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적 행복의 극치_ 달관과 체관, 그리고 행복
죽기 살기로 땀 흘려서 얻는 행복이 있는가 하면 모든 것을 놓아버림으로써, 아니 모든 것을 편안히 품음으로써 얻는 행복도 있다. 전자의 행복이 서양인의 행복이라면 후자의 행복은 동양인의 행복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동양인의 행복은 달관과 체관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경지를 설명하기란 그리 녹록지 않다. 우선 우리의 마음부터 들여다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평가할 때 우리는 흔히 ‘마음이 좁다’거나 ‘마음이 넓다’는 말을 쓴다. 마음 대신 품을 써도 마찬가지이다. 마음이 좁으면 스스로 고생한다. 품이 좁으면 스스로 외돌아진다. 마음을 열면 소망이 이루어진다. 소견이 짧으면 세상이 비좁아진다. 소견머리가 트이면 온 세상이 환해진다. 그래서 품이 좁고 소견이 궁색하면 스스로 행복을 해친다. 성깔이 모나면 스스로 복을 내친다. 반대로 도량이 크고 넓으면 복이 지레 알아서 찾아든다.
도량度量의 도度는 길이를 재는 자를 의미한다. 이와는 달리 량量은 양을 재는 되를 가리킨다. 그런데 도량은 사람의 마음을 두고도 사용된다. 생각의 길이가 길고 마음의 부피가 크면 ‘도량이 넓다’고 한다. 도량이 넓으면 사소한 일에 매이지 않는다. 웬만한 일에는 동요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심중을 이해할 줄 알고 타인의 잘못을 용서하게 된다. 그럴 때 ‘국량局量이 크다’고도 말한다. 국局은 ‘재간 국’이라고 읽는다. 그런데 이 경우 재간才幹을 재주나 꾀로만 여겨서는 안된다. 남을 헤아리는 넓은 마음의 씀씀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도량이나 국량 대신 아량雅量이란 말을 쓸 수도 있다.
이렇게 큰 아량이나 깊은 국량과 견주어서 쓸 수 있는 말로 달관達觀과 체관諦觀이 있다. 여기서 달관의 달澾은 ‘통달’이나 ‘달성’의 달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달통達通의 달과도 통해 있고 달견達見의 달과도 통해 있다. 그래서 달관은 사리에 밝은 뛰어난 식견으로 널리 보고 크게 살핀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외통수로 고집을 부리지 않고 편견을 얽매이지 않음도 의미한다. 무엇이든 한 가지 관점에 사로잡히는 대신 아량을 가지고 넓고 멀리 보는 것이 곧 달관이다.
체관의 체諦는 단념한다는 뜻을 지닌 ‘체념’의 체이다. 무슨 일을 하다가 잘 풀리지 않을 때 나 몰라라 내던지는 것이 체념이다. 체는 원래 ‘살필 체’이고 ‘자상하게 알 체’이고 ‘이치 체’이다. 그러니까 어떤 사물이나 현상의 이치를 자상하게 살피고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것이 다름 아닌 체이다. 그래서 달관과 거의 같은 뜻의 말이 된다.
누군가 무엇에든 달관하고 체관하면 그것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것 때문에 갈팡질팡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마음의 여유를 누리게 된다. 편견에서 벗어나 고집을 부리지 않는다. 무엇이든 마음 편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해가 비치면 해그림자 짓고, 달이 뜨면 달그림자 짓고, 바람이 불면 바람 따라 설레는 널따란 호수 같은 마음이 되는 것이 달관이다. 이에 이르면 진정 복된 마음의 경지가 열릴 것이다. 그렇게 달관하는 사람은 인생의 어느 고비에나 마음이 편하다. 그의 마음은 봄날의 숲 속 같고 가을날의 맑은 하늘 같을 것이다. 잔잔한 행복감, 나긋한 행복감에 다소곳하게 마음을 맡기게 될 것이다.
<“행복”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김열규 지음, 비아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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