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 뉴스 다음인데
어느 주말 전철을 탔을 때 주중과는 달리 많은 가족 나들이객들이 여유롭게 수다를 떨면서 앉거나 혹은 서 있었다. 어떤 자매는 퀴즈 게임을 하고, 어떤 형제는 컴퓨터 게임 공략 책을 보면서 이러쿵저러쿵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두 소년의 ‘격론’이 심해지면서 시끄러워지자 아이들 엄마가 “조용히 해. 지금 컴퓨터 게임 이야기나 할 때가 아냐! 산에서 사람들이 죽어 떠들썩한데 너희들은 그렇게 태평스러워서 참 좋겠다”라고 혼을 냈다.
“알았어요. 조용히 할게요”라고 대답할 줄 알았는데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동생이 바로 “뭐! 하지만 어제 뉴스는 이상했어”라고 대답했다. 엄마가 “뭐가?”라고 묻자 “사람들이 죽은 뉴스가 끝나자마자 왜 곧장 그렇게 밝고 신나는 음악을 틀어?” 하고 대답했다. 엄마가 “그건 뉴스가 끝나면 틀어주는 테마곡이야”라고 말해주었지만 끝나지 않았다. “그래도 정말 이상해. 절대 용서할 수 없어. 슬픈 일인데 좀 더 비장한 음악을 틀어야지” 하는 것이었다. 엄마는 컴퓨터 게임 이야기를 하고 있던 아들이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퍼붓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곤혹스러워했다. 이 사내아이가 “정말 이상해!”라고 박력 있게 말하자 옆에 있던 자매의 가족도 대체 무슨 일인지 궁금해 남자아이를 쳐다봤다.
나는 우연히 그 가족이 앉아 있던 앞 손잡이를 잡고 있다가 ‘비장’이라는 어려운 말을 쓰는 데 깜짝 놀랐지만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이상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분명 좀 전까지 슬픔에 잠겨 눈물을 머금고 이야기하던 앵커가 다음 뉴스를 읽어 내려간 다음 곧장 하하하 웃는 광고로 이어지는 게 의외로 많다.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해고 앵커의 연기가 지나치다거나, 너무 냉정한 표정을 짓고 있다고 방송국에 항의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평소 그런 이야기를 듣는 앵커도 고생이 많군, 이렇게 매일 슬픈 사건들이 끝없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정보를 전달해야 하는 걸까라는 생각을 했었지만, 매일 어른들이 정신없이 일하고 있는 동안 아이들은 여러 가지 것들을 천천히 전신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었다. 아이들은 짤막하게 줄줄이 수많은 장면들이 바뀌는 데 익숙하다는 걸 말이다.
그렇다. 천수를 누리고 돌아가신 분의 장례식이 차분하게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비장한 일이 있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슬픔은 슬픔으로써 좀 더 천천히 느낄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Key point -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말이 있다. 경건한 아이들의 눈에 비치는 세계는 바로 모순투성이 어른들의 세계이다. <“마음의 일요일”에서 일부 요약 발췌, 스가노 타이조 외 지음, 큰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