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의미
삶의 의미는 무엇이고, 나는 왜 살아가는 것일까? 모든 사람은 이 질문에 나름의 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평생을 흐리멍텅하게 살다 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리더라면 이 질문에 대한 더욱 명확한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어리석은 형국을 면할 수 있다. 노자는 『도덕경』제16장에서 다음과 같이 자연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냈다.
마음을 완전히 비우고 고요함을 독실하게 지켜라. 만물이 함께 자라남에 나는 그 돌아감을 살펴본다. 만물은 무성해지고 나면 각각 다시 그 뿌리로 돌아간다. 뿌리로 돌아간 것을 고요함이라 하고, 이것을 일러 천명으로 돌아간다고 하고, 천명으로 돌아가는 것을 상(常)이라고 하며, 상을 아는 것을 명(明)이라고 한다. 상을 모르면 망령되게 흉한 짓을 저지르게 된다. 상을 알면 용납하게 되고, 용납하게 되면 공평해지고, 공평해지면 왕이 되고, 왕이 되면 하늘과 같게 되고, 하늘과 같게 되면 곧 도를 얻게 되며, 도를 얻으면 오래 갈 수 있으므로 죽을 때까지 위태로운 일을 당하지 않는다.
노자는 『도덕경』제51장에서 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도는 만물을 낳고 덕으로 기른다. 그것들을 키워서 길러주고, 성숙시켜 여물게 하며, 양성하고 감싸준다. 그런데 만물을 낳고 기르지만 소유하지 않으며, 만물을 이루었지만 자기 공을 자랑하지도 않고, 만물을 이끌되 지배하지 않는다. 이를 현덕(玄德)이라 한다.
현덕은 지극히 높고 심오한 도덕이며 보통 사람은 도달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경지다. 그렇다면 세상에 이러한 경지에 이른 성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일까? 물론 아니다. 남과 나의 구별이 없고, 범속함과 성스러움이 다르지 않다는 진리를 깨달으면 누구나 성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적어도 노자나 석가모니는 이 경지에 도달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남과 나 사이에 구별이 없다는 말은 과연 믿을 만한가? 석가모니가 보리수나무 아래에 앉아 깨우친 이 ‘진리’를, 노자는 자연을 자세히 관찰한 뒤 깨달았다. 우리 또한 자연 현상을 통해 인아무별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예를 살펴보자. 열대과일의 하나인 두리안(durian)의 겉은 딱딱하고 냄새가 난다. 하지만 속살은 부드럽고 달콤해서 과일의 왕으로 불린다. 두리안은 다 익으면 저절로 나무에서 떨어진다. 그러면 특유의 냄새가 멀리까지 퍼지면서 멧돼지, 코끼리 등이 찾아와 그 열매를 먹는다. 나무 입장에서는 실컷 힘들게 열매를 맺어서 남 좋은 일만 하는 셈이니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동물들은 두리안을 먹을 때 반들반들한 씨까지 함께 삼킨다.
씨는 소화되지 않고 배설물과 함께 배출되는데, 동물들이 두리안을 먹고 멀리 가서 배설을 하면 씨앗은 그곳에서 배설물을 비료 삼아 싹을 틔우고 또 다른 두리안 나무로 자란다. 결국 원래의 두리안 나무는 동물에게 열매를 제공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씨를 멀리까지 퍼뜨려 생명연장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처럼 남의 생명이 자라도록 도우면서 자신의 생명도 이어가는 것이 인아무별의 이치다. 만약 두리안이 동물에게 아무런 가치도 없는, 가시 돋친 맛없는 과일이었다면 일찌감치 멸종되었을 것이다. 인간 세상도 같다. 타인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고 하는 일마다 피해를 주는 사람은 냉대받고 도태될 수밖에 없다. 성인은 자신과 남, 그리고 중생이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는 진리를 파악했기에 자기 생명을 내어놓을 만큼 남을 위해 헌신할 수 있었고, 자기 생명의 가치를 더욱 완전하게 실현했다.
<“노자처럼 이끌고 공자처럼 행하라”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후웨이홍, 왕따하이 지음, 역자 최인애님, 한스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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