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의 종류
행복은 완전한 덕을 따른 정신의 활동이다. 따라서 우리는 덕의 본성을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행복의 본성을 더욱 잘 알게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우리가 고찰해야 할 덕은 분명히 인간적인 덕이다. 우리가 찾고 있던 선도 인간적인 선이요, 우리가 찾고 있던 행복도 인간적인 행복이었으니 말이다. <인간적인 덕>이라는 말은 신체의 덕이 아니라 정신의 덕이라는 것을 의미하며, 이러한 덕은 여러 종류로 나뉜다. 즉 우리는 덕 가운데 어떤 것을 지적인 덕이라 부르며, 다른 어떤 것을 도덕적인 덕이라고 부른다. 철학적 지혜나 이해력이나 실제적 지혜는 지적인 덕이고, 관후라든가 절제는 도덕적인 덕이다. 지적인 덕은 대체로 교육에 의하여 생기기도 하고 성장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경험과 시간을 필요로 한다. 한편 도덕적인 덕은 습관의 결과로 생긴다. 어떤 사람의 성격에 관해서 말할 때 우리는 그가 현명하다거나 이해력을 가지고 있다고는 말하지 않고, 성품이 온화하다거나 절제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현명한 사람의 정신 상태에 관해서도 칭찬한다. 우리는 칭찬 받을 만한 정신 상태를 덕이라 부른다.
도덕적인 덕, 중용의 덕
도덕적인 덕은 그 어느 것이나 본성적으로 우리에게 생기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본성적으로 존재하는 것치고 그 본성에 반대되는 습관을 형성할 수 있는 것이란 하나도 없으니 말이다. 이것은 <에티케>(도덕적, 윤리적)라는 말이 <에토스>(습관)라는 말을 조금 고쳐서 만들어졌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그러고 보면, 도덕적인 덕들은 본성적으로 우리 속에 생기는 것도 아니요, 본성에 반하여 우리 속에 생기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본성적으로 그것들을 받아들이도록 되어 있으며, 또 그것들은 습관에 의하여 완전하게 되는 것이다. 도덕적인 덕은 인간이 그 고유한 기능을 잘 발휘할 수 있는 착한 습관을 통하여 먼저 실천함으로써 생긴다. 즉, 집을 지어봄으로써 건축가가 되고, 거문고를 탐으로써 거문고 타는 악사가 되는 것처럼 우리는 옳은 행위를 함으로써 옳게 되고, 절제 있는 행위를 함으로써 절제 있게 되며, 용감한 행위를 함으로써 용감하게 된다. 성품은 제 각각 거기에 대응하는 활동에서 생기는 것으로서 행위가 성품을 결정하는 까닭에 우리는 옳은 규칙에 따라서 행위하여야 한다.
사람들이 나쁘게 되는 것은 쾌락과 고통 때문이다. 즉 이것들을 추구하고 회피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추구하거나 회피해서는 안 되는 쾌락이나 고통을 추구하거나 회피하며, 혹은 추구와 회피의 때를 잘못 잡고, 혹은 그릇된 방법으로 추구 내지 회피하고, 혹은 이 밖에 이와 비슷한 잘못을 저지르기 때문이다. 윤리적인 덕은 이러한 쾌락과 고통에 관하여 최선의 행위를 하기 마련이고 악덕은 이와 반대이다. 이러한 이유로 덕과 정치학의 온 관심사는 쾌락과 고통이다. 이것들을 잘 처리하는 사람은 선한 사람이 될 것이고, 잘못 처리하는 사람은 악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덕은 쾌락과 고통에 관계되고, 그것을 생겨나게 하는 행위에 의하여 덕은 조장되고 그렇지 않은 행위에 의하여 상실되며, 그리고 그것을 생겨나게 한 행위는 덕이 그 속에서 스스로 활동하는 행위이다.
무릇 덕이란 그것을 가지고 있는 것을 좋은 상태에 이르게 하고 또 기능을 잘 발휘시켜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의 덕은 인간을 선하게 하며 그 자신의 일을 잘하게 하는 성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덕은 중간을 목표로 삼는 성질을 가져야 한다. 마땅한 때에, 마땅한 일에 대하여, 마땅한 사람들에게 대하여, 마땅한 동기로, 그리고 마땅한 태도로 쾌락과 고통을 느끼는 것은 중간적이며 동시에 최선의 일이요, 또 이것이 덕의 특색이다. 과도와 부족은 일종의 실패인 데 반하여 중간은 칭찬받는 것이요, 일종의 성공이다. 그리고 칭찬받는 것과 성공한다는 것은 둘 다 덕의 특징이다. 그러므로 덕은 일종의 중용(中庸)이다. 그것은 두 악덕, 즉 과도로 말미암는 악덕과 부족으로 말미암는 악덕 사이의 중용이다. 덕은 그 본체에 있어서나 그 본질을 밝히는 정의에 있어서 하나의 중용이요, 최선이라든가 옳다고 하는 점에서는 정점을 이루는 것이다. 이러한 중용으로서의 도덕적인 덕에는 용기, 절제, 관후, 긍지, 정의 등이 있다.
<용기>는 비겁과 무모함의 중용이요, <절제>는 금욕과 방종의 중용, <관후함>은 인색과 낭비의 중용, <긍지>는 비굴과 오만의 중용이다. <온화>는 성마름과 성질없음의 중용이요, <진실함>은 허풍과 거짓겸손의 중용이다.
용기
용기(勇氣)란 태연한 생각이나 공포심을 일으키는 것들에 관하여 취하는 중용이다. 즉, 두려워할 만한 것을 당연한 동기에서 당연한 모양으로 당연한 때에 두려워하고, 또 태연한 마음을 가지는 일도 이와 같이 하는 사람이 용감한 사람이다. 용감한 사람은 인간으로서 가능한 만큼 겁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는 초인간적인 것이 못 되는 일을 두려워하는 수도 있지만, 이런 일을 당하여도 그의 태도는 어엿하고 순리를 따르며 명예를 위주로 한다. 빈곤이나 사랑이나 이 밖에 무엇이든지 고통스러운 것을 피하기 위하여 죽는 것은 용감한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 오히려 겁쟁이가 하는 짓이다. 골치 아픈 일로부터 도피하는 것은 마음이 약한 탓이요, 이런 사람이 죽음에 나아가는 것은 그것이 고귀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해악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서이다.
절제
절제(節制)는 쾌락에 관한 중용이다. 쾌락은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으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정신적 쾌락이란 명예를 좋아하는 것, 혹은 학문을 좋아하는 것 따위이다.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이나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기쁨을 느끼지만 이 기쁨은 육체와는 아무 상관이 없고 다만 정신만이 맛보는 것이다. 이러한 쾌락(정신적인 쾌락)에 관계하는 사람은 절제 있는 사람이라고도 방탕한 사람이라고도 불리지 않는다. 즉, 절제는 육체적 쾌락에만 관계하는 것인데, 그중에서도 촉각에서 오는 실제적 향락, 즉 음식물이나 성교 같은 향락에 대한 것이다. 절제에 대한 과도인 방종은 쾌락에 의하여 생기고, 부족인 비겁은 고통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인데, 쾌락은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고 고통은 우리가 피하는 것이기 때문에 방종이 비겁보다 더 유의적이다.
관후
관후(寬厚)는 재물에 관해서의 중용이다. 관후한 사람이 칭찬을 받는 것은 군사적인 일에 있어서도 아니고, 절제 있는 일에 있어서도 아니며, 또 판단을 잘함으로써도 아니라, 재물을 주고받는 일, 특히 주는 일에 있어서이다. 그리고 방탕과 인색은 재물에 관해서의 과도와 부족이다. 방탕은 취하는 일에 있어서가 아니라 주는 일에 있어서 과도하고 취하는 데 있어서 부족한 반면, 인색은 작은 일에서 예외는 있지만, 대체로 주는 일에 있어서 부족하고 취하는 데 있어서는 과도하다. 관후한 사람은 취해서는 안 될 데에서는 취하지 않으며, 걸핏하면 청하는 따위의 일을 하지 않는다. 그는 취할 만한 데, 즉 자기 자신의 소유물 가운데서 취하는 것이다. 그가 이와 같이 자기 자신의 소유물 가운데서 취하는 것은 취하는 일 자체가 고귀한 일이어서가 아니라, 남에게 줄 수 있기 위하여 부득이 하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소유물로써 남을 돕고자 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소유물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긍지
긍지(矜持) 있는 사람이란 자기 자신을 큰일에 합당하다고 생각하며, 또 사실 그러한 사람이다. 자기의 가치 이상으로 자기 자신을 생각하는 자는 어리석은 사람이지만, 자기의 덕에 의거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자는 어리석은 사람도 아니요, 이성이 없는 사람도 아니다. 작은 일에 합당하고 또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절제 있는 사람이기는 해도 긍지 있는 사람은 못된다. 긍지에는 큰 것이라 할까 위대성이라 할 것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긍지 있는 사람이 관심을 두는 것은 주로 명예이다. 긍지가 그만 못한 사람은 비굴하고, 그보다 지나친 사람은 허오(噓傲)한데, 이 양자도 악한 사람은 아니고(악의를 품고 있는 것은 아니므로), 다만 생각이 잘못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허오보다는 비굴이 긍지에 더 반대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비굴이 더 흔하고 더 좋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정의
정의(正義)란 사람들로 하여금 옳은 일을 하게하며, 옳은 태도로 행동하게 하며, 또 옳은 것을 원하게 하는 성품이다. 정의는 완전한 덕이다. 그러나 그것은 무조건적으로는 아니고, 우리의 이웃에 대한 관계에서만 그렇다. 그리하여 정의는 가끔 모든 덕 가운데 가장 큰 덕이라 생각된다. 정의는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그 덕을 자기 자신 속에서만 아니라 또한 자기의 이웃 사람에 대해서도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충만한 의미에 있어서의 완전한 덕이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모든 덕 가운데 정의만은 <타인의 선(善)>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그러므로 최악의 사람이란 자기의 사악함을 자기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자기의 친구들에게도 미치는 사람이요, 최선의 사람이란 자기의 덕을 자기 자신에게 미치는 자가 아니라 타인에게 미치는 사람이다. 이러한 정의는 그 연원, 적용범위 등에 따라 자연적 정의, 정치적 정의, 법적 정의, 일반적 정의, 분배적 정의, 시정적 정의(차등을 통한 분배의 균형을 추구), 호혜적 정의, 형평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지적인 덕
앞서 말한바와 같이 정신의 덕은 도덕적인 덕과 지적인 덕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중 도덕적인 덕은 선택에 관계된 성품의 상태이고, 선택이란 숙고한 욕구이므로 좋은 선택을 하려면 이치도 옳아야 하지만 욕구도 바른 것이어야만 한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지능과 진리는 실천적인 성질의 것이다. 실천적이거나 제작적인 것이 아니라, 다만 관조적인 성질의 지능에서는 좋은 상태는 진리이고, 나쁜 상태는 거짓이다(이것이 결국 모든 사유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므로). 한편, 실천적이고 사유적인 부분에서, 좋은 상태란 올바른 욕구와 일치하는 진리이다. 행위의 단초는 선택이고, 선택의 단초는 욕구와 목적적 이치이다. 그러므로 이성과 사유가 없거나, 또는 윤리적인 성품이 없다면 선택은 있을 수 없다. 한편 도덕적인 덕은 습관의 결과로 생기지만, 지적인 덕은 대체로 교육에 의하여 발생도 하고 성장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경험과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지적인 덕에는 기술, 학적 인식, 실천지, 지혜, 이성이 있다.
지적인 덕의 의미 :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지적인 덕이란 무엇일까?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지적인 덕은 꾸준한 가르침과 성찰에 의해 얻을 수 있는 지식 같은 것이다. 지적인 덕은 성찰의 대상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예를 들어 자기 집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일에 대비하고 배려하는 ‘사려’일 수도 있고, 국가를 다스리기 위해 ‘경륜’(포부를 가지고 어떤 일을 조직적으로 계획함)하는 것일 수도 있다. 또한 자연과 우주의 근본 원리를 ‘사색’하는 것일 수도 있다.
성찰의 대상이 크면 클수록 거기에 따른 지적인 덕의 정도도 더욱 크고 훌륭해진다. 만일 누군가가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계획을 세웠다면, 그 사람은 계획을 세우는 것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다스리는 수단을 만드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곧 사려나 경륜 같은 실천적 지식은 어떤 다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적 지식으로, 유용성으로서의 지식, 기술로서의 지식에 불과하다. 여기에 비해 자연이나 우주의 근본 원리를 연구하는 것 같은 순수한 사색으로서의 지식은 그 자체가 목적일 뿐, 그밖에 어떤 다른 목적도 지니고 있지 않다. 예를 들어 우주의 신비를 벗기기 위해 애쓰는 천문학자가 있다고 하자. 그는 천문학 지식을 통해 무언가 다른 목적을 이루려 하기보다는 앎 그 자체를 추구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 천문학자는 순수한 사색적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장 탁월한 지적인 덕을 갖춘 바로 이런 것이라고 보았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가 실천적 지식을 낮춰 보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실천적인 지식 없이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다." 즉 그는 실천적인 지식은 순수한 사색적 지식에는 못 미치지만,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될 지식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지적인 덕을 논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도덕적으로 올바른 삶에 또는 도덕적인 규범에 대해서만 논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한 조건, 더 나아가 인간이 삶에서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를 논하였다고 할 수 있다.
기술
기술이란 참된 이치를 따라 제작할 수 있는 상태와 같은 것이다. 모든 기술은 생성에 관계한다. 즉 그것은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그리고 그 단초가 제작에 있고 제작되는 물건에 있지도 않는 것들>을 어떻게 하면 만들 수 있는가 궁리하고 살피는 데 관심을 둔다. 기술은 <참된 이치를 따라 제작할 수 있는 상태>요, 이와 반대로 기술이 없는 것은 <그릇된 이치를 따라 제작할 수 있는 상태>이다.
학적 인식
학적(學的)으로 인식되는 것은 <다른 식으로도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다른 방식으로도 존재하는 것이 가능한 것>들에 관해서는, 그것들이 우리의 관찰 범위 밖에서 일어난 경우에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지 존재하지 않은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학적 인식의 대상은 필연적이며 따라서 영원한 것이다. 한편 모든 학적 인식은 가르쳐질 수 있는 것이요, 그 대상은 배워서 알 수 있다고 생각된다. 어떤 사람이 일정한 방식으로 확신을 가지고 있고 또 모든 근본 전제가 분명히 그에게 인식되어 있을 때 그는 학적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실천지
실천지(實踐知)를 가진 사람의 특징은 <자기 자신에게 유익하고 좋은 것에 관해서 잘 살필 수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더욱이 그것은 어떤 특수한 점에서, 가령 어떤 것이 건강과 체력에 유익한가 하는 것 따위의 것들에 관해서가 아니라, 전체적으로 좋은 생활에 유익한 것이 무엇인가에 관해서 훌륭하게 살피고 생각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실천지란 <인간적인 선에 관해서 참된 이치를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실천지는 그 자체가 탁월성을 내포하기 때문에 탁월성의 우위가 존재하는 기술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실천지는 일종의 덕이지 기술이 아닌 것이다.
지혜
지혜(智慧)는 모든 학적 인식 가운데 가장 완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지자(知者)는 근본 명제들로부터 도출된 것을 알 뿐 아니라, 또 근본 전제들 자체에 관한 진리를 파악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지혜는 이성과 학적 인식이 합쳐진 것이요, 가장 고귀한 일들에 관해서 소위 머리가 되는 학적 인식이다. 지혜는 최고의 것을 지향하고 있는 최고의 덕으로 간주되며, 실천지보다 우월하다.
이성
모든 학문을 성립시키는 근본 명제는 지각하는 능력이며, 이는 학적 인식이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기술이나 실천지가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더욱 더 분명하다. 이러한 근본 명제 자체에 전적으로 관계하는 것이 이성(理性)이다. 즉, 우리로 하여금 <다른 방식으로 있을 수 없는 것들> 혹은 심지어 <다른 방식으로 있을 수 있는 것들>에 관해서 진리를 얻게 하며, 절대로 잘못 생각하지 않게 하는 것이 학적 인식, 실천지, 지혜 및 이성이라고 하면, 이 중 실천지, 학적 인식, 지혜는 그 어느 것이나 그런 것일 수 없으므로, 결국 근본 명제들을 파악하는 것은 이성뿐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Ethica Nicomachea)”에서 극히 일부요약 발췌,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주름잎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