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2/중산 담론

산골에서의 웰에이징은?

[중산] 2026. 6. 17. 07:18

산골 농원의 벼농사!

 

 

7.0 웰에이징에 대한 현자와 석학들의 충고

 

전문가들의 크게 네 가지로 강조한다. 첫째로, 노년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라는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져 있는 것을 긍정하면서 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은 노년의 때를 건강하게 사는 출발점이라고 한다.

 

둘째로, 정신적 탄성(彈性)을 키우라. 탄성은 원래대로 되돌아가는 복원력을 말한다. 탄성이 큰 사람도 연약한 사람과 같이 슬픔과 분노를 느끼며 때로는 심각한 고통으로 신음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힘으로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사회적 활동을 늘려라. 노인들이 괴팍해지는 것은 몸의 불편과 병 때문이 아니라 삶의 목적과 존재 가치를 상실한 탓이다. 상대방은 가끔 분노와 갈등,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만 사랑의 대상도 된다. 이웃에 대한 공감능력은 고독감을 막아주는 강력한 도구이다. 루이즈 애런슨의 책<나이 듦에 관하여>에서 ‘외로움은 사망의 위험을 26%나 높인다’고 하였다.

 

넷째, 자신의 정체성을 의식하고 수시로 업데이트하라. 인간의 정체성은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니다. 바람직한 노년의 삶은 이러한 영향에 적절히 대응하면서 자신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변화시키는 삶이다.

 

따라서 노년은 나이 들어가는 현재를 외면하고 화려했던 과거를 추억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을 때 그는 우울감에서 빠져 나올 수 없으며 생동적인 현재를 보낸 수 없다. 그러므로 현재의 주인으로서 정체성의 변화를 주도하는 삶이 중요하며, 남아 있는 양적 시간보다 시간의 질적 사용이 관건이다.

 

다섯째, 외로움에 익숙해지고 항상 죽음을 의식하라. 사회적 고립과 외로움은 심신의 건강을 해친다. 일찍 요양원에 보내져 외로움을 겪는 노인은 그렇지 않은 노인에 비해 수명이 짧다. 그럼에도 노년은 외로움을 피하지 말고 외로움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자신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하는 자아로 들어갈 수 있다.

 

외로움을 겪는 일은 그 자체가 쓰라린 고통일 수 있으나 이를 통해 우리는 고독을 극복하고 더 이상 외롭지 않게 된다. 헤르만 헤세의 말처럼, 우리는 내면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분열될 수 없는 영혼을 발견할 수 있다. 분열 될 수 없는 영혼은 존재의 근원일 수 있으며, 그 자체가 신으로 불릴 수도 있다.

 

그러므로 내면에서 분열되지 않은 자아를 발견한 노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삶의 안락함, 사는 의미나 즐거움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인생의 종점에 이른다고 하더라도, 죽음을 의식하는 사람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죽음을 의식하는 것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를 현재에서 각인하는 일이다. 과거-현재-미래의 시간을 과거-미래(죽음)-현재로 만들 때 사람들은 누구나 각성한다. 각성한 사람은 흘러가는 시간에 삶을 맡기지 않는다. 그는 현재를 자신의 현재로 채우려 하며 그 속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려고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철학함은 죽는 연습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죽음은 모든 의미의 종결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의 근원이다. 죽음을 이렇게 인식하는 노인에게 아쉬움과 두려움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에게 죽음은 삶의 아름다운 완성이기 때문이다.

 

키케로 <의무론>에서는 노년이 해야 할 일은 육체의 일은 줄이고, 친구들과 청년들, 특히 국가를 지혜와 현명함으로 도울 수 있도록 ‘영혼의 단련‘을 강조했다.

 

이와 함께 키케로는 <노인론>에서 ‘노인은 사회적 위엄을 잃고, 가족의 돌봄을 받지 못하고, 스스로 자신을 지키지 못하는 신세가 된다’고도 했다.

 

어떻게 육체적 정신적 쇠약과 사회적 활동의 위축이 악이 아닌, 감사해야 할 더 없이 즐거운 일일 수 있을까? 아마도 그는 노년에 드디어 ‘원숙함’에 이르렀기 때문 이이라고 답한다.  키케로의 주장이 역설적이다.

 

육체적 힘도 약해지고 사회적 활동에서 밀려나지만, 이를 필연적인 일, 자연스런 일로 받아들인다면 - 물론 그것을 받아들이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고 많은 사람은 이를 불평한다. - 노년은 오히려 욕정, 출세, 경쟁, 대결 등 온갖 욕망의 복무를 마침내 마친 것이다.

 

그러니까 노년이라는 자연스러운 변화 덕분에 우리는 사리분별의 훼방자이며 이성의 원수이며, 정신의 눈을 가린 소위 눈가리개였던 쾌락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유를 얻고 해방된 노년의 영혼은 ‘스스로에 머물고 자기 자신과 함께 살아간다’고 했다. 이는 소크라테스는 죽음이 고통이고 불행이 아니라 오히려 육체로부터의 해방이고 자유라는 역설과 궤를 같이 한다.

 

그리고 플라톤은 <파이돈>에서 ‘육체에 물든’ 영혼이 모든 방면에서 육체를  떠나 자기 자신을 수습하고 될 수 있는 대로 자기만으로 살아가도록 길들이는 것을 정화라고 설명했다.

 

그리하여 정화된 영혼은 그 자체로 있게 되고, 홀로 그 자신과 살아간다고 했다. 여기서 키케로가 노년의 영혼이 ‘스스로에 머물고 자기 자신으로 함께 살아간다’고 한 것은 플라톤<파이돈>의 정화를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플라톤에게 죽음이 정화였다면, 키케로에게 노년은 일종의 정화였고, 그런 의미에서 육체와 더불어 사는 노년의 영혼은 원숙이라는 최고의 단계에 이른다는 말이다.

 

될 수 있는 대로 영혼을 육체의 결합에서 해방하려고 하며, 육체를 떠나 될 수 있는 대로 그것과 상관하지 않으려 하였는바 키케로의 노년은 플라톤의 철학자를 닮았다. 이것이 피타고라스가 설명한 바, ‘삶에서 다른 모든 열정보다 자연의 관조와 인식을 크게 앞세우는’ 철학자의 삶이다.  - 김선희 서강대학교 철학박사 등 다수의 교수로 공저한 책<내 생의 가장 아름다운 완성,이츠북스출판> 일부에서 인용.

 

 

살구

 

 

8.0 산골에서의 웰에이징은?

 

농원 가는 길에는 작은 암자가 하나 있다. 암자 입구에 세로로 놓여 진 큰 표지 석에는 ‘닥치는 대로 살아라.’라고 붉고 둔탁한 글씨체로 쓰여 져 있다.

 

팔만 사천 개의 인간번뇌를 적은 법문이 팔만대장경인데, 이를 축약해서 옮겨 놓은 지혜의 법문이 270여 글자의 반야심경 글이라 한다.

 

하물며 그곳 암자 스님께서는 훌륭한 법문을 다 적을 수도 없고 ‘닥치는 대로 살아라’ 여덟 글자로 축약해서 적는다고 무척 고심을 했을 것이다.

 

가끔 언짢거나 우울할 때 차를 몰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는 ‘아! 그래, 맞는 말아야’하는 생각이 들며 위로가 되어 줄 때도 있을 것이다.

 

현대에 와서 우리가 웰빙(건강한 삶,참 살이), 웰에이징(잘 나이드는 것), 웰다잉(편안한 삶의 마무리)이라는 용어를 입에 많이 오르내리고 있다. 서로 다 연관성을 가지고 있지만 필자의 나이에는 웰에이징을 주제로 다루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웰에이징 또한 축약해서 적는 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각자의 생활환경과 마음의 자세에 따라 다르고 본인이 처한 여건 또한 다르기 때문이다.

 

필자가 처한 환경이 산골이다 보니, 거기에 맞는 견해를 피력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석학들의 의견을 간간이 인용하면서 경험적 설명을 덧붙이도록 하겠다.

 

그 옛날 어르신들이 기분이 아주 좋을 때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는 말을 불쑥 내뱉곤 했었다. 살아가면서 흔한 일이 아니지만, 나이들수록 큰 기쁨의 파도가 죽음의 방파제까지 쉽게 넘나드는 것 같다.

 

이와 대조적으로 삶의 안락함, 사는 의미나 즐거움이 전혀 남아 있지 않더라도 내면에서 분열되지 않은 자아를 발견한 노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현세와 죽음을 동시에 지닐 수 있는 조건인 임계범위(Critical band)에 도달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올해 91세인 정신과 의사인 이근후 전 교수는 나이 들어서는 소소한 일에서 행복을 느끼라고 했다. 그 분은 종합병원이라 할 정도로 여러 가지 지병을 앓고 계시지만 병고 또한 벗을 삼아 지낸다고 하였다. 이미 내면 깊숙이 흔들림 없는 자아 속에서 병과 고통 더 나아가 죽음마저도 초월한 삶을 살고 계시는 것 같다.

 

소소한 행복 요소로써 산골에서는 뭐가 있겠는가 생각해보면, 파종한 씨앗이 모두 싹을 틔었을 때, 예년보다 풍족한 수확을 얻었을 때, 아침에 새소리 들으면서 동트는 새 아침을 맞을 때, 긴 밤을 묵상하며 편안함을 느꼈을 때, 일몰 일출의 아름다움을 보았을 때, 존재의 가치가 감사함으로 가득 찰 때 등 수없이 많을 것이다.

 

이런 기쁨의 순간들이 많이 응축된 사람들에게는 영원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느낌을 가질 것이다. 죽음 또한 두려움 보다 오히려 무덤덤하게 받아들일 것 같다.

 

산골에 긴 밤을 홀로 보내다 보면 고요하면서도 편안함이 찾아오는 순간들이 있다. 이 순간을 역부러 시간내어 만들기도 한다.  이른바 명상과 사색이다.  이 순간의 끈을 놓치지 않고 한 동안 머물러 본다. 이것이 마치 영원으로 이르는 길인가 하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석학들이 말한 다섯 가지 중 제일 어려운 관문이 ‘외로움을 피하지 말고 죽음을 의식하라’는 것이다. 그래야만 자신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하는 자아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맛있는 음식을 가까이 두고 쾌락을 쫓는 오락이나 술 등을 마셔가면서, 매일 그렇게 보내는 사람에게는 그런 영적인 체험을 할 수가 없다. 필자에게는 어차피 주어진 여건이지만, 오직 산골 속에서 나 홀로 생활해 갈 때만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일에 빠져 허우적대서도 안 되고, 적당한 여유와 사색이 곁들어져야 가능한 일이다.

 

필자는 퇴직 10여년 전 산골에 터전인 전답을 사두고 부터는 독서를 하기 시작했다. 이는 나 자신을 먼저 알고 다스려야, 광활한 자연속에 살 수 있다는 마음 가짐을 갖추기 위함이었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본성을 다룬 실존주의 철학을 비롯해서 심리학, 신을 존재 여부와 죽음을 다룬 종교서적, 문학, 시, 소설과 사회과학 등 장르를 불문하고 약 삼천여권을 정독하면서 줄거리를 요약해 필자의 블로그에 후기를 올려 복습하곤 했다.

 

여기서 마음을 추스르면서 정신세계를 유영하였고 미래의 죽음에 대한 선행 학습까지 한 셈이다. 대다수 인간은 일반적으로 다가오는 죽음을 생각하기 싫어하고 두려워한다. 그렇지만 필자는 그 당시에는 신과 죽음에 대해 무척 궁금했었다. 

 

일반적으로 시간의 순서가 과거-현재-미래 인 것을 과거-미래(죽음)-현재의 방식으로 변화된 삶으로 살아갈 때 사람들은 누구나 삶을 진지하게 각성하며 살아가게 된다.

 

죽음을 미리 의식해 보는 사람에게는 현재의 삶은 진지하게 임할 수밖에 없다. 시간의 유한성을 알기 때문에 삶을 허투루 살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나마 그 덕분에 현재의 삶 또한 충실히 임하게 될 것이다.

 

솔직히 죽음은 두렵다. 그래서 태고적부터 지진, 화재, 홍수 등 천재지변에 맞서 국가와 개인은 신이 머무는 신전과 신당을 지어 절대자에게 구원을 요청하고, 영원회귀와 영혼이라는 내세관을 내세워 마음을 결집시켰고 두려움으로부터 해방하였다.

 

요약해보면, 웰에이징을 하기 위해서는 석학들은 크게 다섯 가지로 강조한다. ‘노년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라, 슬픔과 분노에 대한 정신적 복원력을 키우라, 사회적 활동을 늘려 삶의 목적과 존재 가치를 가지라, 자신의 정체성을 의식하고 수시로 수정해나가라, 외로움을 피하지 말고 죽음을 의식하라’는 것이다.

 

그래야만 자신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하는 자아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내면에서 분열되지 않은 자아를 발견한 노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삶의 안락함, 사는 의미나 즐거움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인생의 종점에 이른다고 하더라도, 죽음을 의식하는 사람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해가 될 듯 말듯 참으로 어려운 말들이다.

 

좀 더 현실적인 문제로 들어가서 생각해보자. 만 65세 이상 어른 1000명을 5년간 추적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노후 생활의 만족도를 결정하는 건 자산 규모도 아니었고 자녀의 성공도 아니었다. 대신 특정조건을 갖춘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노후 만족도가 2.3배 높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80이 넘어도 혼자 식사를 준비하고, 매일 산책을 하고 친구들과 웃으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반대로 아직 70을 넘기지 않았는데도 모든 걸 포기한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차이점은 무엇일까? 앞에서 석학들이 말한 5가지를 지켜나가면서, 시인 볼테르가 말한 '시간에 지배 당한 노예'로 살지 않고 ‘주도적인 삶, 즉 생활자립’을 해 나가는 것이다.

 

여기서는 호호백발로 넘어가기 막 전 단계를 말하는 것이다. 병원 신세를 지거나 요양원에 머문 상태가 아니다. 요양원은 일상의 생활이 불가능한 사람이 가는 곳이다. 이래서 홀로 서기가 중요한 것이다. 타인에 의존하거나 도움을 받아 온 사람은 나이 들어서도 주도적인 삶을 살기가 어렵다.

 

이런 사람은 영혼마저 단련이 되어 있지 않아 과거형으로만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왕년의 화려한 시절에만 머물어 있다. 거기에다 청력약화로 소통마저도 원활하지 않으면, 어쩌다 동료나 지인을 만나도 교감을 나눌 여건도 안 되어 서로간에 행복의 교집합을 만들기도 힘들다. 산골이든 도회지든 노년에는 어차피 혼자가 될 수밖에 없다.

 

‘~사는 일 말고는 그 무엇도 기대하지 않을 만큼/ 산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인 만큼// 살아 있다는 것은 농담이 아니야/마음을 다해 삶에 다가서지 않으면 안 돼 /두 손이 뒤로 묶어/ 벽에 등이 밀쳐진 것처럼 절실하게, //마음을 다해 살지 않으면 안돼 /일흔이 되어도 올리브 심을 만큼, / 자손을 위해서가 아니라/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믿지는 않기에/ 살아 있음이 죽음보다 훨씬 소중하기에~’ 시인 나짐 히크메트 ’살아 있음에‘대한 엄중한 경고다.

 

괴테 또한  ‘영혼에도 매일 식사가 필요하다/ “사람은 적어도 노래 한 곡을 듣고, 좋은 시 한 편을 읽고/ 훌륭한 그림 한 점을 보고/그리고 가능하면 몇 마디 이치에 맞는 말을 해야 한다”고 말했으며, 또한 나이들은 우리를 ‘진정한 아이’ 모습으로 다시 발견하게 할 뿐이다!‘라고 그의 희곡 <파우스트>에서 말했다.

 

노년에는 그저 홀로 뭐든 해야 한다. 밥을 짓고, 세탁을 하고, 걸으며 외로움이 발 붙일 틈을 주지 않아야 한다. 이 평범한 일상을 지켜나가는 것이다. 가장 중요사항으로는 두 다리로 걸을 수 있는 근력에 있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에게 의존을 하게 된다. 

 

이런 일상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 일상이 무너지면 노후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거창하지도 않고 내 생활을 지키는 것이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을수록 행복한 노후를 즐기는 사람이다.

 

산골 전원생활은 혼자만의 생활이다. 하나에서 열까지 스스로 해 나가야 한다. 그래서 노후에는 불편할 듯 하지만 하루가 바삐 돌아가는 곳이다. 그렇게 기피할 장소는 아니라고 본다. 잘 다스리면 요양원에도 들리지 않고, 노후에 반드시 맞닥뜨려야 할 고독의 훈련 장소로써는 최적일 수도 있다.

 

TV프로그램 출연자 중에서 80세 중반의 건강한 자연인을 보았다. 필자도 10여년을 남겨두었지만, 이는 신의 영역이라 모를 일이다. 병원신세나 요양원을 거치지 않고 끝까지 명료함을 유지한 채 죽음을 맞이했으면 더 이상 바랄게 없다.

 

산골에서 어쩌다 무거운 것을 들게 되는 경우 수레를 최대한 이용하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절반으로 나눠서 들고, 자동 펌프가 달린 호스를 이용한다. 움직일 때는 무릎 보호대를 착용하고 산책시에는 스틱을 사용한다. 더 악화를 대비해 유아용 카트를 구비해 두었다. 힘들고 아프다고 걷는 걸 포기하면 결국 몸은 굳어 가고 거동까지 불편하게 될 것이다.

 

철학자들은 형이상학적인 정신세계를 주로 강조한다. 니체 또한 초인을 말하고 영원회귀를 말한다. 하지만 노년에는 정신세계 못지않게 스스로 끝까지 움직이는데 불편이 없어야 한다. 타인의 수발을 받게 되는 그날은 가족에게 짐이 되고, 요양원에 갇히는 날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고, 불편하지만, 역설적으로 표현한 말들이 진실에 가깝다. 원숙, 정화라는 자유지역이며 완충지대에 잠시나마 머무는 호사를 못 누리보고 죽음을 맞이하면 안타깝고 억울할 뿐이다. 머무는 그 시간이 물리적으로 짧을 수도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상당히 긴 시간일 수 있다.

 

그렇지만 ‘쉼 없이’ 훈련하고 단련한다면, 노년의 정신과 영혼의 불은 꺼뜨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철학자 키케로는 말했다. 키케로가 말한 그런 쉼 없이 훈련하고 단련하는 장소가 스님들에게는 수양의 도량으로써 산속의 사찰이 될 것이고, 필자에게는 이곳 산골을 최적의 장소로 여기며  살아 갈 것이다.

 

피타고라스는 인간의 생애를 넷으로 나누었다. 소년이 20년, 청년이 20년, 장년이 20년, 노년이 20년, 이 연령대는 사계절(봄, 여름, 가을, 겨울)과 대칭을 이룬다. 한편, 어릴 때는 네발로, 커서는 두발로, 나이들어서는 세발로 걷는다고 했다. 지팡이에 의지한다는 뜻이다. 

 

누구나 노년은 피해갈 수 없다. 죽음 또한 그러하다. 두 다리 중 하나라도 성하다면, 무릎보호대, 의족, 지팡이나 카트에 의지해서라도 걸을 수 있는데 까지, 이를 악물고, 시인이 말한 것 처럼 '벽에 등이 밀쳐진 것처럼 절실하게', 걷는 힘을 길러야 한다. 걷는 힘까지 없이 눌러  앉으면 노후를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히말리아의 거대한 설산을 품고 사는 네팔 사람들은, 어차피 인생을 100세 시대로 보고 인생을 25세씩 네 단계로 나눠 노년 인생을 대비한다고 한다. (정신과 의사인 이근후 교수)

 

피타코라스가 말한 노년은 인생의 겨울이고 상실의 시기라고 했다. 그렇지만 하얀 눈이 내리는 겨울을 반기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잠시 인듯하지만 설경에 빠져 스키를 타는 사람에게는 즐겁고 행복한 긴 겨울일 수도 있다. 이처럼 긍정적으로 전환하여 행동하지 않으면 자칫 자책으로 인해 우울감과 상실감만 깊어질 뿐이다.

 

나이 들어서는 산골이든 도회지든 혼자 머무는 시간이 많다. 그래서 자연의 마당과 텃밭에서 강아지, 닭,꿀벌과 작물들을 돌보며 적당한 여가 활동을 즐기면서 보내기에는 산골도 그리 나쁘지 않다고 본다. 그렇다고 차도가 끊긴 첩첩 산골에 사는 것도 아니고 도로가 사통팔달 발달되어 있고 모바일 폰까지 갖추어 져 있어, 삼십분에서 한 시간 정도면 시내에 진입할 수 있다.

 

필자의 친구도 벌써 떠난 사람도 있고, 일부의 친구들은 병원을 들락거리며 하루 일과를 보내고 있다. 죽음은 어느 날 갑자기 소리 소문 없이 찾아 올 수도 있다. 홀연히 훌쩍 떠나는 그 날이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눈 뜬 오늘, 이 시간에 마지막 인생을 베팅을 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영원회귀를 말한 니체나 성경에서 몇 백 년을 살았다는 성자들을 증명하기도 어렵다. 앞서 ‘닥치는 대로 살아‘라 역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라'와 '죽음'까지도 함의 되어 있을 것이다.  

 

인생의 마지막 겨울이 지나면 새봄이 온다는, 나의 영혼은 죽지 않고 살아서 숨 쉴 것이라는, 죽음은 모든 의미의 종결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의 근원이라는 대 전제하에 이 변화를 받아들이면서 지금 이 시간인 현재에 충실하자. 이런 가치관을 가져야 하며 또 이 방법만이 최선이다. 그게 웰에이징이고 웰다잉이라며 정의 해보며 두서없는 글로 끝을 맺고자 한다<중산>!

 

사과(부사)
수확한 작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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