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내게서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보다 높은 삶, 이른바 정신적인 삶을 추구하는 본능과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삶을 추구하는 본능을 찾아볼 수 있는데, 나는 이 두 가지 삶을 모두 존중한다. 나는 선한 삶 못지않게 야생의 삶을 사랑한다. 나는 낚시질에 들어 있는 야성과 모험 때문에 여전히 낚시질을 좋아하고 있다. 종종 짐승처럼 그 거친 삶 속에서 좀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들과 숲에서, 요컨대 어떤 의미에서는 자연의 일부가 되어 삶을 영위하는 어부와 사냥꾼과 나무꾼 같은 이들은 흔히 일상적으로 생업에 종사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연에 대해 막연한 기대감을 품고 접근하는 철학자나 시인에 비해 자연을 관찰하기에 훨씬 유리한 입장에 처해 있다. 자연은 주저 없이 그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식욕과는 무관한 음식에서 이따금씩 형언할 수 없는 만족감을 얻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추한 미각에 정신적 지각이 은혜를 입고 있다는 것, 미각에서 영감을 얻어 왔다는 것, 언덕에서 따먹은 열매가 내 재능을 키워왔다는 것을 생각하고 전율을 느꼈다. 공자는 말하기를, “마음이 자신의 주인이 되지 못하면 봐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그 맛을 모른다.”고 했다. 설혹 청교도일지라도 흑빵 한 덩어리를 시의회 의원이 거북의 고기를 먹을 때처럼 탐욕스럽게 먹을 수도 있다.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인간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먹는 식욕이 인간을 더럽히는 것이다. 질이나 양이 아니라 감각적인 맛을 탐닉하는 것이 문제다.
요컨대 우리가 먹은 음식이 우리의 동물적인 생명을 지탱시키거나 정신적인 생명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벌레를 위한 음식이 될 때가 문제인 것이다. 사냥꾼이 진흙거북과 사향뒤쥐 같은 천한 음식을 좋아하고, 귀부인이 족발로 만든 젤리나 외국산 정어리를 탐닉한다면 그들은 똑같은 사람들이다. 사냥꾼은 저수지를 찾고 귀부인은 잼이 든 병을 찾는 것이 다를 뿐이다. 놀라운 것은 그들이, 그리고 여러분과 내가 어떻게 이처럼 먹고 마시는 더럽고 짐승 같은 삶을 영위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몸속에, 우리의 보다 높은 본성이 잠들수록 깨어나는 짐승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 그 짐승은 파충류 같고 관능적이며, 건강하게 살고 있는 우리의 몸속에 들어 있는 기생충들이 그렇듯이 어쩌면 완전히 내쫓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 짐승으로부터 떨어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놈의 본성을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그놈은 나름대로 건강하며, 따라서 우리는 건강할 수는 있지만 순결할 수는 없을지 모른다. 우리가 순결에 이를 경우 어떤 삶을 살게 될지 그 누가 알 수 있을까? 내게 순결을 가르쳐줄 정도도 현명한 이가 있다면 나는 당장이라도 그 사람을 찾아 나설 것이다. 베다에 의하면 “우리의 정열과 육체의 외적 감각을 다스리는 힘, 그리고 선행은 정신이 신에게 접근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요소다.”라고 한다. 그런데 정신은 얼마 동안 육신의 모든 부분과 기능을 통제할 수 있고 외적으로 볼 때 더할 나위 없이 천박한 관능이라도 순결과 헌신으로 변형시킬 수 있다.
생식력은 우리가 해이해져 있을 때에 우리를 방탕하고 불결하게 만들며 우리가 절제할 때는 기력과 영감을 북돋워 준다. 순결함은 인간의 꽃이다. 이른바 재능이나 영웅적 행위, 신성함 같은 것들도 순결의 밑에 맺히는 여러 가지 열매일 뿐이다. 순결의 수로가 열릴 때 비로소 인간은 곧장 신에게로 흘러가게 된다. 순결은 우리에게 영감을 주며 불순함은 우리를 파멸시킨다. 매일같이 내면의 짐승이 죽어가고 있으며 신성이 자리 잡아 가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축복받은 사람이다. 자신과 굳게 맺어져 있는 열등하고 동물 같은 본성 때문에 수치를 느끼지 않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파우니나 사티로스(둘 다 반인반수의 신) 같은 신 혹은 반신이며 짐승과 결합된 신성이며 욕망의 동물이다. 요컨대 우리의 삶 자체가 우리에게는 치욕스러운 것이다.
모든 관능은 비록 갖가지 형태를 취하고 있더라도 실은 하나이며, 마찬가지로 모든 순결 역시 그러하다. 육욕이라는 면에서는 음식을 먹든 마시든 누구와 잠자리를 같이하든 잠을 자든 매한가지다. 이것들은 하나의 욕망이므로, 어떤 사람이 얼마나 육욕적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이들 중에서 하나만 보면 된다. 불순한 인간은 서나 앉으나 순결할 수가 없다. 그 파충류는 자기 굴의 한쪽 입구가 공격받으면 다른 쪽 입구로 모습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순결을 원한다면 절제해야 한다. 대체 순결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인간이 자신이 순결한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인간은 그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이 덕에 대해 듣기는 했지만 그 정체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있다. 그저 귀로 들은 소문에 따라 말할 뿐이다.
노력하는 데서 지혜와 순결이 나온다. 나태에서는 무지와 관능이 나올 뿐이다. 학생에게 있어서 관능이란 정신의 게으른 습관이다. 불순한 인간은 대체로 게으른 인간이며, 난롯가에 앉아 있는 인간, 해가 떴는데도 엎어져 있는 인간, 피곤하지 않은데도 쉬고 있는 인간이다. 불순함과 모든 죄악을 피하려면 마구간 청소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열심히 일하라.
본성을 극복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반드시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기독교인인 당신이 이교도보다 순결하지 못하고 더 자제하지 못하고 더욱 신실하지 못하다면 대체 그것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이교라고 간주되는 많은 종교에도, 그 계율이 그것을 읽는 자를 부끄럽게 하고 비록 그저 의식의 수행이라 할지라도 신자를 새롭게 분발하도록 자극하는 것이 많이 있다.
1845년 여름부터 1847년 가을에 걸쳐 월든 호반에서 생활한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 그는 인간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이 검소하고 소박한 삶이라고 말한다 <월든, 헨리 데이비드 소로 지음>
<야생화 무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