 있다.

 

 

지금 있는 곳이 고향

 

어둠이 없다면 빛을 모를 것이다.

마찬가지로 악이 없다면

미덕이나 정의도 몰랐을 것이다.

 

세상에는 악이 넘친다.

사람들이 선한 행동을 하지 않아서라기보다는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매달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육체에 고통과 불편을 가져오는 것을

악이라 부른다.

 

하지만 인생은 영혼을 육체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삶을 영적 경험으로 이해하는 자에게는

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현명한 사람에게는 현재 있는 곳이 곧 고향이다.

어디서든 자기 내면,

영혼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레프 톨스토이

 

욕지도의 삼여도

 

 

 

자기에게 없는 것을 바라는

터무니없는 병들이 있다!

 

「우리 역시, 우리 영혼의 한심스러운 권태를 경험하고야 말 것이다!」다윗, 너는 아둘람*의 동굴에서 저수지의 물을 그리워했다. 너는 말했지.

 

「오! 베들레헴의 성벽 아래 샘솟는 시원한 물을 나에게 가져다줄 자 누구인가. 어릴 적에는 늘 그곳에서 목을 축였는데, 지금 나의 뜨거운 열기가 갈망하는 그 물은 적의 손아귀에 넘어가버리고 말았구나.」

 

나타나엘, 과거의 물을 다시 맛보고 싶어 해서는 안 된다. 나타나엘 머리 속에서 과거를 되찾으려고 애써서는 안 된다. 무엇과도 닮지 않은 새로움을 매 순간에 포착하되, 너의 기쁨을 미리 준비하지는 마라.

 

준비된 기쁨의 장소에서 어떤 다른 기쁨이 너를 느닷없이 찾아오리라는 것을 마음에 새겨두어라. 모든 행복은 우연한 만남과도 같아, 길에서 마주치는 거지처럼 순간순간 네 앞에 나타난다는 것을 너는 어찌 깨닫지 못했는가.

 

네가 오직 너의 원칙과 소망에 일치하는 것만을 너의 행복으로 인정한다면, 너에게 불행이 있을 것이다. 내일의 꿈이 하나의 기쁨이라면, 내일의 기쁨은 그와 다른 또 하나의 기쁨이다. 다행히 어떤 꿈도 자신이 이미 꾸었던 꿈과 똑 같지 않다. 사물마다 다르게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이리 와봐, 내가 너를 위해 이런 기쁨을 준비했어.> 너희가 나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제 나는 오직 우연히 마주치는 기쁨만을 원한다. 오직 내 목소리로 인해 바위에서 솟아나는 기쁨만을 원한다.

 

그 기쁨은 마치 압착기에서 신선한 포도즙이 쏟아져 나오듯이, 그렇게 우리를 위해 새롭고 힘차게 흐를 것이다!

 

* 아둘람 : 성서에 나오는 가나안의 한 지명,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다윗은 사울왕에게서 달아나 유다 사막에 위치한 아둘람 동굴에 피신했다가, 사울이 죽은 후 유대와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구약성서 사무엘상 22장1절 참조)

 

<‘지상의 양식 ‧ 새양식’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앙드레 지드 지음, 최애영 옮김, 열린책들출판> * 앙드레 지드 : 프랑스 문인, 1869년 파리 법과 대학 교수인 아버지 폴 지드와 루앙의 부유한 개신교 집안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 외아들로 태어났다. <좁은문>,<배덕자>, <전원 교향곡>,<위폐 제조자들>등 의 작품이 있으며, 1947년 11월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1951년 파리의 자택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젊은이들에게 건네는 ‘탈주와 해방의 참고서’인 <지상의 양식>은 지상에서의 쾌락과 행복을 추구하겠다는 결단과, 그 실천을 통해 체험한 환희를 기록한 비망록이다.

 

 

울릉도 삼선암
울릉도 봉래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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