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어둔 밤(1897-1901)
챔버스의 설교나 가르침 속에는 개인적인 영적 체험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한 가지 매우 희귀한 예외가 있긴 한데, 그것은 더눈에서 처음 있었던 4년 동안에 그에게 발생한 일에 대한 기록이다.
소년 때 거듭난 후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놀라울 정도로 체험하며 즐거워했다. 그러나 내 자신을 주님의 사역에 철저하게 포기하기까지는 많은 세월이 흘러야 했다. 메이어 박사가 이곳 더눈 대학에 와서 성령에 대해 설교할 때, 나는 철학 강사로 있었다. 나는 그때 진행되는 일에 대해 다 체험하기를 다짐하고 내 방으로 가서 성령 세례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든 상관없이 하나님께 단순하고 분명하게 성령 세례를 간구했다. 그런데 그날부터 4년간 하나님의 강권하시는 은혜와 친구들의 친절은 나를 은둔처에서 나오게 만들었다. 하나님은 4년 동안 나를 사용하셔서 많은 영혼들을 회심하게 하셨다. 그러나 정작 나는 주님과의 의식적인 소통이 없었다. 성경은 가장 딱딱하고 재미없는 책이었으며 내 안에 있는 부패와 사악함과 나쁜 동기들은 지독하게 심각했다.
다른 사람들은 챔버스의 모든 삶이 훌륭하다고 생각하며 그를 성자라고 불렀지만, 그는 자기 마음속에 죄의 전염병이 있다는 사실을 홀로 깨닫고 있었다. 그 과정은 챔버스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으로 마치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 받으신 것처럼 홀로 외로이 싸우는 몸부림의 기간이었다. 1899년 5월, 챔버스가 목사 안수를 받자 대학과 외부로부터 그를 집회 강사로 초청하는 요청이 급격히 많아졌다. 그러나 그가 유명해질수록, 그의 내면의 갈급함은 더욱 커지는 것 같았다.
후에 그는 몇 번의 공식적인 집회와 사적인 대화 가운데, 이 체험을 ‘새로운 시작’이라고 표현했다. 그에게 성령 체험은 입구였지 목적지가 아니었다. 주님께서는 천천히 그를 목적지를 향해 인도하고 계셨다.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시종일관 동일한 사람이었다. 재능이 많고, 적극적이고, 유머감각이 있고, 정확하고, 깊은 생각을 하는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자신만은 알고 있었다. 내면의 깊은 요동을 잠잠케 한, 변화시키는 평강이 비로소 임했던 것이다. 마침내 그의 긴 밤은 끝나고 평화가 찾아왔다. 그의 마음의 요새는 승리하신 그리스도로 인해 무너진 것이 아니라, 주의 상처 받은 손의 부드럽게 두드리는 문소리에 의해 무너졌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삶의 이야기는 27세부터 새롭고 강력한 힘으로 드디어 다시 시작되었다.
더 넓어진 범위(1902-1906)
챔버스가 결정적으로 하나님께 완전하게 항복한 사건은 그의 삶을 깊게 변화시켰다. 이 체험이 있은 지 얼마 후 그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 사건을 언급했다.
“네가 성령 세례에 대해 내가 그 자리까지 당장에 이르거나 쉽게 갔는지를 질문하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 쉽지 않았어. 많은 친구들이 나를 추켜세우는 것을 즐기는 마음과 나의 교만은 오랫동안 나를 붙들고 있었지.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내려놓기로 하고 제단 되시는 예수님께 나 자신을 제물로 드렸을 때, 이 모든 것이 시작되고 이루어진 거야. 거룩은 스스로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네. 경건주의적 경향은 주님만을 온전히 마음을 다해 받아들이려고 하기보다 자신을 성찰하면서 자신의 진심을 우상으로 만들려는 위험성이 있어. 이는 경건을 빙자한 사기로, 우리는 이러한 경건주의를 엄청나게 좋아하지. 그러나 주님이 거룩하게 하시고 성결하게 하시며 모든 것을 다 하시지. 내가 해야 하는 유일한 것은, 가난한 심령으로 주께 나아가 간구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라네. 자신에 대한 모든 권리를 내려놓고 로마서 12장 1-2절에 따라 행하는 것일세. 성령 세례는 절대로 ‘이것을 하라, 저것을 하라, 그러면 당신은 주님과 함께하게 될 것이다’라는 식으로 되지 않고, ‘내가 너를 통하여 일할 수 있는 상태가 되도록 너를 비우라’는 식으로 이루어진다네. 즉, 손을 들어 항복을 선포하고 다 내려놓는 거야. 그러한 가운데 주님만 온전히 의지하는 것일세.”
더눈에서 5년 반을 더 지내는 동안 챔버스는 능력 있는 설교자로 성장했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았다. 그는 독특하고 강력한 표현력의 은사 위에 전에는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재치와 유머, 배려의 소질을 더했다. 챔버스는 그 시대의 최신 신학의 글들뿐 아니라 발자크의 소설과 입센의 희곡, 조지 맥도널드의 문학들을 읽었다. 그가 좋아하는 책들 중에는 알렉산더 와이트 목사, 제임스 데니 목사, W. R. 잉게 목사, 조웨트 목사가 쓴 책들이 있다. 챔버스와 맥그리거 모두 당시의 소설과 극장에 대해 대부분의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과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지나치게 감각적이지 않다면 오히려 인간의 상태를 그림처럼 보여주는 유용한 수단이라고 여겼다.
챔버스는 퍼스에서 열린 기도 동맹 집회에 처음으로 참석한 후 스코틀랜드 및 영국 북부에서 열리는 동맹 집회 등에서 가끔 설교를 하기 시작했다. 그 동맹의 창설자인 리더 해리스가 챔버스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더눈에서 온 예리한 젊은 강사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해리스는 챔버스의 비전이 영국에 국한되지 않고 세계를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해리스는 법률계에서 실력과 성공을 인정받아 평생 고용직인 왕실 고문 변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왕실 사회로부터 런던의 빈민가에 이르기까지, 그는 용맹과 자비가 넘치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자유롭게 활동했다.
1905년의 크리스마스 휴일 동안, 챔버스는 형 아서가 섬기는 엘쌈 파크 침례교회에서 일주일의 선교 집회를 인도했다. 그때 성령께 완전히 굴복하라는 챔버스의 열정적인 부름에 응답한 사람들 중에는 22살의 거트루드 홉스가 있었다. 그녀는 이 집회가 있기 겨우 2개월 전에 세례를 받아 교회 성도가 되었다. 그녀의 집에 초청되어 그녀의 어머니와 다과를 나누며 말씀을 나눌 때, 거트루드의 눈은 아무것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이때가 챔버스와 거트루드 사이에 관심의 불꽃이 터진 시간이었다면, 이후 그 불꽃이 화염이 되는 데는 2년 반이 걸린 셈이다.
챔버스는 1906년을 맞이하여 마음속에 타오르는 성경 구절을 가지고 더눈으로 돌아왔다. “너희는 모든 세계로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새로운 전진 명령을 내리실 때가 거의 다가온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 명령이 언제, 어떻게 올 것인지, 자신을 어디로 이끌 것인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는 다시 가르치는 일에 파묻혔다. 몇 개월 후 그는 퍼스의 기도 동맹 모임에서 주지 나카다를 만나게 된다. 일본 선교사인 그는 안식을 취하며 영적으로 재충전하기 위해 영국을 방문하고 있었다. 그들은 처음 만날 때부터 특이한 친밀함을 느끼며 서로 함께 일하라는 소명을 받았다.
나카다는 영적인 능력을 얻기 위해 일본을 떠나 시카고로 가서 1897년, 무디 성경대학에 입학했다고 했다. 그는 일본에서 열정적이고 능력 있는 선교사로 인정받고 있었지만 스스로 영혼의 메마른 상태를 알고 있었다. 존 웨슬리의 글과 무디 성경대학에서의 친구들을 통해 나카다는 그가 찾는 것이 바로 성령 충만인 것을 발견했다. 그는 근처 교회의 카우먼 부부를 통해 신시내티에 세워진 마틴 웰스 냅의 ‘하나님의 성경학교’를 소개받아 공부하다 일본으로 돌아갔다. 1901년, 카우먼 부부는 선교사의 신분으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나카다와 함께 힘을 합쳐 도쿄 성경대학을 창립했다.
나카다는 “그러므로 모든 나라로 가라”는 주의 명령을 상기시키며 챔버스의 마음을 비집고 들어왔다. 둘은 먼저 그들이 현재 서 있는 자리에서부터 시작하기로 결심하고 우선 웨일스를 방문하여 부흥을 통해 최근 회심한 자들에게 거룩의 메시지를 설교하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마무리하고 떠나기 위해 더눈으로 돌아오자마자 챔버스는 심하게 앓게 되었다. 그는 형 아서가 ‘그의 경력을 거의 망칠 것 같은 심각한 병’이라고 부른 어떤 질병에 걸렸던 것이다. 아마 결핵이었던 것 같다. 맥그리거 부인의 지극한 돌봄으로 간신히 회복되었지만, 이번에는 맥그리거를 향한 깊은 존경과 개인적인 깊은 관계가 그의 떠남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그는 맥그리거와 9년 반을 함께 보내며 어떤 면에서는 자기 아버지보다 더 그를 사랑했던 것이다. 챔버스는 그와의 이별을 기록할 때 자신의 감정을 비유적으로 “참으로 밤이었다”라고 표현했다.
그해 여름과 가을, 나카다와 챔버스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여러 교회들과 기도 동맹 센터들을 방문했다. 그리고 11월 6일, 마침내 그들은 미국과 캐나다에서 겨울을 보낼 계획을 세웠다. 뉴욕을 향하는 대양 여객선에서 나카다는 매일 아침마다 2층 침대에서 기도하는 챔버스를 보며 놀랐다. 그는 천천히 기도일지를 넘기며 수십 명의 친구들을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중보기도하고 있었다. 멀미기가 있었던 나카다와는 달리 챔버스는 열린 갑판으로 나아가 북대서양의 부서지는 파도를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이 첫 번째 항해에서 챔버스는 바다의 광대함과 힘에 경탄했다. <“순종의 길(1부-3부)”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데이빗 맥캐스랜드 지음, 역자 스테반 황교수, 토기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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