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란!
개인 자신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행동에 대해서는 사회적 관심이 간접적일 수밖에 없다.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관련되는 행위야말로 인간 자유의 본래적 영역이기 때문이다. 본래적 자유의 영역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내적 영역인 의식이다. 가장 넓은 의미에서 양심의 자유, 사상과 감정의 자유, 실제적 사색적 과학적 도덕적 신학적인 모든 문제에 관한 의견과 감정의 절대적인 자유, 언론과 출판의 자유가 여기에 해당된다. 둘째,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즐길 수 있는 기호의 자유와 목적 추구의 자유다. 각자의 생활을 각자의 성격에 맞도록 설계할 수 있는 자유,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자유다. 셋째, 각 개인이 갖는 이와 같은 자유로부터 개인 상호간의 단결의 자유. 역시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어떠한 목적을 위해서라도 결합할 수 있는 결사의 자유.
이와 같은 자유가 존중되지 못하는 사회는 그 통치 형태가 어떻든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자유’라고 불릴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자유는, 우리들이 다른 사람의 행복을 빼앗으려고 하지 않는 한, 또는 행복을 얻으려는 다른 사람의 노력을 방해하지 않는 한, 우리들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우리들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자유다. 각 개인은 육체적인 건강이든 정신적인 건강이든 각자 자신의 건강의 수호자이다. 각 개인으로 하여금 스스로 좋다고 생각하는 대로 생활하게 하는 편이, 다른 사람들이 좋다고 생각하는 대로 개인 생활을 강요하는 것보다 오히려 얻는 바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자유론 on Liberty”에서 일부 요약 발췌, 존 스튜어트 밀 지음>
‘공리’를 양적으로 계산 가능한 쾌락으로 인정했던 벤담과 달리 질적 쾌락을 중시했던 밀은 남자와 여자의 동등함을 주장하고, 여성을 변호했으며, 자유와 평등이 완전하고 조화롭게 실현될 수 있는 민주주의를 신봉했다. 그는 특히 노동자의 지위향상과 여성 해방 등에 관심을 쏟았다.
『자유론』에 잘 나타나 있듯이 밀은 개성을 행복의 중요한 요소로 생각했다. 타인의 전통과 관습이 개인의 행동 기준인 곳은 행복의 주요 요소 중 하나가 결여돼 있는 것이며, 개성 있는 자발적 선택이 얼마나 인간의 성장에 필요한 것인가를 역설했다. 그는 말한다. “일체의 고귀하고 어진 것은 모두 개성으로부터 싹튼다.”고.
밀이 정신적 위기에서 벗어날 무렵인 1832년의 어느 날, 25세의 그는 런던의 약종상 존 테일러의 초대를 받았다. 여기서 그는 테일러의 부인인 헬리오트를 알게 됐다. 그녀는 지적으로 굉장히 뛰어난 여성으로 밀의 이상형이었다. 그들은 곧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그들의 친밀한 관계는 영국 상류 사회의 스캔들이 되었다. 테일러의 양해로 계속 유지될 수 있었던 그들의 관계는 밀이 44세가 될 때까지, 그러니까 헬리오트의 남편인 테일러가 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계속됐다. 그리고 밀이 46세 되던 1851년, 주위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헬리오트와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온 결혼이었지만 프랑스 여행 중에 얻은 감기와 폐렴으로 헬리오트가 갑작스레 죽게 됐다. 밀은 아내의 유해를 묻은 아비뇽 근처에 집을 마련해 그녀의 무덤을 평생 돌보는 열정적 사랑을 보여줬다.
그는 『자서전』에서 『자유론』은 헬리오트와 함께 내용을 공유하며 함께 수정·검토한 두 사람의 합작품이라고 밝혔다. 헌사에서도 헬리오트에 대한 그의 존경과 뜨거운 사랑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여성의 인권과 민주주의, 자유로운 개성의 발현에 관한 자신의 사상 대부분이 헬리오트에서 비롯됐다고 말했다.
60세가 되던 1865년, 밀은 웨스트민스터 선거구에 자유당 소속으로 입후보해 당선됐다. 그는 ‘선거운동에 돈을 쓰지 않는다, 당선이 돼도 지방의 이익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 당의 의견에 구속되지 않는다....’ 등의 공약으로 내세우며 입후보했음에도 불구하고 700표차로 당당히 당선됐다. 그후 밀은 의회에서, 비록 부결되기는 했지만, 여성 참정권을 요청하는 등 여성 참정권 운동의 선구자로 활약했다. 또한 비례대표제, 선거비용삭감, 공명선거 등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급진적인 주장들이 당시의 실정과 맞지 않았기 때문에 자유당내에서조차 인정받지 못하고 1868년 선거에서는 낙선하고 말았다.
아비뇽에 돌아와 연구에만 몰두하던 밀은 1873년 5월 7일 『곤충기』의 저자인 파브르와 소풍을 갔다가 병을 얻어 그만 3일 만에 운명하고 말았다. 67세의 나이로 진리에 대한 뛰어난 능력과 자유에 대한 열정적 마음을 가졌던 삶을 마침내 마감한 것이다. 유해는 그가 평생 사랑했던 아내 헬리오트의 묘 옆에 나란히 매장되었다.
밀은 영국의 철학자요, 사회개혁가요, 자유옹호자요, 경제학자이자 공리주의의 완성자였다. 주요 저서로 근대 민주주의의 대표적 문헌 『자유론』(1859)을 비롯해 『추론적 및 귀납적 논리학의 체계』(1843), 『경제학 원리』(1848), 『대의정부론』(1861), 『공리주의』(1863), 『자서전』(1873) 등이 있다.
<달래>
잎과 둥근 알뿌리를 날것으로 무침해 먹거나 부침 재료로도 사용한다. 생약명 소산(小蒜)은 달래의 비늘줄기를 말하며 토사곽란과 복통, 종기와 벌레에 물린데, 협심통에 식초를 넣고 끓여서 복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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