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견별곡
슈테판은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며 성공을 기원했다. 오늘도 공원 벤치에 앉아 그 검은 머리의 여인이 모퉁이를 돌아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며 표정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숨이 멎어버릴 정도로 매력적인 검은 머리의 여인은 일주일에 세 번, 늘 비슷한 시간에 개를 데리고 알스터 호숫가를 산책했다. 그녀가 보였다! 세상에, 대체 어떻게 인간이 저토록 아름다울 수 있단 말인가! 슈테판은 오래 전부터 어떻게 하면 그녀의 관심을 끌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해왔다. 눈길을 마주쳐야지! 슈테판의 눈은 검은 머리의 눈길을 찾아 헤맸지만 그녀는 슈테판의 눈을 보지 못했다. 하필이면 그때 그녀의 개가 미친 듯이 줄을 당기며 비둘기를 향해 깨갱깨갱 짖어댔기 때문이다. 슈테판은 원래 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인 데다, 저렇게 성질 나쁜 조그만 개들은 더더욱 싫어했다. 그러다가, 검은 머리가 드디어 슈테판을 바라봤을 때 그녀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뱃속에 가스가 심하게 찬 것이 아니라면 즉시 진통제를 먹어야만 할 것 같은, 슈테판의 얼굴이었다. 그녀는 몸을 홱 돌리고는 몇 초만에 사라져갔고, 슈테판은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며 중얼거렸다. “제기랄, 제기랄!” 슈테판은 마음먹은 것은 끝까지 갖고야 마는 성미였다. 일단 한 가지 목표를 세우고 나면 슈테판은 마치 편집광같이 굴었다. 그리고 현재 슈테판의 목표는 검은 머리 여인이었다.
“개를 한 마리 살 거야.” 슈테판의 아이디어는 단순했다. 슈테판이 개를 한 마리 끌고 검은 머리를 향해 걸어간다. 멍멍이들이 서로의 냄새를 맡으며 킁킁거린다. 상황이 거기까지 진전되고 나면 다음으로 뭔가 매력적이고 그럴싸한 말을 한 마디 건네고 나면 그녀와 눈길이 마주치며 불꽃이 튈 거라는 것이다. 다음 날 슈테판은 동물 보호소에 들렀다. 슈테판은 작은 개를 원했다. 자신의 개와 자신의 이상형의 개가 해부학적으로 큰 차이가 나지 않아야 둘이 잘 어울려 놀 것이라는 이론이었다.
슈테판은 자신의 새로운 파트너와 함께 ‘동물 감옥’에서 나와 주차장을 향해 걸어갔다. “이제부터 네 이름은 ‘미스터 크뢰거’다!” 슈테판은 자신의 애완견에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집에 들어서자 미스터 크뢰거는 호기심에 찬 눈빛으로 침이 뚝뚝 흐르는 주둥이를 여기저기에 쑤셔 넣었다. 아침에 세탁해놓은 스웨터는 침에 절은 걸레 조각이 돼버렸다. 슈테판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슈테판은 소파에 드러누워 텔레비전을 보는 동안 그는 자신의 무릎에 머리를 얹고 있는 미스터 크뢰거를 쓰다듬었다. 무의식중에 벌어진 일이었다. 미스터 크뢰거와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나 편안하고, 좋고, 따뜻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그는 새 파트너에게 자신의 비밀계획을 털어놓기로 했다. “너로 말하자면 검은 머리를 유혹하기 위한 미끼란다. 네 도움을 받아 이상형의 여자에게 다가가려는 거야. 벌써 몇 주일 째 그 여자 꿈만 꾸고 있어. 넌 아무래도 괜찮지?” 슈테판이 물어보자 미스터 크뢰거는 눈을 감았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슈테판 옆에 미스터 크뢰거가 떡 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어젯밤에 분명 방 한쪽 귀퉁이에 이불을 깔고 따로 잠자리를 마련해줬건만. 지난 밤, 미스터 크뢰거에게 팔 베개를 해줬던 것이 떠오르자 슈테판은 당황스러웠다. 개를 껴안다니! 여자에게 팔베개를 해주고 잔 기억도 없는데.
슈테판은 샤워를 하고 옷을 입은 다음, 개의 넓은 등을 두드렸다. “자, 이제 출발이야! 산책을 가는 거라고. 우리가 사냥할 지역을 보여줄게. 오늘은 리허설만 하는 거야! 그 여자는 내일 오거든. 내일은 네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 알았지?” 주인의 계획이 마음에 들어서인지, 미스터 크뢰거는 크고 부드러운 눈을 들어 주인을 쳐다보았다. 슈테판은 자신도 모르게 개와 눈을 맞추고 윙크를 했다.
15분쯤 걸려 둘은 알스터 호수에 도착했다. 벤치를 가리키며 슈테판이 “여기가 바로 ‘그라운드 제로’다. 내일 오전 정각 11시가되면 작전을 개시한다. 일체의 차질 없이 신속한 체포가 이뤄지길 기대하겠다!”라며 군대식 말투를 흉내내며 말했다. 날씨는 맑았고 햇빛이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슈테판은 산책을 조금 더 하기로 마음먹었다. 미스터 크뢰거는 주인과 함께 자갈길을 산책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정도로 행복한 것 같았다. 슈테판은 내일 있을 ‘검은 머리 공략작전’에서 쓸 멋진 말과, 대화를 성공적으로 이끌어가기 위한 방법을 구상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이면 모든 생각들은 사라지고 그저 나무를 보는 것만으로도, 맑은 하늘에 떠가는 흰 구름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쁨이 솟아나는 것이었다. 슈테판은 자신의 얼굴에 아이처럼 환한 미소가 번지고 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다. 시계를 들여다보니 어느덧 세 시간째 산책을 하고 있었다. ‘세 시간씩이나!’ 슈테판은 이렇게 오랫동안 자발적으로 산책한 것이 마지막으로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할 수 없었다. 그 날 저녁 슈테판은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켜면서 자기 쪽으로 오라고 미스터 크뢰거를 불렀다. 개는 온순하게 다가오더니 주인 옆에 앉자마자 잠들어버렸다. 슈테판은 개의 배 위에 자신의 손을 얹어보았다. 개가 숨을 쉴 때마다 배가 올라갔다 내려오기를 반복했다. 따스한 느낌이었다.
다음날 잠에서 깨어난 슈테판은 느긋한 기분으로 아침을 시작했다. 입을 옷을 고르고 헤어젤을 이용해 머리 모양을 만드는 데 보통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그런 다음 신발을 신고 개를 불렀다. “제발 검은 머리를 내게 데려다 줘!” 슈테판은 새 친구의 귀를 쓰다듬었다. 며칠 새 귀를 쓰다듬어줄 때 미스터 크뢰거가 제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던 것이다. 그런 다음 현관문을 열자, 미스터 크뢰거가 기다렸다는 듯 집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런데 어제는 얌전하게 현관문 앞에서 기다리다 문을 열면 건물 안 복도 끝으로 가 조용히 앉아 있던 미스터 크뢰거가 오늘은 자전거 통행로를 향해 껑충껑충 뛰어간 것이다. 그때, 자전거로 배달하는 사람들이 늘 그렇듯 자전거 배달원 하나가 놀라운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뛰어든 개를 미처 피하지 못했다. 그는 급하게 벨을 눌렀고, 귀청을 찢을 듯한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예민한 귀를 지닌 미스터 크뢰거에게 있어 그 모든 소음들은 폭발음과도 같았다. 한껏 겁을 먹은 미스터 크뢰거는 허둥지둥 도망쳤다. 하필이면 차들이 다니는 도로로. 타이어에서 끼익 하는 소리가 나더니, 쿵 하며 둔탁한 소음이 들려왔다.
“다리를 절단해야 할 것 같군요. 피도 너무 많이 흘렸어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상이 또 있을지 아직은 뭐라 말씀드리기 어렵군요. 전신마취에서 깨어날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고요.” 동물병원 응급실을 담당하고 있던 수의사가 말했다.
슈테판은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한 다음 억지로 빵 한 조각을 먹었다. 손이 마구 떨렸다. 뭔가 다른 생각을 하고 싶어서 몸을 일으켜 점퍼를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그는 무심결에 자신이 늘 걷던 길을 걸었다. 몇 분 뒤 슈테판은 알스터 호수에 도착했다. 그는 늘 앉던 벤치에 앉았다. 호수를 바라보고 있자니 미스터 크뢰거 생각이 났다. 자신의 부주의로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난 것 같아 죄책감이 들었다. 그리고, 어른이 된 후 처음으로 눈물이 쏟아졌다.
“괜찮으세요?” 어디선가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심코 옆을 쳐다본 슈테판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 검은 머리의 여자가 서 있는 것이다! 슈테판은 눈물을 닦아내고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예, 괜찮아요. 그런데…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런데 제 개가, 제 개가 아파요.” 검은 머리 여인은 기쁜 듯이 슈테판을 바라봤다. “개를 키우세요? 저도 개를 키워요! 개가 정확히 어떻게 아파요?” “다리가 부러졌어요.” “다시 좋아질 거예요.” 검은 머리가 슈테판을 안심시켰다. 다 큰 남자가, 그것도 준수한 외모의 성인 남자가 자신의 개가 다쳤다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에 그녀는 감동 받고 있었다. 이만큼 감수성 예민한 남자를 만나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저는 소피라고 해요!” “저는 슈테판이에요.”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소피가 입을 열었다. “저기요, 너무 갑작스러운 건지는 알지만, 지금 무척이나 카푸치노가 마시고 싶거든요. 저랑 같이 한 잔 할래요?” 이건 꿈일 거야! 그녀가 먼저 말을 걸고 심지어 데이트 신청까지 하다니. 믿을 수 없어! 그런데 왜 별로 기쁘지 않은 걸까? 지금까지의 그 타오르던 감정들은 다 어디로 사라진 거지? 어쨌든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요, 물론이죠. 기꺼이요.” “아이, 좋아라!”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동물병원 응급실의 베르크만입니다. 슈테판 씨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좋은 소식이 있어요. 선생님의 개가 15분전에 깨어났어요. 상태도 좋은 편이에요. 개가 상처를 이겨낼 것 같네요.” “아, 예!” 슈테판의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금방 그리로 가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슈테판은 달리기 시작했다. 100미터쯤 달린 후에야 자신이 이상형의 여인을 그대로 내팽개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상형이라고? 될 대로 되라지! 그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한 뒤 몸을 돌려 다시 뛰기 시작했다. 30분 뒤 동물병원에 도착한 슈테판은 미스터 크뢰거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미스터 크뢰거는 낑낑거리며 슈테판의 손을 핥았다. 그 모습에 슈테판은 미소지었다. 그 것이야말로 완벽한 미소였다. 행복에 가득 찬 그의 미소는 세상 그 어떤 남자의 미소보다 매력적이었다.
<이성보다도 더 강한 애정을 느끼게 한다는 애완동물에 대한 픽션이다. 거기에는 인간의 영역을 넘어 순종, 복종 그리고 완벽한 애정의 요소까지 갖추어져서 그런 걸까!. 요즘 ‘화초 망쳤다’고 13층에서 고양이 던져"라는 기사가 화제이다.한쪽은 고양이를 키워보지도 않고 싫어하는 쪽이고 반대로 키우는 쪽은 감당하기 어려운 애정을 가지고 있을 것 같다. 사람이 살면서 경험하지 않은 일들을 이해하고 느낀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그나마 책을 통해 간접체험이라도 하면 몰라도...!!! "작은 벤치의 기적",게르노트 그릭슈 지음/강희진옮김,시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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