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제가 알기에, 선생께서는 세계화윤리의 기초로서 문명의 대화는 공동의 가치를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지요. 이와 동시에 공동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문명의 대화를 전개하기 위한 전제라고까지 하셨습니다.
(답) 지금은 어느 문명에 속하든 간에 다른 문명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예컨대 아무리 기독교 문명에 속한 사람이라 해도, 힌두 문명이나 이슬람 문명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미래의 기독교 문명의 발전에 어려움이 생기게 되지요. 마찬가지로 유교 문명에 속한 사람들도 다른 문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유교 문명 자체를 한 걸음 더 발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그만큼 줄어듭니다. 불교 문명도 마찬가지지요. 과거에 여러 기축시대 문명이 조성해놓은 영향은 이제 새로운 시대로 진입했고, 각종 문명은 하나의 융화 과정을 거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과거는 이미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지요. 문명의 대화를 통해 우리는 최대한 타자의 독특한 특성을 감상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앞으로 우리와 타자와 타문명이 융화되어 이루어진 절묘한 다양성을 이해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인식을 더욱 풍부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대화는 우리에게 모든 사람들을 진정으로 포용할 수 있는 공동체를 실현할 수 있는 힘을 줄 것입니다.
(문) 선생께서는 문명의 대화에 일정한 전제조건이 필요하다고 확신하시는 것 같습니다. 또한 선생께서는 대화란 ‘온 마음을 기울여 만들어내는 일종의 예술’이라고 하셨는데 저는 이러한 견해가 매우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시겠습니까?
(답) 어떤 방식으로 친구를 사귀든 간에 처음 그를 만나면 그저 만화처럼 그 사람의 얼굴을 아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얼굴만 아는 걸 가지고 그를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순 없겠지요. 그를 제대로 알기 위해선 서로 간의 대화, 그것도 아주 오랜 시간에 걸친 교류를 거쳐야 할 겁니다. 한두 번 가지고는 안 되지요. 또한 그 사람이 이해되기를 원치 않을 때, 저는 그와의 대화를 원하지만 그가 저와의 대화를 원하지 않을 때 제가 그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 역시 불가능할 겁니다. 반드시 대화가 이루어져야 하고, 그것도 쌍방이 동의한 대화여야 서서히 친구가 될 수 있을 겁니다. 또 한 가지 상황이 가능할 겁니다. 가령 저와 친구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제가 그를 사귀는 목적이 그를 이용하기 위한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이런 교류는 유지되지 못할 것입니다. 이는 대단히 어려운 과정인데 문명의 대화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친구가 되는 게 일생에 걸쳐 이루어지는 일이라면, 문명과 문명의 대화는 종종 수백 년이 걸리는 일입니다.
(문) 선생께서 대화는 상대를 설복하거나 제압하는 기교가 아니라 상대의 의견을 경청하는 방식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이 생각나는군요.
(답) 그렇습니다. 가령 진리가 제게 있고 저는 진리를 대표하는 목소리이며 상대방이 제 견해를 수용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태도를 가지고는 모순과 충돌을 피할 도리가 없습니다. 대화란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말해서 자기반성의 능력을 증가시키는 동시에 남을 이해하고, 이런 이해를 통해 자신의 시야를 확대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대화의 목적이지요. 다시 말해서 스스로 ‘배우는 마음(學心)’을 갖는 것입니다. 대화란 상대방의 가치를 이해하고 이를 함께 누림으로써 상호이해와 공동창조의 새로운 삶의 의미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만일 타자가 추구하는 의식세계를 억압하고 경청과 학습의 필요성을 강요한다면 대화는 곤경에 빠지고 말 겁니다.
(문) 선생께서 제시하신, 정보화시대에 지혜를 얻는 세 가지 중요한 방법이 매우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군요. 첫째는 경청의 예술, 둘째는 얼굴을 마주하고 교류하는 것, 그리고 셋째는 선인들의 지혜를 중시하는 것이라 요약할 수 있겠지요.
(답) 그 가운데 경청의 예술이 가장 어렵습니다. 젊은 세대는 인내심있게 경청하는 태도가 부족해서 다른 사람의 말이 쉽게 들리지 않습니다. 빠른 시간에 많은 정보를 장악하려 하기 때문이지요. 정보는 빨리 장악할 수 있겠지만 지혜는 인내심있는 경청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경청하는 데는 단계가 있지요. 『논어』에서는 “예순이 되어야 남의 말을 들어도 거슬리지 않는다(六十而耳順)”고 했습니다. 이전에는 사람들이 그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해 ‘이(耳)’자를 떼어버리고 “예순이 되면 거슬림이 없다(六十而順)”는 말로 이해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사실 ‘이(耳)’자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얼굴을 마주하는 교류도, 경험으로 아는 바(體知)가 없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이지요.<“문명들의 대화”에서 극히 일부 발췌, 뚜웨이밍 지음, 휴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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