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이 애완견이 죽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귀여워하던 애완견이 죽었어요.” “정말 안됐습니다. 쓸쓸하시겠어요.” “아니요, 이제 좀 살 것 같아요. 남편이 개를 좋아했고 저는 개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어지럽히고, 손도 많이 가고, 개가 죽고 나니 살 것 같아요.” “그거 잘 됐네요.” 이처럼 말은 끝까지 듣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미리 자기 마음대로 판단해서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여기까지는 카운슬러의 이론이다.
카운슬링을 하다 보면 이런 일이 왕왕 있다. 하지만 이야기를 끝까지 들으면 더더욱 복잡해지는 경우도 있다. “저는 틀림없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최근 개가 죽고 나서 매일 보던 얼굴이 보이지 않자 쓸쓸한 것 같아요.” “네?” “살아 있을 때는 그렇게 귀찮더니 죽고 나니까 그리워지네요. 제가 실제로는 개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래요? 실제로는 개를 좋아하시는 것 같다고요?” “네, 죽고 나니 그런 생각이 들어요.”
여기까지 듣고서야 겨우 상대가 말하고자 하는 게 뭔지 알게 됐다. 하지만 좀 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산책을 시키거나 돌봐줄 필요가 없어 편해졌으니 잘된 것 같아요”라고 마음이 왔다 갔다 했다. 자기 자신의 마음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보면 처음과 끝이 전혀 다른 경우도 가끔 있다. 성급한 판단도 안 되겠지만 이야기를 끝까지 다 들었다고 확실해지는 것도 아니다.
“아무래도 개가 죽어 편해진 면과, 죽어서 쓸쓸한 두 가지 마음이 양립하고 있는 것 같군요. 어느 쪽이 강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 또한 카운슬링의 원칙에 충실한 것이다.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그것보다 남편과 의견대립이 심하고 성격도 맞지 않아요. 남편이 쓴 물건, 가지고 있는 것들을 보거나 손대는 것조차 싫어요.” “남편과 원만하지 않다는 말씀인가요?” “네, 헤어지고 싶어요.” “이혼하고 싶다는 말씀이군요.” “그래요.”
문제는 애완견이 아니라 부부문제로 발전해 버린다. 이혼에 대한 문제라는 건 알겠지만 이런 경우 이야기를 시작할 때부터 이야기를 다 들을 때까지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다. 나는 물 위에 떠 있는 낙엽처럼 바람에 떠다닐 뿐이다. 하지만 확실히 하기 위해서 물어보았다. “그런데 이혼과 애완견이 죽은 게 무슨 관계가 있나요?” “아니오, 전혀 관계가 없어요.” 이야기를 끝까지 다 들어봐도 결국 알 수가 없었다. 카운슬러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그저 이야기를 들어줄 수밖에 없다.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보면 처음과 끝이 전혀 다른 경우도 가끔 있다.
<“마음의 일요일”에서 일부 요약 발췌, 스가노 타이조 외 지음, 큰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