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이기주의자가 되기 위하여 자신에게 붙어 있는 꼬리표를 뗀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표현하는가? 이 두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내가 여태껏 살아온 삶을 뒤돌아봐야 할 것이다. 인간은 분명 과거에 매어 있으며 거기서 빠져나오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설명할 때 어떤 말을 써서 표현하고 있는지 한번 들어보자. 남들의 시시껄렁한 평판들을 차곡차곡 모아놓았다가 그대로 표현하지는 않는가? 자신을 표현하는 말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런 용어들이 해로운 방식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아서 문제다. 꼬리표를 붙이는 그 행위 자체가 어떤 식으로든 나의 성장을 방해한다. 현상유지의 수단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자신이 정말로 마음에 드는 꼬리표라면 그것으로 됐다. 그러나 자신이 붙인 이런저런 꼬리표가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간혹 있다고 시인하는 사람이라면 지금이 바로 변화를 가져볼 때다.
어떤 종류의 활동을 피하고 싶거나 성격상의 결함을 덮어버리고 싶을 때면 으레 꼬리표로 자신을 정당화한다. 분명 자신을 변화시키기보다 꼬리표를 붙이는 편이 훨씬 손쉬운 일이다. 어쩌면 부모나 선생님, 이웃, 조부모 등 어렸을 적 자기에게 영향력 있었던 어른들 때문에 그런 꼬리표를 붙이게 됐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재 사용하고 있는 꼬리표에 대한 책임을 그들에게 묻게 되면 자신의 현재 생활에 대한 통제권도 그들에게 어느 정도 넘겨주게 된다. 그들을 자신보다 훨씬 높은 위치로 끌어올리고 자신은 무력한 상태에 머물러 있기 위한 알리바이를 교묘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실 별것도 아닌 시시껄렁한 보상이다. 어떤 위험도 감수하지 않게 해주는 보증서를 제공받는 정도라고나 할까. 만일 꼬리표를 사용하는 것이 ‘문화’ 탓이라고 생각한다면 자신을 손쓸 도리가 없을 테니까.
우리의 꼬리표들은 모두 후천적으로 몸에 밴 회피 방식이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 ‘타고난 본성’ 같은 것은 없다. 그 말 자체는 사람들을 멋대로 분류하고 구실을 만들어내기 위한 것이다. 나는 내 선택의 총화이며 내가 간직한 꼬리표들은 모두 ‘지금까지는 그랬지’라는 새 꼬리표로 바꿀 수 있다. 이 장 첫머리에서 던졌던 질문으로 되돌아가 보자.
“나는 누구인가? 나는 나 자신을 어떤 말로 표현하는가?”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신해 붙인 꼬리표나 내가 스스로 붙이고 다닌 꼬리표와 전혀 관련 없는 참신하고 멋스러운 꼬리표를 생각해 보라. 하도 써서 닳고닳은 넌더리나는 꼬리표들 때문에 인생을 알차게 살지 못해서야 되겠는가. 나의 성장을 방해하는 꼬리표들은 몰아내야 할 악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라도 그런 꼬리표를 달아야겠거든 이런 꼬리표는 어떤가.
“나는 꼬리표를 떼는 사람이다.” 정말이지 마음에 쏙 드는 꼬리표 아닌가.
<“행복한 이기주의자”에서 극히 일부요약 발췌, 웨인 W. 다이어 지음, 21세기북스 >
<서양민들레, 유럽에서는 잎을 샐러드로 먹고, 뉴질랜드에서는 뿌리를 커피 대용으로 사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