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안의 신성함을 인간성과 결합시켜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일종의 신념의 도약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신념의 도약 안에서 우리의 에고는 죽게 된다.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신념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나는 우리 모두가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갓난아기와 어린아이를 떠올려보자. 그들은 누군가 자신을 돌봐주고 보호해 주리라는 견고한 믿음을 갖고 있다. 물론 그 믿음은 시간과 경험이 쌓이면서 점점 퇴색하고 바로 그때부터 그들은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기 시작한다. 그것은 어떤 사상이 될 수도 있고 종교 혹은 사회시스템이 될 수도 있다. 이들은 모두 불안과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구제해준다. 우리 인간들은 언제나 마음 편히 쉴 곳을 찾아 헤맨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해답은 우리 안에 있다. 그러나 나만의 답을 믿을 수 있을까?
내가 나를 믿지 않을 때, 우리는 자꾸만 튀어나오려는 불안이라는 악마를 저지하기 위해 나를 떠나 바깥에서 기댈 곳을 찾는다.
내 둘째 딸 데비는 대학교 2학년이었던 스무 살 때 나에게 내면의 믿음에 관해서, 또 딸아이 자신과 나에 대해서 아주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데비는 그때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었다. 살면서 이제까지 겪었던 트라우마['정신적 외상','(영구적인 정신 장애를 남기는) 충격']들이 한꺼번에 딸아이를 덮쳤다. 사실 나는 데비가 고등학생일 때부터 이런 일이 생길까봐 조마조마했다. 데비는 어린 시절부터 엄마의 암 투병을 지켜보아야 했고 아빠의 전신마비에 적응해야 했으며 우리 가정에 닥친 여러 불행과 혼란을 참아내야 했다. 아이 엄마와 내가 이혼한 다음에는 엄마의 변덕과 무신경함을 견뎌야 했다. 그리고 이 모든 사건을 겪으면서도 데비는 적어도 겉으로는 언제나 ‘완벽한 아이’의 모습을 유지했다.
그러나 대학에 입학하자 모든 것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어느 날 데비의 룸메이트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와 데비가 너무 걱정된다고 말했다. 데비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고 학교를 잠시 휴학한 후 집에서 쉬다가 필라델피아에 있는 한 회사의 인턴사원이 되었다. 데비는 직장 사람들과 밤늦게까지 어울렸고 내게는 그런 모습이 위태로워 보였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는 데비에게 내가 많이 염려하고 있다는 것을 알렸고 힘이 되어주고 싶다고 말했다. 여느 아이들처럼 데비도 처음에는 언짢아하며 자기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괜히 주변에서 더 난리라며 내 말을 무시했다. 하지만 상황은 점점 나빠졌고 어느 날 데비는 눈에 눈물을 가득 머금은 채로 나에게 말했다. “아빠, 나는 다이아몬드인데 내 안에 자꾸 악성종양이 자라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 시점에서 나는 이 세상 모든 부모들이 대처하는 방식대로 행동했다. 내가 아는 모든 자원을 동원해 종양을 제거하려고 한 것이다. 나는 데비를 여기저기 닥치는 대로 끌고 다녔다. 처음에는 최고의 심리치료사와 정신과의사를 찾아다니며 그들의 의견을 묻고 ‘올바른 접근법’을 구했다. 데비가 2학년이 되어 다시 학교로 돌아가자 나는 계속 내가 아는 모든 지식을 동원해 아이를 도우려했다.
바로 그즈음 데비의 학교가 있는 워싱턴 D. C.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데비는 내게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잠깐 만나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약속 시간을 정했고 내가 도착했을 때 아이는 식당 옆 벤치에 혼자 앉아 있었다. 아이를 보니 걱정이 되어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아이의 얼굴이 너무 까칠하고 기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딸은 힘을 내서 내 손을 꼭 잡더니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빠, 아빠는 제게 해줄 수 있는 모든 걸 다 하셨어요. 그 점, 무척 감사해요. 하지만 이제 제 인생은 제 손으로 만들어보고 싶어요.”
나는 울었다. 슬퍼서 울고, 무력감과 두려움 때문에 울었고, 또 안심이 되어 울었다. 차를 타고 돌아오면서 나는 일 년 전 자신이 종양 속의 다이아몬드라고 했던 딸의 말을 떠올렸다. 데비가 “이제 제 인생은 제 손으로 만들어보고 싶어요”라고 말했을 때 나는 다이아몬드가 반짝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부모로서 내가 할 일은 그 다이아몬드를 언제까지나 지켜봐주는 일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우리가 미처 보고 듣지 못할 때에도 우리 안의 다이아몬드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우리는 그것을 소중히 돌보고 지켜주고 이 모든 혼란 속에서도 그 믿음의 목소리를 들어야만 한다.
우리 사회는 ‘당신이 원하는 것이면 뭐든지 될 수 있다’는 식의 표어를 좋아한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내 안의 다이아몬드를 키워라.” 이것은 성취나 자기계발에 관한 말이 아니다. 내 안의 봉오리를 꽃피우는 것, 그리고 더 나은 나 자신이 되는 법에 관한 이야기이다.
스물한 살짜리 딸의 말에서, 또 자신의 인생은 제 손에 달렸다는 아이의 확신 속에서 나는 언젠가 하나님 앞에서 했던 선택의 약속을 떠올렸다. 데비는 자신이 고통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내게도 또 자기 자신에게도 답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신의 인생은 제 손으로 일으켜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삶과 죽음 사이에서 고뇌했던 것처럼 데비도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나처럼,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데비는 삶을 택했다. 그 순간에는 그 선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 앞으로의 삶이 어떻게 펼쳐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삶을 선택했다는 것, 그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도약이다. 내게 주어진 인생이 아니라 진짜 나의 인생을 살아가겠다는 약속이며 내 안의 다이아몬드를 키우기 위해 무엇이든 해내겠다는 다짐이다.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자기 민족을 이끌고 나와 약속의 땅을 향해 떠났던 모세는 우리와 같은 길을 걸었다. “나는 믿음의 걸음을 택하여 그것이 이끄는 대로 가리라.”<“마음에게 말걸기”에서 요약발췌, 대니얼 고틀립 지음,문학동네 >
▣ 저자 대니얼 고틀립
심리학자, 임상심리의, 가족문제치료전문가. 고교시절부터 겪은 학습장애로 낙제를 거듭하여 대학을 두 번 옮긴 끝에 템플 대학교에서 학습장애를 극복하고 심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