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은 롤러코스터다. 삶의 자락마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계속 이어졌고, 어느 때는 견딜 수 없이 평탄한 길도 있었다. 내가 태어나기 3개월 전 아버지께서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 태아 때라 기억조차 남아있지 않기에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존재감은 느낄 수 없었다. 가족은 나와 어머니 단 둘뿐이었다. 화가이신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늘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셨다. 그래서 나는 늘 혼자였고, 심지어 초등학교 입학식도 혼자 가야만 했다. 다른 사람 눈에는 어쩌면 불우한 환경으로 보였을지 몰라도, 난 내 처지를 비관하거나 반항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홀로 보내는 시간을 나와 함께해준 것은 수많은 책이었다. 책 속의 등장인물이 되는 상상을 하는 그 시간이 내게는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다. 때로는 멋진 영웅이 되고, 이따금 현실 속에서 만나지 못한 아버지를 꿈꿔보기도 했다. 아마 그 시절 많은 상상을 하던 습관이 나를 좀 더 창의적인 사람으로 훈련시킨 것 같다.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한 20대 초반까지 종류를 가리지 않고 수천 권의 책을 읽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우중회장의『세계는넓고할일은많다』를 읽고는 성공한기업가가 되겠다는꿈을 가졌다.
직장에 취직하고 몇 년간 마케팅이라는 것을 경험한 후,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에스테틱 프랜차이즈 사업으로 첫 번째 도전을 시작했다. 하지만 1호점을 계약하고 인테리어를 진행하던 중 사업 자금을 빌려간 절친한 선배의 부도로 정신적 공황에 휩싸였고, 그 길로 거리의 노숙자로 전락해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주워 든 잡지 한 권에서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놓쳤던 희망의 끈을 다시 붙잡을 수 있었다. 전 재산이던 낡은 자동차 한 대를 팔자 500만 원이 수중에 들어왔다. 적은 돈이었지만 아이디어와 도전정신, 뚝심만으로 1997년 결혼정보회사 (주)듀비스를 창업했다.
이후 승승장구하여 창업 4년 만에 코스닥 상장을 눈앞에 두는 작은 성공을 이루게 되었다. 사연 많은 30대 초반의 젊은 사업가 이야기는 매스컴을 통해 집중 조명되었고, 여러 기업과 대학으로부터 강의 요청을 받으면서 인기 있는 ‘성공학’ 강연자로도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하지만 연이은 작은 성공에 도취되어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다가 2000년 12월 끝내 부도를 맞고 나락으로 떨어졌다.
죽고 싶을 만큼 부끄럽고 힘든 시간이었지만,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다는 생각에 다시 이를 악물고 2001년 (주)씽크플레이스라는 홍보마케팅회사를 창업했다. 전략적이고 도전적인 홍보마케팅은 기업들의 큰 호응을 얻었으며, 창업 2년 만에 70억에 달하는 서비스 매출을 달성해 업계 1위로 성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2002년 12월 다시 날벼락 같은 시련이 찾아왔다. 돈을 노린 4인조 강도에게 납치되어 생사의 시련을 겪으면서 모든 꿈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은 건졌지만, 외상 후 스트레스증후군으로 인한 심각한 우울증에 빠져 끝 모를 무력감과 삶의 덧없음을 느끼게 되었다.
몇 번의 자살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2003년 무작정 배낭 하나만 매고 남미의 브라질로 떠났다. 그렇게 7년간 남미에서 북미, 유럽, 그리고 우리나라 전국을 걸으며 방랑의 시간을 보냈다. 그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은 빈부와 노소를 떠나 모두 내게 친구이자 스승이었으며 동지였다. 흘러가는 시간 동안 만나는 사람들과 낯선 거리의 풍경 등으로 마음은 서서히 치유되었다. 그저 참고 견디기만 하던 삶이 기다리고 사유하고 상상하는 희망적인 모습으로 변했다.
방랑이 끝난 후 다시 전쟁 같은 삶의 터전인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내가 경험한 노하우를 가지고 중소기업과 벤처기업을 전문적으로 돕는 PR컨설팅회사 (주)씽크이지를 세웠다. 한편으로는 다양한 이유로 좌절하고 실의에 빠진 청년들에게 힘과 용기를 북돋아주는 리더십 강사 역할도 함께 하고 있다.
이 책은 언제나 새로운 도전을 생각하며 현재진행형 삶을 사는 저자 임수열이새로운시작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전하는 희망가득한 삶의 이야기다. 우리네 삶에서 가장 아름다워야 할 이삼십 대 청춘을 수많은 우여곡절로 파란만장하게 보내며 터득한 삶을 대하는 법, 사랑하는 법, 쉽게 생각하는 법, 도전하는 법, 그리고 성공하는 법을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실의와 절망에 빠져있거나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망설이는 청춘들에게 그는 말한다. “쉽게 생각하자!” 그리고 “도전하자!”고....(요약)
제1막 게릴라정신, 개천에서 용이 나는 법
탈출
꿈과 희망을 잃는다는 게 얼마나 비참한 일인지……, 만약 그날 명동성당 어귀에서 낡은 일본 잡지 한 권을 주워들지 않았다면 나도 그들과 같은 모습으로 인생을 마감했을지 모른다. 명동 중국대사관 옆 골목에는 외국 잡지를 파는 서점들이 늘어서 있다. 내 눈에는 일본 잡지들 속에 숨은 결혼정보시장에 대한 자료들만 보였다. 시장의 규모가 어떻고, 발전 가능성은 어떻고, 한국 실정과는 얼마나 다른지 열심히 파악하던 명동 뒷골목의 허름한 노숙자는 사업 가능성을 확신했다. 내 몸보다 내 미래가 먼저 노숙자 신세로부터 탈출했다.
노숙생활 6개월 만에 집으로 돌아갔다. '이제는 시작이다!' 결심 앞에 현금은 커녕 선배에게 빌려준 5,000만원의 대출 빚만 남아 있었다. 그나마 아직은 쓸 만한 (압류 당하지 않은) 중고 승용차가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친구에게 팔아 500만 원을 마련했다. 물론 전 재산 500만 원은 일을 시작하기에 턱도 없었다. 하지만 가슴 가득 희망을 품고 있었기에 자신감이 넘쳤고, 두려울 게 없었다.
종로3가에 보증금 없이 선 월세로 60만 원을 주고 사무실을 얻고 그 길로 세무서에 가서 사업자등록까지 마쳤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결혼정보회사라고 하면 대개 음습하고 부정적인 이미지였다. 나는 결혼정보회사에 대한 기존의 이미지부터 바꾸고 싶었다. 내가 추구하는 결혼정보회사는 더 나은 배우자를 찾으려 사람들이 모이는, 밝고 긍정적이며 즐거움을 주는 모임이었다. 그러자면 사람들에게 나의 뜻을 전하고 신뢰를 얻어야 하는데, 여기에는 상식적으로 엄청난 홍보비용이 필요했다. 수중에는 사무실을 얻고 남은 400만 원 남짓한 돈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첫 번째 불가능한 계획을 세웠다.
한강 둔치 유람선 안에 레스토랑을 꾸며 놓고 클래식 연주자들의 연주를 들으며 식사를 할 수 있는 최고급 유람선 레스토랑이 있었는데, 1인당 식사비가 4만 5천 원 정도였다. 그 배를 450만원에 통째로 빌리기로 했다. 그리고 미래 고객 100명을 초대해 우리 회사의 창업 식을 겸한 '사랑의 유람선' 파티를 열기로 했다. 물론 내 계획을 들은 주변 사람들은 극구 말렸다. '왜 가진 돈 전부를 남들 밥값으로 지불하려고 하느냐?' '한 푼도 없이 앞으로 무슨 일을 하려고?' '그런 일은 돈 많은 대기업이나 할 수 있는 일이야!' 충분히 공감이 가고 예상할 수 있는 반응들이었다.
"돈이 없으면 지혜를 보이고, 지혜도 없으면 땀을 더 흘려라." 일본 교토 상인들의 가르침 중에 그때나 지금이나 나에게 힘을 주는 문구다. 비록 나에게 충분한 돈은 없지만, 지혜롭게 더 많은 땀을 흘린다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이 계획이 사업의 성패를 결정짓는 일이라 판단한 즉시 난 주위의 걱정과 만류를 뿌리치고 일을 추진했다. 레스토랑에는 한 달 후 토요일 저녁에 사용하기로 하고 계약금 300만원을 건넸다. 사업의 시작과 동시에 불가능해 보이는 계획들을 머릿속으로 차례차례 그려나갔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움직였다.
이따금 노숙자인 채로 안주해버린 내 모습을 상상해보면 끔찍한 생각이 든다. 만약 내가 그날 명동 주변을 배회하지 않았다면, 일본 잡지를 누군가 먼저 집어 들었다면, 그리고 그 잡지를 보고도 내게 아무런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그곳에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1997년 봄, 운명은 나를 두드렸고, 나는 그 운명에 응답했다. 그리고 나도 모르는 사이 내 미래를 좇아 내 몸은 노숙자로부터 완전히 탈출했다.
결혼정보회사 벤처 1호 되다
다양한 이슈로 언론에 알려지면서 오프라인에서는 우리 회사 인지도가 크게 쌓였지만, 온라인에서는 그에 미치지 못했다. 1998년에서 1999년으로 이어지던 당시, 모든 사업의 미래는 인터넷을 활용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사회 전반을 휩쓸고 있었다. 나는 커플매니저에 의해 주먹구구식으로 남성과 여성을 연결시켜주던 것에서 컴퓨터시스템을 통해 더욱 정확하고 편리하게 커플이 이루어질 수 있는 만남을 주선해보자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IT에 문외한이었던 나는 우리 고객명단을 검토해 IT관련 일하는 분들을 만나 솔직하게 도움을 청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온라인매칭시스템'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당시 가장 큰 통신사들인 천리안과 하이텔, 유니텔 등에 우리의 회원정보를 제공하는 IP사업을 시작했는데, 불과 몇 개월 만에 수천만 원의 매출로 돌아왔다. 이 일을 통해 온라인의 매력과 비전에 더욱 확신을 가졌다. 그리고 '온라인매칭프로그램'을 중심으로 온라인 미팅과 채팅을 주력 서비스로 제공하는 웹진 'OKLOVE.NET'를 개설했다. 여기에 온라인상에서 더욱 재미있게 자신을 표현하도록 자신만의 아바타를 임의대로 만들 수 있는 '몽타주 기법'을 최초로 시도했다. 또한 영화배우 유지태씨를시작으로유명인사들을직접인터뷰해그들의사랑과연애를주제로한이야기들을웹진과사보에실었다.
새로운 시도들은 연일 대단한 관심과 호응을 불러일으켰고, 단기간에 수만 명이 사이트에 가입했다. 우리는 곧바로 완성된 프로그램을 가지고 중소기업청에 기술평가를 신청했다. 그리고 두 달 후 결혼정보회사로는 최초로 중소기업청 지정 벤처기업으로 등록되었다. 벤처 1호가 주는 의미는, 선두기업이라는 이미지도 있지만, 최첨단 시스템을 갖춘 결혼정보회사라는 이미지를 확고하게 해주었다.
조바심, 낙관론, 그리고 실수의 이유
"자본금 500만 원으로 1인 창업, 결혼정보회사 벤처 1호 인증, 창업 4년차인 2000년 코스닥 상장 시도" 짧은 시간 동안 눈부시게 성장한 듀비스는 IT와 결혼정보서비스를 접목한 최첨단 결혼정보서비스회사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내 꿈의 종착지가 아닌 시작일 뿐이었다. 좀 더 넓고 큰 시장에서 활동하고 싶었고,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사실, 우리가 코스닥 상장을 준비하던 2000년은 모든 결혼정보회사들이 어려운 시기였다. 당시 나는 결혼정보서비스를 각 기업, 지방자치단체와 협력해서 고액의 회원가입비 대신 실비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사회공익사업으로 전환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보유하고 있는 미혼 남녀의 정보와 네트워크 등을 공유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게 되면 정말 많은 대중들, 아니 국민들이 금전적인 부담 없이 공신력 있는 결혼정보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지자체나 대기업들을 통해 이 생각이 실현된다면, 나 역시 고객을 확보하는 데 들어가는 마케팅 비용이 발생하지 않아 최소한의 비용으로 회사를 운영할 수 있다.
결혼정보회사를 공익사업으로 전환하면 수익은 어디서 얻느냐고 고개를 갸웃할 수 있다. 나는 그 수익을 웨딩사업에서 얻고자 했다. 웨딩과 관련한 정보를 제공하는 웨딩전문 온라인백화점을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많은 업체들이 자유롭게 입점해서 자신들의 서비스와 상품을 제시하고, 소비자가 더 좋은 조건의 업체를 찾아서 선택할 수 있게 해주는 장터 역할을 하고 싶었다. 마치 극장의 예매 상황을 온라인으로 쉽게 확인하는 것처럼, 예식장도 웹상에서 예약 스케줄을 확인하고 자신이 결혼할 날을 정하거나 가능한 날의 예식장을 찾을 수 있게끔 만들고 싶었다.
예식장뿐만 아니라 미용, 가구, 가전, 예물, 부동산, 신혼여행 등을 원스톱으로 편리하고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돕는 사이버 웨딩플래너서비스를 구축하는 일까지 꿈꾸었다. 내가 생각한 사이버 웨딩플래너는 결혼을 경험한 주부들을 훈련시켜 과정을 수료한 주부들이 자신의 거주 지역에서 웨딩플래너로 활동하는 것이었다. 대한민국의 웨딩산업을 혁신적으로 변화시키고 나아가 일자리 창출까지 가능한 사업이었다. 그래서 우리 회사가 전국적으로 많은 커플들을 탄생시키고 결혼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자연스럽게 많은 대중들로부터 사랑과 신뢰를 받는 국민적 기업이 되길 원했다. 한편으로는 웨딩과 관련된 사업으로 수조원의 매출을 이루는 새로운 웨딩비즈니스를 꿈꿨다. 나는 실현 가능성과 성공 가능성 모두를 확신했다. 그렇게, 살면서 가장 큰 실수 하나를 저지르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렇게 거대한 프로젝트는 많은 돈과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단기간에 그 목표를 달성하고 싶었다. 조급증이 발동한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자산과 역량을 고려하지 않고, 단시간에 훌륭한 결과가 생길 것이라 기대했다. 그래서 1차로 전국에 수십 개의 지점망을 구축하고, 코스닥에 상장해서 더 큰 공신력을 얻고, 이 사업을 추진해 나갈 수 있는 큰 규모의 자금을 공모하기로 마음먹었다.
윤다훈 씨를 홍보모델로 영입한 이후 회사의 모든 자금은 웨딩사업 광고와 웹 프로그램 개발 및 서버 확충에 집중했다. 주요 일간지에 전면 컬러광고를 내보내는 등 파격적인 아이디어로 대공세를 펼쳤다. 당시 우리 회사를 보고 신문과 잡지사의 광고 책임자들이 어느 재벌3세가 사업을 시작한 줄 알았다고 얘기하며 회사를 찾아올 정도였다. 그동안 큰돈 들이지 않은 게릴라정신으로 홍보마케팅을 해 큰 효과를 보며 꾸준히 성장을 해오다가 갑자기 수십억의 자금을 웹 시스템과 지점 확보를 위한 홍보마케팅에 쏟아 부은 것이다. 나는 내가 계획한 사업 플랜에 대해 너무나 자신 있었고, 그것을 알게 되면 누구나 나와 함께 그 꿈에 동참해 줄 것이라는 기대와 착각을 동시에 했기 때문이다.
추락은 순식간이었다. 전국에 적어도 50여개의 지점망은 손쉽게 구축될 것이라 기대했는데, 결과는 단 10개에 그치고 말았다. 더구나 가지고 있던 모든 자금을 신규프로젝트에 쏟아 부었는데, 부진한 결과와 함께 당시 금융게이트 사건으로 투자가 위축되면서 투자가 중단되었고, 회사는 엄청난 자금난을 겪게 되었다. 하루아침에 부도 상황으로 몰렸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이루려고 서둘렀던 조급증과 무조건 잘 될 거라는 대책 없는 낙관론을 가졌던 나 자신을 보며 뼈저리게 반성하고 후회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고 다시 일어날 수 있었던 것도 긍정적이며 낙관적인 사고가 희망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도전과 시도를 할 수 있었고, 내 앞에 기다리던 또 다른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나는 사라져도 회사는 남기다
한때 승승장구하던 모습과 당장 직원들 급여까지 못 주는 모습이 오버랩 됐다. 불과 4년 만에 눈부시게 성장했지만, 완전히 추락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그 10분의 1도 되지 않았다. 3개월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눈앞의 현실로 닥쳤다. 부도 상황에 이르자 나를 믿고 지원해주던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을 실망시켰다는 자책감과 미안함이 나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였다. 어떻게 해서든 피해를 최소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새로운 투자자들을 찾아다녔다.
절박한 심정으로 모든 걸 내려놓고 뛰어다녔다. 투자자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갔다. 결국 부산의 한 사업가에게 신규투자를 조건으로 내 지분 전부를 무상으로 넘겼다. 그러는 사이 정들었던 직원들도 여럿 떠나고 회사의 이미지도 크게 떨어졌지만, 어떻게든 회사가 다시 일어서기만을 바랐다. 그날 저녁 괴로움에 술을 잔뜩 마시고 취한 나는 어느새 회사 앞에 서 있었다. 건물 외벽에 부착된 '(주)듀비스'란 간판을 보며 저 이름을 만들기 위해, 저 로고를 만들기 위해 물불 안 가리고 열심히 뛰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믿기지 않는 현실로 인해 멍하니 여러 시간 그렇게 사무실을 바라보았다.
제2막 임수열이 만난 사람들
뻔뻔할 정도의 당당함
이제까지 다양한 개성과 장점을 가진 사람들과 일하면서 때로는 좋은 장점들을 때로는 저렇게 하면 안 되겠구나 하는 교훈들을 얻을 수 있었다. 그 중에는 마치 학교 선생님처럼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신 분들이 있다. 그 중에 '당당함'이란 과목을 가르치셨던 선생님 떠오른다. 결혼정보회사를 창업한 후 궤도에 오른 2000년 초 영입해 나를 도와 일하셨던 박 이사님이시다. 사실 그 분은 내가 노숙자로 생활하기 이전에 다니던 회사의 상사였다. 나보다 20년이나 더 인생을 경험하신 50대의 박 이사님, 그 분을 생각하면 2000년 말 회사가 갑작스런 자금난에 빠져 부도 상황에 몰렸을 때가 떠오른다.
부도 상황이라는 정보가 퍼지자 채권자 몇 명이 회사로 찾아왔는데, 큰 덩치에 머리를 짧게 자른 건달 여러 명이 동행했다. 돈을 제때 주지 않으면 안 좋은 일이 생길 거라며 협박을 했다. 가만히 서서 노려보며 위압적인 분위기를 만드는 건달들로 인해 나는 어찌 할 바를 몰랐다. 그때 내 방으로 박 이사님이 들어오시더니 오히려 그들을 야단치시는 게 아닌가? "지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이런 양아치 같은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합니까? 우리가 돈을 숨겨놓고 고의로 안 주는 것도 아니고, 잘 해보려고 시작한 일이 계획대로 안 돼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는 먼저 함께 의논하고 방법을 찾는 게 순서 아니요?
다짜고짜 조폭 같은 사람들을 데려와서는 협박을 하는 게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박 이사님이 너무나 당당하게 말씀하셔서 나도 순간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러고는 놀랍게도 인상을 쓰고 있는 건달들에게까지 호통을 치셨다. "젊은 사람들이 말이야, 이런 건장한 몸도 가지고 있으면서, 이런 곳에나 따라다니는 게 말이나 됩니까? 부끄러운 줄 아세요!" 박 이사님이 너무나 당당한 자세로 호통과 야단을 치자 살기등등하게 협박하던 채권자들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러더니 미안하다며 내게 사과까지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채권자들이 모두 돌아간 후 박 이사님은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힘내요, 임 사장. 로마를 세계 초강대국으로 이끌었던 시저 역시 오랜 세월 로마 제일의 빚쟁이였다는 말을 들었어요. 로마 제일의 권력자가 되기까지 얼마나 엄청난 비용이 들어갔겠어요? 수십 년간 그 비용을 빚으로 충당했다니 말입니다." 박 이사님이 해주신 시저의 이야기는 실의에 빠진 내게 분명한 힘을 주었다. 이후에도 시저는 채권자들을 만날 때마다 항상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오히려 빚을 갚지 못하는 상황에서 더 많은 돈을 빌려달라고 요구하는 기막힌 뻔뻔함까지 보여주었다. 목표를 달성하게 되면 분명히 갚을 수 있다는 시저의 뻔뻔한 정도의 당당함에 채권자들은 다시금 돈을 빌려 주었다. 그리고 그는 끝내 목표를 달성했고 모든 빚을 갚았다.
시저와 박 이사님이 내게 보여준, 아니 가르쳐준 '뻔뻔할 정도의 당당함'은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여러 상황들, 특히 사람을 나약하게 만들 수 있는 상황에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도록 해주었다. "그 당당함이 바로 조직을 이끄는 리더의 자세요." 지쳐 있는 내 어깨를 두들기며 말씀하시던 박 이사님과 그분의 말씀이 지금도 내 머릿속에 남아 있다.
지푸라기를 놓다
벼랑 끝에 매달린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산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그 지푸라기를 놓고 나서야 새로운 기회를 잡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2000년 12월, 듀비스를 완전히 넘긴 후 두 달 가까이 실의에 빠져 헤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그저 술로 밤을 지새우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다시 맨주먹, 빈털터리가 된 나는 다시 시작한다는 것이 너무나 어렵게 느껴졌고, 이런 상황에 있는 내 자신이 부끄러워 사람들과의 만남도 피했다. 그러다 문득 수년 전 노숙자 생활을 하며 최악의 절망을 느꼈던 그때가 떠올랐다. 나는 이를 악물고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던 차에 현재의 내 상황을 잘 아는 이전 거래처 사장이 투자자 한 명을 소개했다. 박 회장이라 불리는 그 투자자는 50대 정도로 보이는 외모에 카리스마가 넘치고 아주 화통한 사람이었다. 박 회장은 첫 만남부터 자연스럽게 말을 놓으며 나를 여러모로 테스트했다. 그리고 진심으로 호감을 표하며, 내가 너무 마음에 들어 동생 삼고 싶다는 말까지 했다. "임 사장, 아니 동생. 얼마면 되겠나? 내가 도와줄 테니 걱정하지 마. 그리고 이제부터 자네도 나보고 회장님이라 하지 말고 형님이라 불러. 알았지?"
그러고는 자신의 비서에게 필요한 금액과 사업계획을 설명해 주라고 했다. 그 후 비서와 실무협상을 하던 와중에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박 회장이 실제로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조직폭력계의 보스였던 것이다. 그 사실을 안 순간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폭력조직의 보스면 어때? 사람 자체는 무척 남자답고 의리 있어 보이는데, 문제야 생기겠어? 게다가 부도나고 명예니 자존심이니 바닥에 떨어졌는데, 빨리 회복하려면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지!'
그러나 한편으로는 두려운 마음도 들었다. '폭력조직의 돈을 사용해서 사업을 시작하면 결국에는 그쪽과 연관된 일을 하게 될 거야. 일이 잘되든 못되든, 나중에 그 인연을 끊기가 정말 힘들어지지 않을까?' 마음의 갈등을 정리하기 위해 난 듀비스가 부도난 이유를 다시 생각해 보았다. '그래 빠른 시간에 많은 것을 이루려고 무리하게 일을 벌인 것이 부도의 원인 아니었던가! 지금 이 순간도 그때와 마찬가지다. 예전 상태로 빨리 돌아가기 위해 위험한 선택, 독이 들어있을지 모르는 술잔을 받으려는 것 아닌가?'
지금 선택이 나중에 더 큰 문제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면 나를 더욱더 힘들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조금 더 시간이 걸리더라도 정상적인 단계를 밟아 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눈앞에 보이는 성공을 향해 달려갈 수 있는 모든 기반을 제공하겠다는 제안을 뿌리치기란 쉽지 않았다. 더구나 부도 이후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던 나에게는 더욱 힘든 유혹이었다. 당시 결정을 내릴 때에도 큰 용기와 결단이 필요했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아찔하다. '내가 만약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어쩌면 조직의 자금관리나 하고 있지는 않을까?'
내 경험으로 알 수 있었지만, 살면서 기회는 반드시 찾아온다. 그 중에는 가끔 포기해야 할 기회도 있다. 절박한 마음에 일단 '지푸라기라도 잡고 보자'는 심정으로 대했다가 더 큰 문제에 봉착할 수도 있다. 절망 속에서도 내미는 '지푸라기'가 어떤 상태인지, 누가 내미는 것인지 분명히 확인해야 한다. 나는 끝내 그 지푸라기를 잡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고, 결국 홍보마케팅 업계 서비스 매출 1위의 씽크플레이스를 창업할 수 있었다.
제3막 쉼표는 있어도 마침표는 없다
새로운 시작
2001년이 밝았다. 나는 박 회장의 투자 제안을 거절한 후 새로운 기회를 잡기 위해 계속 사람들을 만나고 내 비전을 알리려 노력했다. 그러던 중 나를 지켜보던 지인 한 분이 자신이 아는 외국계 회사가 있는데, 홍보마케팅을 시도하려고 한다면 그 일을 맡아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듀비스를 키운 것도 홍보마케팅이었지만, 사실 그 분야의 일을 해볼 생각은 하번도 한 적이 없었다.
'르네휘테르'라는 헤어 관련 제품을 생산해 판매하는 프랑스 기업이었는데, 100년 이상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고 있었다. 프랑스 본토에서는 로레알의 경쟁자로 유명한 회사였지만, 당시 한국에서의 상황은 참담했다. 론칭한 지 1년이 됐지만, 시외 변두리 미용실 몇 군데에 외상으로 입점한 것이 전부였다. 그만큼 국내에서 경쟁회사의 영향력은 막강했고, 유명 미용실의 진입 장벽은 높았다. 그렇게 1년을 보냈으니 대부분의 직원들은 무기력감과 패배의식에 젖어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먼저 회사의 전체 흐름을 어떻게 하면 바꿔볼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럴 때 마침 프랑스 본사의 두피케어리스트가 교육 때문에 한국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이 기회를 통해 내부 직원들의 사기도 올리고 시장에 르네휘테르라는 브랜드의 존재도 알려야겠다. 호텔에서 기자간담회를 개최하고 그 자리에 한국 미용업계 리더들도 초대해 르네휘테르라는 브랜드의 고급스럽고 파워풀한 이미지를 보여주고 경쟁심을 유발시켜서 유명 미용실마다 먼저 입점하게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나는 곧바로 '박준미장원'의 박준원장, 미용사협회 회장단 등 한국미용업계에서 내로라하는 유명 리더들의 리스트를 작성했다. 하지만 당시 직원들은 내 계획에 대해 대부분 부정적이고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연락을 돌리고 미팅을 갖는 모든 일을 직접 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초대장을 발송하고 며칠 후 직접 방문해서 기자간담회에 대해 설명을 했다.
간담회 당일, 나는 기대감과 혹시나 하는 불안감으로 초조하게 호텔에서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유명 신문사 기자들이 먼저 와서 자리를 잡았고, 초대한 모든 유명 헤어숍 원장들과 미용인 협회 회장, 부회장까지 하나둘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우리의 기자간담회가 졸지에 한국 미용업계 최고의 리더들이 모인 자리가 된 것이다. '설마 되겠어?' 하는 부정적인 시각으로 방관하던 직원들은 그 상황에 놀라며 한편으로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고, 참석한 유명 헤어숍의 본점에 선금을 받고 입점하는 좋은 조건으로 전부 계약하게 되었다.
이 일로 회사는 유명 브랜드의 포지션을 찾게 되었고, 향후 적극적인 영업 전략을 펼칠 수 있는 시발점이 되었다. 더구나 패배의식에 젖어 있던 직원들도 회사에 대한 자부심과 비전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나 역시 잃었던 자신감을 회복했고, 내가 누구보다 잘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이 일을 시작으로 나는 홍보마케팅회사 (주)씽크플레이스를 설립해 다른 기업들의 홍보 전략을 기획해주는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되었고, 창업 2년 만에 홍보마케팅 분야에서 국내 최고의 매출을 달성하는 성과를 냈다. 르네휘테르의 성공적인 변화로 인해 나에 대한 소문이 조금씩 퍼져나갔다. 기획력과 행동력이 창의적인 사람으로 인정받고 하나둘 홍보마케팅을 요청하는 회사들이 늘어가기 시작했다.
성공한 CEO들을 면접보다
홍보마케팅을 하면서 때때로 진행했던 리크루팅이 좋은 결과를 낳자 고객사들 사이에 소문이 돌았고, 소개에 소개가 이어져 곳곳에서 리크루팅을 해달라는 요청이 끊이질 않았다. 그리고 이전의 결과에 흡족해 했던 한 기업에서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리크루팅 요청을 해왔다. 2002년 가을, 삼십대 초반에 불과한 나에게 성공한 전문경영인들을 리크루팅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사연인즉슨, 고객사에서 자본금 400억 정도 되는 회사를 새로 설립해서 대한민국 제일의 유통회사로 키우고 싶으니 그렇게 성장시킬 수 있는 전문경영인을 영입해달라는 의뢰였다.
곧바로 가장 실력이 뛰어난 헤드헌팅 업체 세 곳의 추천을 받아 대략 30명의 전문경영인들과 맨투맨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때로는 내 사무실에서, 때로는 호텔 카페에서 진행된 인터뷰를 통해 나는 나보다 커리어가 뛰어난 분들을 시험하고 평가했다. 대부분 40대 후반에서 50대 정도였는데, 누구나 알 만한 대기업의 대표를 지낸 분들이거나 대기업의 전·현직 임원진들이었다. 사실 평소라면 한번 만나보기도 어려운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한 달 반 동안 진행된 인터뷰 속에서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인터뷰를 진행한 후에 적합하다고 생각한 몇 명의 전문경영인을 선별해 경영진으로 추천했다. 결혼정보회사를 정리하고 다시 새롭게 홍보마케팅회사를 설립한 것도 도전이었지만, 그 와중에 리크루팅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더구나 성공한 전문경영인들을 인터뷰한다는 것은 내게 또 다른 도전이었다.
루머에 의한 우울증
여전히 남아 있는 월드컵의 감동과 흥분으로 대한민국이 살짝 들떠있었던 2002년의 연말이었다. 가을 내 진행했던 전문경영인들과의 인터뷰가 끝나고 고객사는 최종적으로 추천한 인물들을 신설법인의 등기이사로 올리고 새로운 회사의 틀을 만들고 있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하던 중에 신생기업의 모기업인 고객사의 경영진들이 세무조사를 받으면서 일부는 해외로 도망가고 일부는 구속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뒤 이어 고객사의 주주 및 회원들은 8인으로 구성된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를 만들고 상황 수습에 열을 올렸다. 그런데 그 중 몇 명의 위원들이 회사의 자금을 횡령하려는 계획(후에 알았지만)을 세웠다.
그 당시 대부분의 자산이 신설법인에 속해 있고 또한 그곳에 법적 경영진들이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들 뜻대로 돈을 인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자 그들이 택한 방식은 신설법인의 설립을 도운 나를 부도덕한 사람으로 매도하고 음해하는 것이었다. 나를 깎아내린 후 내가 추천한 전문경영인들 역시 믿을 수 없는 한 패거리라는 공식을 만들어 기존의 경영진들을 밀어내고 자신들이 경영진이 될 생각을 한 것이다. 하루아침에 나에 대한 음해성 루머가 만들어지고, 이것이 다시 확대·재생산되기 시작했다. 그 신설법인에서 수백억을 빼돌렸다는 얘기부터, 예전 사업할 때도 수십억을 횡령했고, 그래서 교도소까지 갔다 왔다는 얘기까지 들렸다. 우연히 그 소문들을 들은 나는 너무나 황당한 나머지 곧바로 비대위를 방문해 항의했다. "당장 회계사를 선임해 그 회사와 우리 회사 둘 다 감사 실시하고 결과를 공식적으로 발표하세요! 그리고 우리와 맺은 계약도 해지하고 싶으면 하세요. 내가 받은 계약금 다 돌려줄 테니 깨끗하게 정리합시다."
물론 적지 않은 계약금이었지만, 회사의 신뢰에 상처를 입히는 상황에서 그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그런데 내가 항의를 하자 비대위원들이 갑자기 쩔쩔매며 사과를 하는 것이 아닌가? "미안해, 임 사장. 조금만 참아줘. 지금 혼란기라 그러니 조금만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그 말을 믿지 않았어야 했다. 그 당시에는 알 수 없었지만, 모든 것은 그들의 권모술수였다. 내 앞에서는 미안해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뒤돌아서서는 또다시 새로운 루머를 만들어냈다. 그러던 와중에 고객을 가장한 4인조 강도에게 납치를 당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지만, 정신적 외상은 오래갔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납치 사건의 공범에 비대위원 중 하나가 연루되어 있었다. 사람에 대한 실망과 납치사건으로 인한 정신적 스트레스가 너무나 심했기 때문에 위약금을 물고 모든 계약을 해지했다. 그리고 업계 1위까지 성장시켜 놓은 회사도 내 손으로 정리했다.
단 한시도 사람들과 부딪히고 싶지 않았다. 오랜 시간 동안 어려운 환경 속에서 극도의 긴장감으로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모든 힘을 잃고 탈진해 쓰러지는 느낌이었다. 마치 극도로 팽창하던 풍선이 극점에 이르러 펑 하고 터지듯이 내 자신이 산산조각 나는 아픔과 무기력감을 느꼈다. 결국 비대위원들은 자신들이 원하던 대로 신설회사의 이사들로 선임되었지만, 수십억에 달하는 자금을 횡령한 것이 들통 나서 고소를 당했다. 하지만 나에 대한 루머는 사그라지지 않았고, 계속되는 오해 속에서 명예는 추락할 때까지 추락했다. 화병에 우울증이 겹쳐 밤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모든 의욕도 꿈도 잃은 상황에서 죽음으로 명예를 지키자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서 지인들에게 남기는 유서를 작성했다. 지금도 유서의 마지막 부분은 기억이 난다. "이런 루머를 만든 비대위원들, 그리고 그것을 확대·재생산한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 모두 인생 그렇게 살지 마라. 나는 당신들 때문에 죽는 것이다. 당신들은 살인을 한 것이고, 평생 살인자라는 멍에를 뒤집어쓰고 죄책감 속에서 살아야 한다." 유서를 작성하고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한참을 펑펑 울었다. 그냥 눈물이 계속 흘렀다. 다행인 것은, 나는 여전히 살아있고 지금도 새로운 길을 가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2003~2010
2003년은 나에게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씽크플레이스를 정리하고 삶과 죽음의 기로를 수없이 오갔다. 몇 번의 미숙한 자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무력감이 몸과 마음을 지배하고 삶의 덧없음을 너무 일찍 깨달아버린 나는 그저 바람이 되고 싶었다. 이 땅에 미련이 없었다. 배낭 하나 둘러멘 채 남미로 떠났다. 남미를 정처 없이 떠돌던 나그네는 이내 북미를 거쳐 유럽까지 그의 발걸음을 이어갔다. 그리고 우리나라로 돌아와 다시 전국을 떠돌아다녔다. 그렇게 30대의 7년을 보헤미안으로 살았다.
그리고 2010년, 나는 서울로 돌아왔다. 전 세계를 떠돌며 깨달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 기발한 아이디어, 그리고 새로운 삶의 해답을 가슴에 품었다. 그리고 씽크플레이스의 연장선에 해당하는 (주)씽크이지를 창업했다. 30대에 100m 달리기에 목숨을 걸었던 나는 인생의 마라톤을 위한 훈련을 마치고 이제 그 첫걸음을 떼는 것이다.
제4막 Think Easy - 쉽게 생각하자
시작은 반 이상
사실 무엇인가 시작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시작을 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두려움이다. 막연한 두려움은 가만 두면 점점 커져 더욱 자신을 부정적인 생각과 상황으로 내몬다. 그러면 결국 스스로 움츠러들어 아무것도 못하게 된다. 무언가를 시작할 때는 가슴 속에서 두려움의 울부짖음이 들릴 것이다. 두려움은 시작된 초기에 그 싹을 잘라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공상에 빠져 있으면 공상은 두려움을 더욱 키워 마음을 잡아먹는다. 2000년에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부도의 위기에 몰릴 때 나는 이것을 실제 경험했다. '언론에는 성공한 벤처사업가로 알려졌는데, 부도가 나면 부끄러워서 어떻게 살지? 직원들은 또 어떻게 봐? 정말 부도가 난다면 난 그냥 죽어야 겠다.' 공상이 커지며 죽음까지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부도가 나니 괴롭기는 했지만, 결국에는 굳게 마음먹고 견딜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나도 살아오면서 참 많은 것들에 도전해왔다. 때때로 두려움을 느끼는 상황들이 있었지만 다행히 용기를 내서 잘 극복해왔다. 처음 500만 원을 가지고 사업을 시작할 때도 마찬가지다. 떠오르는 걱정과 두려움들을 그대로 두었다면 아마 제대로 시작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무엇인가 처음 시작한다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고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처음 시작하는 것에 대한 마음의 부담감을 던져버리고 가볍게, 그리고 쉽게 생각하려고 해야 한다. 결과가 좋든 그렇지 않든 시도해봤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값진 경험을 한 것이다. 또한 그 경험은 우리를 분명하게 성장시켜 준다.<“쉼표는 있어도 마침표는 없다”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임수열 지음, 지상사>
▣ 저자 임수열
20대 중반 전국적인 에스테틱 프랜차이즈 ‘샬롱드보떼’를 기획하고 첫 점포 인테리어를 진행하던 중 선배의 사기로 하루아침에 서울역 노숙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우연히 주워 든 잡지에서 영감을 얻어 노숙자 신세에서 탈출, 단돈 500만 원으로 결혼정보회사 듀비스를 창업했다. 그러나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인해 코스닥 상장을 눈앞에 두고 부도로 넘어지고 말았다. 다시 홍보마케팅회사인 씽크플레이스를 창업하고 창업 2년 만에 서비스 매출 70억을 달성하며 홍보마케팅 업계 1위의 기업으로 키워냈다. 하지만 4인조 강도에게 납치를 당한 후 심각한 우울증으로 수차례 자살을 시도했다. 2010년 PR컨설팅회사인 씽크이지를 창업했고 현재 씽크이지의 대표이자 리더십 강사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항상 두려움 없는 도전정신과 민첩한 게릴라정신으로 성공을 향해 매진하고 있으며 각종 강연을 비롯해 블로그,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SNS를 통해서 자신의 경험과 인생 노하우를 나누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