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에서의 소년 시절(1874-1889)
2만 명 정도의 무리가 드와이트 무디의 야외 집회에 들어가기 위해 애버딘 브로드힐 언덕을 가득 채웠다. 애버딘에서 유명한 화강암 채석장의 노동자들, 청어잡이 어부들, 은행 직원들, 그리고 대학 교수들이 함께 앉았다. 주부와 어린이들도 점점 늘어가는 군중 틈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분위기는 기대감으로 한껏 고조되어 있었다. 성경과 삶의 이야기들을 특이하게 조화시키는 무디의 놀라운 설교 방법은 청중의 관심을 붙들었다.
당시 36세였던 클래런스 챔버스 목사는 브로드힐에 모인 어마어마한 군중을 둘러보았다. 그가 담임하던 크라운 테라스 침례교회는 주일 아침 예배 때 회중이 다 찬다고 해도 300명을 넘지 못했다. 무디와 같은 해에 태어난 클래런스에게는 그 집회의 광경이 놀라울 뿐이었다. 무디와 동역자인 생키는 재능 있는 독창자이며 작사가로서 자신의 대중 찬송으로 미국와 영국의 교회 음악의 흐름을 바꾸어내고 있었다. 많은 청중이 시를 음악으로 만든 그의 노래를 들으면서 남이 보든 말든 눈물을 훔쳤다.
같은 시간에 본 어코드 테라스 위에 있는 어느 작은 집 안에서는 한나 챔버스가 여섯 자녀들을 돌보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아서(13세), 버사(11세), 어니스트(7세), 에디스(5세), 프랭클린(3세), 거트루드(2세). 그리고 뱃속의 아기 챔버스가 있었다. 클래런스와 한나 모두 스펄전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그것을 계기로 함께 그리스도를 철저하게 섬기자는 결단을 내렸다. 클래런스 챔버스는 목표 의식이 강하고 엄숙한 사람인 반면 한나는 따스함이 흘러넘치는 온화하고 유쾌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며칠 후 무디와 생키는 애버딘을 떠났지만, 그들이 남긴 부흥의 불길은 계속 타오르고 있었다. 무디와 생키의 복음 운동은 애버딘 사람들에게 큰 영적 갱신을 가져온 동시에 클래런스 챔버스와 마을의 다른 목사들에게도 도전을 주었다. 이 미국인들의 집회로 인해 그들은 교인들에게 더 깊은 인격적 관심을 가지려는 개혁을 체계화하기 시작했다.
오스왈드가 18개월이 되던 때 크라운 테라스 마을에서는 아버지 클래런스 목사의 사역에 불만을 품은 소문들이 나돌기 시작했다.“ 설교에 힘과 생명이 부족해. 설교의 주제가 분명치 않고, 실천에 도움이 되지 않아.” 이러한 분위기는 그해 말이 되자 클래런스의 사임을 요청하는 통보로 이어졌다. 클래런스는 더 이상 무거운 마음의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목회를 사임했고,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침례 연합회는 그를 중국 도자기 본차이나를 만드는 지역의 가정 선교 전도자로 임명하고 파송했다.
챔버스의 가족은 시원한 북해 미풍이 부는 애버딘을 떠나 도자기 가마들로 가득한 거무칙칙한 스토크-온-트렌트로 이사하게 되었다. 클래런스에게는 새로운 일이 생긴 셈이지만, 한나에게는 장소가 바뀐 것 외에는 거의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녀는 매일 네 자녀를 학교에 보내야 했고 집에서는 오스왈드를 포함한 어린 자녀들을 돌봐야 했다. 여전히 살림살이는 어려웠으나 그녀는 기쁨으로 하루하루를 맞이했고 위기가 발생할 때면 주께서 공급하실 것이라는 확신으로 그 어려움을 이겨냈다.
오스왈드는 일반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나는 많은 아이들처럼 어린 나이에 기도를 배웠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믿음으로, 그의 기도는 형식적인 기도를 넘어섰다. 형 프랭클린은 5살 때의 오스왈드의 기도를 ‘매우 독창적’이라고 묘사하면서 그보다 나이 많은 가족들이 밤에 발꿈치를 들고 위층으로 올라가 오스왈드가 침대 옆에서 기도하는 소리를 듣기 위해 조용히 앉아 있던 때를 회상했다.
오스왈드가 7살 되던 해 아버지가 퍼스에 있는 뱁티스트 채플 교회로부터 청빙을 받게 되어 온 가족이 다시 스코틀랜드로 돌아오게 되었다. ‘깨끗한 도시’로 불리던 퍼스는 야외를 좋아하는 활동적인 소년에게는 파라다이스였다. 오스왈드는 세 살 많은 프랭클린 형과 함께 마을 동편의 테이 강 강둑으로부터 솟아오른 사화산 키눌 힐의 가파른 경사를 등반하기를 좋아했다. 그들은 마노를 찾기 위해 위험한 절벽들을 탐험했다. 거대한 연어가 숨어 있는 테이 강과 우디 아일랜드는 생생한 상상력을 가진 소년들에게는 쉽게 스티븐슨의 ‘보물섬’이 되었다. 챔버스는 당시 유행하는 유년기 질환을 앓지는 않았지만 모험심 때문에 발목이 삐고, 팔이 부러지며, 엉덩이뼈가 탈구되는 등 많은 사고를 당했다.
친구들과 가족들은 10살 된 오스왈드를 ‘시끌법썩하게 웃기면서도 매우 조용한 성격’의 소년으로 묘사했다. 책임감 없이 놀기만 좋아했던 유년기의 그에 대해 형 프랭클린은 “후에 동생에게 나타난 강렬한 두뇌의 힘은 초등학교 시절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학교에 다니는 동안 한 번도 우등상을 받지 못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술 영역에서는 청년 시절에 나타날 그의 재능과 열정을 예감하게 하는 유년기적인 특징들이 나타났다. 오스왈드가 7년 동안 다닌 사립학교 샤프 인스티튜션에서는 저학년 학생들에게도 드로잉 수업을 받도록 했는데 그가 백묵으로 칠판에 그린 금독수리는 한동안 학교측이 지우지 않고 보관하여 학교 방문자들에게 자랑스럽게 보여줄 정도였다.
1889년 6월, 클래런스는 침례교 총 금식협회의 순회 담당 비서로 임명되었다. 오스왈드는 이제 곧 가족이 런던으로 이사 가게 될 것을 알고는 들뜨기 시작했다. 대도시에 살게 된다고 생각하니 흥분되었다. 그가 가장 원했던 것은 미술 교육이었다. 런던의 박물관과 미술관, 멋진 건축물들을 생각하면 배움의 기회가 끝이 없을 것 같았다. 문제는 언제나 돈이었다. 오스왈드는 아버지를 사랑했지만 항상 실리적인 경제 중심의 가치관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경제적인 성공과는 거리가 먼, 꿈 많은 미술가 지망생에게 돈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오스왈드는 마지막으로 테이 강 주변을 오랫동안 걸으면서 자신의 소년 시절에 작별인사를 했고, 다음번에는 런던의 거대한 템스 강을 산책할 것을 고대했다.<“순종의 길(1부-3부)”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데이빗 맥캐스랜드 지음, 역자 스테반 황교수, 토기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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