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동안 로라는 꽉 짜여진 일정 속에서 바쁜 나날을 보냈다. 많이 배우지도 못하고 가난하게 살아가는 부모님을 생각하면 로라는 부끄러워 견딜 수 없었다. 힘겹게 얻은 경제적 독립과 자유를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로라는 백 달러짜리 지폐 두 장을 카드에 넣어 부모님께 보냈다. 그렇지만 고맙다는 인사는 한 번도 없었다. 20년 전쯤 로라가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가기 위해 집을 나온 이후로 그들 사이엔 연락이 없었다.
책은 그녀의 인생이었다. 그녀는 대학 전학년 동안 A학점만 받아왔다. 보조금이나 대출금, 그리고 장학금으로 연명하며 오로지 공부에만 열중했다. 여러 실험실에서 아르바이트하면서 그녀는 소중한 경험을 했고, 주변으로부터 신뢰도 얻었다. 대학원을 다니면서 기초 생물학을 강의하기도 했고, 한때는 대형 제약회사의 보조연구원으로 일한 적도 있었으며, 마침내 박사학위도 받았다. 미멧연구소에서도 가장 많은 연구지원금을 받는 연구원이었다. 그녀에게 부모는 누구에게도 발각되고 싶지 않은 치부였다. 그러나 부모의 생활태도를 지독히 혐오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그것은 로라의 삶 속에 면면이 스며들어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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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아무도 닭을 돌보지 않는다. 찰리가 죽자 에니드는 말 두 마리와 어린 송아지 네 마리를 경매로 팔아버렸다. 이후 축사는 텅 비었고 에니드의 일상은 더욱 단순하고 공허해졌다. 집안 정리는 모두 끝났다. 이제 남은 일이라곤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그녀는 부엌을 서성거리다 남편의 잠든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잠이 들면 그는 정상인으로 보인다. 그러나 깨어 있을 때는 늘 왼쪽 얼굴이 돌아가버린다. 남편 역시 예전의 생활을 되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지금은 그것마저도 포기해버렸다. 이제 반송장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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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배우자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큼 슬픈 일은 없다. 항상 자신이 먼저 죽기를 그녀는 기도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녀는 더 강인해졌다. 남편의 마지막 여생을 관조하며, 그가 먼저 죽기를 바랄 수 있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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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로라가 집으로 온다. 남편은 죽기 전에 로라를 만나야 했다. 로라 또한 아버지를 만나야 했다. 로라는 늘 기운이 철철 넘치는 소녀였다. 학창 시절에는 부모들보다 훨씬 더 영리했다. 그녀는 로라와 대화하려고 애썼지만 로라의 말을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자신의 무지를 감추기 위해 미친 듯이 냅킨을 던져버리곤 했다. 하지만 에니드는 알고 있었다. 그것이 딸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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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니드는 딸이 자랑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 공부를 많이 하는 것이 인생에 유익하지만은 않을 거라는 생각도 했다. 지식은 영혼을 잠시도 쉬지 못하게 만드는 법이다. 그녀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사실 그녀는 아는 것이 없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은 단지 로라가 결혼한 후 여러 명의 자식을 낳아봐야 인생의 참맛을 알 것이라는 사실뿐이었다. 그러나 로라가 결혼을 하지 않을 것이며 자식 또한 낳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남편은 일곱 내지 여덟 명의 자식을 두고 싶어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아이는 단 한 명뿐이었다. 가엾은 로라! 혼자서 감내하기 힘든 고통을 그 애가 고스란히 물려받았던 것이다. 로라가 오늘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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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차에서 내려 고요한 시골 풍경에 잠시 넋을 잃었다. 의식적으로 숨을 들이켰다. 이 고요함과 적막함이 너무나 친근하게 느껴졌다. “안녕, 엄마.” 그녀는 간단히 인사를 한 다음, 차에서 내려 어머니를 껴안았다. 어머니의 냄새도 그대로였다. 아이보리 비누 냄새와 베이비 파우더 냄새. “네가 집에 오니 너무 좋구나. 아버지도 너를 보면 무척 반가워하실 거야.” 어머니가 말했다. “아빠가요?”
(중략)“안녕하세요, 아버지.” 로라가 말을 꺼내자 그의 눈이 빛났다. 그러나 입은 여전히 다물고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곁에 앉았다. 눈물 한 방울이 검버섯 가득한 아버지의 주름진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비... 비... 빌어먹을!”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다정하게 웃어주셨지만, 로라는 그 광경을 지켜보며 약간 당황했다. “아직도 말을 못해. 하지만 욕은 여전하시단다.”
로라는 아버지의 뺨에 입맞춤을 했다. 신선한 농장 냄새. 그녀는 들려 있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무릎에 올려놓았다. 자신의 감정을 무어라 표현할 길이 없었다. “레모네이드 줄까?” 어머니가 물었다. “비... 비... 빌어먹을!” 아버지의 얼굴에 또 다시 한 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로라는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어머니가 레모네이드 세 잔을 들고 거실로 왔다. 그리고 저무는 석양을 보기 위해 커튼을 열어젖혔다.
“멋진 자동차더구나.” 어머니가 말했다. “빌린 거예요.” “내가 빨간색 차를 좋아했잖니?” 어머니는 아버지를 안고 레모네이드 몇 모금을 마시게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한 모금도 제대로 마시지 못했다. 레모네이드 액체가 아버지의 턱으로 흘러내렸다. “결혼은 했니?” 어머니가 물었다. “아뇨. 내가 자식들을 낳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죠?” “잘 모르겠구나. 하지만 그렇게 바라긴 했지. 너무 늦은 감은 있지만, 지금도.”
자신을 낳아준 여자, 그러나 지금은 타인처럼 느껴지는 그 여인을 테이블 너머로 바라보며 로라는 아련한 슬픔을 느꼈다. 대화의 주제는 지극히 개인적이었다. 여전히 그랬다. 하지만 여전히 이 사람은 자신의 어머니였다. 로라는 가슴을 비집고 들어오는 정체 모를 친밀감에 몸을 떨었다. 이 집으로 들어오면서 다시 어린아이가 된 것이다. 아니,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편하게, 아주 편안하게 며칠만 참아내자.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그러고 나서 다시 내 아파트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하고 그녀는 중얼거렸다. 아버지는 로라에게서 손을 빼내고는 굳어버린 혀와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입을 애써 움직이고 있었다. “네가 얼마나 머물 건지 궁금하신가 봐.” 어머니가 능숙하게 통역을 했다. “목요일에 돌아갈 거예요. 12시쯤 여기서 떠나야 해요.”
로라가 말을 하자 아버지가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오늘요? 오늘은 화요일이에요.” 고개를 끄덕이던 아버지는 다시 울부짖는 듯한 소리를 냈다. “아니에요, 여보. 이 애는 도니 씨 집에서 묵을 거예요.” 고통스런 죄의식이 로라를 움켜잡았다. “저... 여기서 잘 거예요.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 그랬던 것뿐이에요.” “폐라니, 무슨... 네가 편한 곳에 있으렴.” 아버지는 다시 한 번 손을 빼내어 손가락으로 소파를 쿡쿡 찔러댔다. 더 이상의 통역은 필요 없었다. “알았어요, 아버지. 집에서 잘게요.” 그는 다시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내를 바라보았다. “배가 고프신 모양이야. 로라, 나 좀 도와주렴?”
음식 나르는 일을 달가워하지 않는 로라였지만, 지금은 무언가 할 일이 있다는 사실이 즐거웠다. 게다가 아버지의 식사를 거드는 일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끔찍한 과정이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셔츠에 닭고기 국물을 떨어뜨리고 난 다음에야 어머니가 건네준 주방용 타올을 아버지 목에 둘러야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버지는 씹어 넘기지 못했다. 닭고기 살을 입으로 씹듯이 잘게 찢어야 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입안 가득 닭고기를 물고 기침을 할 때마다 그녀는 고통스러웠다.
“죄송해요, 아버지. 제가 너무 서툴죠?” 그녀는 울음을 참으며 말했다. “나도 그렇구나.” 그의 말은 발음기관이 제대로 작동되어 나오는 듯 또박또박했지만 사실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녀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한 줄기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렀다. 그녀는 아버지를 꼭 껴안았다. “비... 비... 빌어먹을!” 그 말에 로라는 소리내어 웃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자 로라는 아버지의 뺨에 입을 맞춘 뒤 그릇들을 들고 부엌으로 갔다. “다 드셨니?” 어머니는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반쯤요.” “잘했다. 요즘 들어 거의 먹지 못했는데.” “제가 일거리만 만들었어요.” “괜찮아. 내가 아버지를 씻길게.” 로라는 설거지를 끝낸 그릇을 테이블로 날랐다. 결혼하지 않은 게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를 돌보고 책임져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끔찍한 일이었다. 절대로 엄마처럼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하루에도 세 끼 식사를 챙기고 목욕, 면도, 대소변, 옷 입는 것, 잠자리까지 수발한다는 것은 그녀에게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매번 크리스마스 때마다 네가 돈을 보내줘서 얼마나 고마워했는지 모른단다.” 어머니의 말에 로라는 미소로 답했다. “미네소타에서는 잘 지내고 있겠지?” “멋진 직업이에요. 다음달에는 국회에서 증언을 하러 워싱턴에 가요.” “그래?” 어머니는 하던 일을 멈추고 감탄스런 표정으로 로라를 바라보았다. “국회? 워싱턴에 있는 것 말이니?” “예, 약품 건으로요. 우리 회사는 FDA로부터 승인을 받아야 해요.” “무슨 약인데?” "음- 단 한 번의 투약만으로 이스트 전염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알약이에요.“ “아버지를 구할 수 있는 일을 네가 해냈구나.”
로라는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그런 건 아니예요. 진찰은 받아보셨어요?” “아니, 병원에는 가보지 않았단다. 의사들은 아버지의 생명을 길게 연장시킬 뿐이야. 아버지는 이런 모습으로 오래 살고 싶어하지 않아.” “조금만 노력하면 예전의 기능을 되찾을 수 있어요. 치료만 조금 받으면요...” 어머니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독서후기; 말년의 부부애와 객지로 떠나 보낸 자녀와의 관계를 재조명 해보는 글이다. 동양적사고로 보면 부모 자식간 무관심한 느낌도 주지만 부모의 관대함과 체험적 삶에 서서히 적응해가는 자녀의 성장과정이 담겨진 내용이다. 앞으로 일어날 신구 세대와 노후 생활상을 예견해보는 계기가 되은 것 같다! <“엄마와 딸” 일부 요약 발췌, 아일린 굿지 외 지음/최정미 옮김,들녘 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