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자기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우리는 한 번도 자신을 탐구해본 적이 없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이방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혼동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먼 존재이다”라는 명제는 우리에게 영원히 의미를 지닌다. 우리 자신에게 우리는 ‘인식하는 자’가 아닌 것이다.
인간은 어떤 조건 아래 선과 악이라는 가치 판단을 생각해냈던 것일까? 그리고 그 가치 판단들 자체는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이제까지 인간의 성장을 저지했던 것일까 아니면 촉진했던 것일까? 그것은 삶의 위기와 빈곤, 퇴화의 징조인가? 아니면 반대로 거기에는 삶의 충만함, 힘, 의지가, 그 용기와 확신이, 그 미래가 나타나 있는가?
우리에게는 도덕적 가치들을 비판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러한 가치들의 가치는 우선 그 자체로 문제시되어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이러한 가치들이 성장하고 발전하고 변화해온 조건과 상황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이러한 ‘가치들’의 가치를 주어진 것으로, 사실로, 모든 문제 제기를 넘어서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선한 사람’을 ‘악한 사람’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다고 평가하는 일이나, 대체로 선이 인간이라는 것을 (인간의 미래를 포함하여) 촉진하고, 인간에게 공리, 번영을 가져온다는 의미에서 훨씬 더 가치가 있다고 평가하는 일에 조금도 의심하거나 동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만일 그 반대가 진리라고 한다면, 사정은 어떤가?
‘선과 악’, ‘좋음과 나쁨’
‘좋음’이라는 판단은 ‘좋은 것’을 받았다고 표명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좋은 인간들’ 자신에게 있었던 것이다. 고귀함과 거리의 파토스, 좀더 높은 지배 종족이 좀더 하위의 종족, 즉 ‘하층민’에게 가지고 있는 지속적이고 지배적인 전체 감정과 근본 감정, 이것이야말로 ‘좋음’과 ‘나쁨’이라는 대립의 기원이다.
이러한 기원에서 드러나는 사실은, ‘좋음’이라는 용어가 저 도덕 계보학자들의 미신이 억측하는 것처럼, 처음부터 필연적으로 ‘비이기적’ 행위와 결부된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이기적’, ‘비이기적’이라는 대립의 전체가 인간의 양심에 더욱 떠오르게 되는 것은 귀족적 가치 판단이 몰락할 때 비로소 일어난다.
어느 언어에서나 신분을 나타내는 의미에서의 ‘고귀한’, ‘귀족적인’이 기본 개념이며, 여기에서 필연적으로 ‘정신적으로 고귀한’, ‘귀족적인’, ‘정신적으로 고귀한 기질의’, ‘정신적으로 특권을 지닌’이라는 의미를 지닌 ‘좋음’이 발전해 나오는 것이다 : 언제나 저 다른 발전과 평행해 진행되는 또 하나의 발전이 있는데, 이는 ‘비속한’, ‘천민의’, ‘저급한’이라는 개념을 결국 ‘나쁨’이라는 개념으로 이행하도록 만든다.
성직자 민족인 유대인, 이들은 자신의 적과 압제자에게 결국 오직 그들의 가치를 철저하게 전도시킴으로써, 즉 가장 정신적인 복수 행위로 명예회복을 할 줄 알았다. 유대인이야말로 두려움을 일으키는 정연한 논리로 귀족적 가치 등식(좋은=고귀한=강력한=아름다운=행복한=신의 사랑을 받는)을 역전하고자 감행했으며, 가장 깊은 증오(무력감의 증오)의 이빨을 갈며 이를 고집했던 것이다.
즉 가난한 자, 무력한 자, 비천한 자만이 오직 착한 자다. 고통 받는 자, 궁핍한 자, 병든 자, 추한 자 또한 유일하게 경건한 자이며 신에 귀의한 자이고, 오직 그들에게만 축복이 있다.
도덕에서의 노예 반란은 원한 자체가 창조적이 되고 가치를 낳게 될 때 시작된다. 노예 도덕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먼저 대립하는 어떤 세계와 외부 세계가 필요하다. 생리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이 일반적으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외부의 자극이 필요하다. 부정적인 개념인 ‘저급한’, ‘천한’, ‘나쁜’은 철저히 생명과 정열에 젖어 있는 고귀한 가치 평가 방식의 긍정적인 근본 개념인 ‘우리 고귀한 자, 우리 선한 자, 우리 아름다운 자, 우리 행복한 자!’에 비하면 늦게 태어난 창백한 대조 이미지일 뿐이다.
억압당한 자, 능욕당한 자가 무력감이라는 복수심에 불타는 간계에서 “우리는 악한 인간과 다른 존재가 되도록 하자.
즉 선한 존재가 되게 하자! 그리고 선한 인간이란 능욕하지 않는 자, 그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는 자, 공격하지 않는 자, 보복하지 않는 자, 복수를 신에게 맡기는 자, 우리처럼 자신을 숨긴 채 사는 자, 모든 악을 피하고 대체로 인생에서 요구하는 것이 적은 자, 즉 우리처럼 인내하는 자, 겸손한 자, 공정한 자이다”라고 스스로를 설득하지만, 이것은 본래, 냉정하게 선입견 없이 들었다고 하더라도, “우리 약자는 어차피 약하다. 우리는 우리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거니와, 이것은 좋은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
결론을 내려보자. ‘좋음과 나쁨’, ‘선과 악’이라는 두 개의 대립되는 가치는 이 지상에서 수천 년간 지속되는 무서운 싸움을 해왔던 것이다. 이 싸움의 상징은 ‘로마 대 유대, 유대 대 로마’를 의미하는 것이다. 로마는 유대인 가운데서 반(反)자연 자체와 같은 어떤 것, 마치 자신과 반대되는 괴물을 느꼈다. 로마에서 유대인은 ‘전 인류에 대한 증오의 죄를 지은 것’으로 여겨졌다. 로마인은 강자이며, 고귀한 자이다. 그들보다 강하고 고귀한 자는 지금까지 지상에 존재한 적이 없었으며, 결코 꿈꾸어 본 적도 없었다. 그들이 남겨놓은 모든 것, 하나하나의 비명(碑銘)은 만일 거기에 씌어진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면, 사람을 매혹시킨다. 반대로 유대인들은 저 탁월한 원한을 품은 성직자적 민족이며, 유례없는 민중 도덕의 천재성을 구유하고 있는 민족이다.
모든 이상의 대립 가운데 최대의 것인 저 대립이 영원히 해결되었는가? 아니면 단지 연기된 것일 뿐인가, 멀리 연기된 것인가? 나의 독자들처럼 여기서 숙고하고 지속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사람은 바로 이 문제의 결말을 내기 어려울 것이다. 최근의 내 저서에 적합하게 들어맞는 ‘선악의 저편’이라는 저 위험한 표제어를 내가 사용하고자 한다는 것, 즉 내가 원하는 것이 오래 전부터 충분히 밝혀졌다고 가정한다면, 내게는 결말을 지을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적어도 ‘좋음과 나쁨의 저편’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도덕 계보학(Genealogie der Moral)”에서 일부 요약 발췌,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좁쌀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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