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 결혼
청교도들은 성의 쾌락을 피하자고 결심했기 때문에 식사의 쾌락을 옛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게 의식하게 된 것 같다. 17세기에 어떤 사람은 청교도주의를 이렇게 비판했다.
그대, 즐거운 밤과 유쾌한 만찬을 원하는가
그렇다면 성인들과 같은 식탁에 앉고
죄인들과 한 침대를 써라
결국 청교도들은 인간의 본성 가운데 순수하게 육체적인 부분을 억제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던 것 같다. 마치 성에서 떼어낸 혹을 탐식에다가 붙여놓은 꼴이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탐식을 일곱 가지 죄(나머지 여섯 가지는 교만, 탐욕, 정욕, 질투, 나태, 분노이다 - 옮긴이) 가운데 하나라고 여긴다. 단테는 탐식하는 사람은 지옥 가운데에서도 상당히 깊은 곳에 떨어진다고 말했다. 그러나 탐식은 다소 막연한 죄악이다. 음식에 대한 적절한 관심은 어디까지이며, 탐식의 죄악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 단정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영양가 없는 음식을 먹는 것은 나쁜 짓인가? 만일 그렇다면 짭짤한 아몬드를 먹을 때마다 우리는 지옥에 떨어질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결혼과 도덕」
인습적인 교육을 받은 남녀 가운데는 성과 결혼에 대해 호감을 느끼는 사람이 드물다. 그들은 부모와 교사가 기만과 거짓을 미덕으로 여긴다는 사실을 배운다. 그들은 또한 결혼한 사이라고 해도 성 관계에는 어느 정도 혐오스러운 요소가 있고, 종족을 번식할 때 남성은 동물적인 본성에 굴복하고 여성은 고통스러운 의무를 감수한다는 것을 배운다. 이런 태도로 인해서 결혼은 남성에게나 여성에게 불만족스러운 것이 되고, 충족되지 못한 본능은 도덕의 가면을 쓴 잔혹함으로 변질된다. -「결혼과 도덕」
적절한 조건이 제공된다면 대부분의 남성과 여성은 생애의 일정 시기에 열정적인 사랑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경험이 없는 사람이 열정적인 사랑과 단순한 매력을 구분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사랑하지 않는 남자에게는 키스를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날 리 없다고 교육을 받아온 양갓집 처녀들이라면 특히 그럴 것이다. 어떤 여성이 결혼할 때까지 동정을 유지해야 하는 경우 그 여성은 일시적으로 사소한 성적 매력의 덫에 걸리는 경우가 많다. 성적 경험이 있는 여성이라면 그것과 사랑을 쉽사리 구분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이로 인해 불행한 결혼이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도 어느 한 쪽이 사랑을 죄악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생각은 사랑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물론 그런 생각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을 수 있다. 예컨대 파넬(아일랜드 독립운동을 이끈 민족주의자로 1890년에 유부녀와의 오랜 불륜이 발각되어 많은 추종자들이 등을 돌렸다 - 옮긴이)은 간통을 저지름으로써 아일랜드의 희망이 실현되는 것을 여러 해 늦추었다는 점에서 큰 죄를 지었다. -「결혼과 도덕」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에서 극히일부 요약발췌, 버트런드 러셀 지음, 비아북, 엮은이 로버트 E. 에그너, 역자 이순희님 >
▣ 저자 버트런드 러셀
러셀은 제1, 2차 세계대전, 나치의 유대인 대량 학살, 냉전 이데올로기, 히로시마 원폭 투하, 한국전쟁 등 역사의 비극적 사건들을 목격했다. 탐욕이 부른 참상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실천하며 인류의 자연스러운 진보를 가로막는 지배적 권위, 우상 숭배, 인습 등의 실체를 폭로하고 저항했다. 권력에 의해 비틀린 진실에 맞서 과학적 탐구 결과 발견한 자신의 진실과 사회적 진실을 융합하기 위해 투쟁했다. 인류의 행복한 삶을 고민하고, 부조리한 사회문제를 비판하는 글과 방송을 통해 정의와 진실을 부르짖고 대중에게 행동할 것을 호소했다.
1872년 영국 웨일스 출생. 케임브리지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수학과 도덕과학을 공부했다. 화이트헤드와의 공저 『수학의 원리』를 출간하여 19세기 기호논리학와 분석철학의 기초를 세웠다. 1949년 영국 국왕 조지 6세가 하사하는 메리트 훈장을 수상했고, 1950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1960년 덴마크 정부에서 받은 소닝 상을 비롯해서 수많은 상을 받았다. 20세기 최고의 사상가, 철학자, 수학자, 교육 혁신가이자 실험가, 지성과 사회와 성해방의 옹호자, 평화와 시민권과 인권을 부르짖은 운동가로서 열정적 삶을 추구하다 1970년 2월, 웨일스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