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자료

행복은 그냥 찾아오지 않는다!

[중산] 2011. 9. 23. 21:08

행복幸福!

우리 인생에서 최고의 로고이자 구호이자 외침이다. 다들 소리 없이 그러나 끈질기게 마음으로 갈구한다. 그래서 행복은 우리 삶의 지표가 된다. 최고의 그리고 지상至上의 목표가 된다. 무엇 때문에 사느냐? 그 물음에 정해져 있는 가장 큰 답은 행복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산다.

 

복 받아라!”, 행복하여라!” 이 말들은 다른 사람에게 하는 인사말에 그치지 않는다. 말하는 사람 자신이 스스로 다짐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것은 말하는 사람 자신을 위한 기도와도 같고 또 축원祝願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복 받았다, 그 기쁨의 외마디에 땡 잡았다, 그 환호의 외침은 합창처럼 함께 메아리치게 되어 있다.

이런 저런 사연으로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바란다. 아니, 갈망한다. 그것은 시대가 달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고려시대 사람들은 이런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덕이란 배 고물에 바치옵고

복이란 배 이물에 바치오니

덕이며 복이며 나아오소이다.

여기에서 고려가요 동동곰배림배를 배의 뒷전인 고물과 앞전인 이물로 옮겨보았다. 배에 초점을 맞추면 ‘이 뒷전인 고물이 되고 이 앞전인 이물이 되지만 그렇게 까다롭게 따질 것 없이 그냥 이라는 말로 옮겨놓아도 괜찮을 것이다. 그러면 다음과 같이 옮겨질 것이다.

 

덕은 뒤에 바치옵고

복은 앞에 바치오니

덕이며 복이며 나아오소이다.

그 축복받을 배가 우리를 향해 푸른 물살을 가르고 바람결을 저으며 달려오고 있다. 그것이 가르며 나아가는 강물도 덕과 복으로 파랗게 출렁대고 있다. 큰 배에 하나 가득 실은 것이라고는 그저 덕이고 복이다. 이제 곧 물가에 닻을 내리며 우리에게 덕이니 복이니 하는 것을 한 짐 가득 풀어놓을 것이다. 그 짐을 받아들인 우리의 안방은 덕복방이 되고 복덕방이 될 것이다.

 

행복의 행은?

그런데 행복幸福이란 글자는 보다시피 행과 복이 짝을 이룬 것이다. 그러니 행복이 무엇이냐고 묻기 전에 행과 복이 무엇인지부터 묻지 않을 수 없다. 행倖은 옥편에서는 다행 행으로 표기한다. ‘요행 행이라고 읽을 수도 있다. 늦가을 감나무 밑에서 낮잠 자는 사람의 입으로 잘 익은 홍시가 떨어진다면 그것은 진짜 요행이다.

그런가 하면 면흉免凶이라고 해서 흉측한 일을 뜻하지 않게 면하거나 피하는 것도 행이라고 한다. 누군가 비가 사납게 쏟아지는 산길을 간다고 치자. 그가 심하게 경사진 비탈 아래를 지나는데 느닷없이 바위가 굴러 떨어진다. 다행히도 바위는 불과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 내리박힌다. 하마터면 그는 바위에 깔릴 뻔했다. 그렇다. 이같이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벗어나는 것, 그것이 이를테면 행幸이다.

 

요행은 한자로는 보통 僥倖이나 僥幸이라고 쓴다. 요僥요행요라고 읽으니 행과 이른바 이음동의어, 즉 소리는 다르고 뜻은 같은 글자이다. 그런데 행幸에 사람 인 자를 붙인 행은 원래 행과 뜻이 같지만 굳이 둘을 구분할 때는 우연히 뜻하지 않게 얻는 행을 행이라고 쓴다. 그래서 행倖뜻하지 않는 행이라고도 읽게 된다. 흔히 쓰는 ‘요행수僥倖數’란 말을 우연히 덕을 본 것, 뭔가 생각지도 않게 좋은 것을 얻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바로 행倖이다. 그렇게 행幸과 행이 서로 오락가락하는 것을 보게 되면 사람들은 행복을 두고도 같은 생각을 했을 것 같다.

 

그런데 행바랄 행이나 사랑할 행으로도 쓰인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사람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것이 행복이란 의미일 것이다. 간절한 소망, 애틋한 사랑, 그것이 바로 행이고 행복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행幸자가 붙은 말을 좋아하고 앞서 소개한 것 외에도 행운幸運, 다행多幸, 천행天幸등과 나란히 행복이란 말을 즐겨 쓴다. 행운이니 다행이니 천행이니 하는 말에는 요행의 뜻도 있다.

 

그러나 행복에는 요행의 뜻이 포함되지 말아야 한다. 하긴 요행의 행복을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다. 흔히 쓰이는 말처럼 ‘굴러 들어온 복을 구태여 차낼 것은 없다. 두 손 들고 환영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굴러 들어오는 요행의 행복만을 멍청히 손가락 빨며 기다릴 수는 없다. 멀뚱멀뚱 기다린다고 해서 반기는 얼굴로 찾아들 행복이 아닐 테니까. 그런 행복이 있다 해도 아주 드물어서 있으나 마나일 테니까. 행복은 요행이 아니라 필연이어야 한다. 마땅히 얻을 것을 얻는 것이어야 한다.

<“행복”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김열규 지음, 비아북>

 

저자 김열규

1932년 경남 고성 출생으로 서울대학교 국문학과를 거쳐 동대학원에서 국문학 및 민속학을 전공했다. 서강대학교 국문학 교수, 하버드대학교 옌칭연구소 객원교수를 거쳐 현재 서강대학교 명예교수로 재직중이다. ‘한국학의 석학이자 지식의 거장인 그의 반백 년 연구인생의 중심은 한국인이다. 문학과 미학, 신화와 역사를 두루 섭렵한 그는 한국인의 목숨부지에 대한 원형과 궤적을 찾아다녔다. 특히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한국인의 자서전을 통해 한국인의 죽음론과 인생론을 완성했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지은 책으로 『독서, 공부, 한국인의 자서전,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 한국인의 화, 한국인의 신화, 한국의 문화코드 열다섯 가지, 고독한 호모디지털, 기호로 읽는 한국 문화 외 다수가 있다.

 

 

 

                                                              바 위 떡 풀 ;어린 순은 식용하고 식물체는 중이염에 약용한다. 잎 표면에 털이 약간 있는 것은 지리산바위떡풀,

                                                                  잎자루에 털이 많은 것을 털바위떡풀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