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중대사
앤 불린의 치명적 매력: 즉위 20주년에 가까워졌을 때 헨리는 국가 재정과 상관없는 문제에 부딪혔다. 이 문제를 이루는 요소는 두 가지였는데, 어느 것이 먼저였는지는 알 수 없다. 하나는 캐서린 왕비가 아이를 낳기에는 너무 나이 든 중년의 뚱뚱한 부인이 되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헨리 7세가 짙은 눈동자에 가느다란 목을 지닌 젊은 앤 불린(Anne Boleyn)에게 열렬히 빠져 있다는 것이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헨리는 자신이 옳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의 지지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울지 추기경은 대법관으로 처음부터 헨리의 편에 서 있었다. 몇 년 후 헨리와 울지는 캐서린과의 결혼에 먼저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헨리였다고 공언했다. 이 모든 계획의 뒤에는 앤 불린이 있었다.
1520년대 중반, 앤의 언니 메리는 왕의 정부가 되었다가 몇 년 만에 연금을 받고 버려졌고, 아버지는 귀족으로 승급되어 로치포드 자작이 되었다. 앤 자신은 결혼을 하지 못한 채 독신으로 살게 될 위기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1526년, 헨리가 왕비와의 결혼에 대한 회의감에 빠지면서 그의 관심은 다른 모든 여인을 제치고 앤에게만 집중되었다. 헨리는 앤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랑의 화살을 맞았다”고 고백한 적도 있다.
헨리는 앤과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부터 그녀를 단순한 잠자리 상대가 아니라 왕비로 맞아들이고 싶어 했다. 두 사람의 육체적인 결합은 수년 동안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추측된다. 왕의 정부가 됨으로써 얻는 이익이 얼마나 제한적일 수 있는지를 가까운 곳에서 목격한 그녀가 헨리의 접근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먼저 헨리는 잉글랜드의 수석 대주교인 캔터베리 대주교에게 왕과 왕비의 결혼 무효화를 선포하게 하는 방법을 생각하게 되었다. 헨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는 신호를 지체 없이 보냈다. 1527년, 교황의 잉글랜드 특사인 캄페지오가 잉글랜드에 도착하기 몇 달 전에 헨리는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판결을 받지 못하면 잉글랜드 교회와 로마 교황청과의 오랜 관계를 끊을 수도 있다고 협박하듯 말했다. 왕과 교황 간의 분쟁은 과거에도 있었지만 울지는 헨리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있었다.
좌절과 혼란
결혼 무효화 공판: 런던의 블랙프라이어스 수도원에서 처음으로 공판이 열렸다. 공판은 한 달 동안 계속되었다. 6월 18일, 캐서린의 대리인들이 출두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캐서린이 직접 법정에 나타났다. 그녀는 교황에게 편지로 호소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교황의 특사들에게 이 공판 자체가 불합리하며 자신에게 전적으로 불리하므로 아무런 진술도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녀의 이런 행동은 애원인 동시에 도전이기도 했다. 헨리에게는 좌절과 혼란이 잇따랐다. 휴정되기도 전에 공판은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공판이 진행되던 중 그는 잉글랜드의 모든 주교들이 이 결혼에 대한 문서에 서명하고 날인했으므로, 그들은 적어도 이 결혼의 타당성이 의심스럽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주교 중 한 사람인 존 피셔는 “왕과 왕비의 이 결혼은 그 어떤 힘으로도 무효화할 수 없다고 단언할 수 있으며, 이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라면 목숨도 걸 수 있다”고 말했다.
완성
헨리와 앤 불린의 비밀 결혼: 1532년 말이 가까워지면서 두 개 현안의 진행 속도가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는 별개의 사건이었던 왕의 이혼 소송과 교회에 대한 공격이 서로 얽히게 되었다. 헨리는 앤 불린에게 펨브로크 후작이라는 높은 작위와 이에 어울리는 후한 수입, 그리고 장래에 그녀가 ‘남자 상속자’를 낳으면 작위와 유산을 물려줄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이렇게 아량을 베푼 이유는 앤이 결국 마음을 바꿀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앤이 왕의 아들을 낳는다면 그들 모두의 미래가 보장될 수 있다. 앤의 임신은 왕이 추진하고 있던 모든 일의 진행 속도를 한층 더 높여주었다. 앤이 낳을 아들을 적자로 만드는 일이 당장 시급해졌다.
결혼식은 비밀에 부쳐졌다. 앤의 뱃속에 아이가 생겼을 때 이미 앤과 헨리는 결혼한 상태였던 것처럼 날짜를 속이기 위해서였다. 헨리는 간절히 원하던 부인을 얻었고 그녀의 뱃속에는 그의 아이가 있었다. 남은 일은 그녀와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캐서린과의 결혼이 무효화될 때까지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교황은 헨리와 캐서린의 결혼이 적법하다고 확신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괴롭히고 회유하려는 헨리의 집요한 시도에 넌더리를 내고 있었다. 그러나 파문이라는 것이 무기가 될 수 있는지는 헨리도, 교황인 클레멘스도 알 수 없었다. 이런 시나리오가 완성되기 위해 남은 일은 하나뿐이었다. 앤이 아들을 낳는 것이었다. 그러나 9월 7일, 태어난 아이는 딸이었다. 아이는 헨리의 어머니 이름을 물려받아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튜더스”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G. J. 마이어 지음, 역자 채은진님, 말글빛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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