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미국인들이 무기력할까?
노동조합과 무기력한 노동자들
2010년 1월 8일, 미국 노동부에서는 실업률이 10%이며 1,530만 명이 실직 상태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실업률 10%라는 정부 통계에는 920만 명의 비자발적 시간제 근로자와 250만 명 정도의 한계근로자(노동인구에 포함되지 않지만 일자리를 원하고 근로 능력이 있는 사람들)가 포함되지 않는다. 따라서 미국인들의 18% 정도가 스스로를 실업 상태 또는 반실업 상태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2008년의 마지막 4개월 동안, 그리고 2009년 내내 미국인들은 한 달에 평균 50만 개가 넘는 엄청난 속도의 일자리 감소로 고통을 겪고 있었다. 사람들은 주위의 이웃과 친구, 가족과 동료가 일자리를 잃는 모습을 보았다. 아니면 자기 자신이 해고를 당하기도 했다. 벌이가 괜찮은 제조업 일자리가 없어진다거나, 실질임금이 하락하고 빈부격차가 커지고 있다거나, 중산층이 사라진다는 이야기는 꽤 오래전부터 듣던 것이었다. 그런데 왜 더 많은 노동자들이 거리로 뛰쳐나오지 않았을까? 2010년 1월 29일 미국의 저명한 언론인인 빌 모이어스가 AFL-CIO(미국노동총동맹 산업별조합회의) 위원장 리처드 트럼카에게 던졌던 질문이 바로 그것이다.
빌 모이어스: 리치 씨, 저는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시위에 나서지 않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예를 들면 작년에 우리는 시카고의 노동자들이 공장 폐쇄를 앞두고 연좌농성을 했다는 이야기를 보도했거든요. 왜 요즘은 그런 움직임이 활발하지 않을까요?
리처드 트럼카: 그건 사람들이 너무 지친 나머지 아예 희망을 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임무는 바로 그 희망을 되살리는 일이죠. 사람들은 자기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절망해버리는 겁니다. 기업들이 강력한 힘을 가지고 정치적 절차를 통제하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예 없다고들 생각해요. 물론 그건 틀린 생각입니다. 이제 자기 목소리를 내려는 사람들도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미국 내의 고통 받는 노동자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항의에 나서지 않고 있다는 빌 모이어스의 관찰은 전반적으로 정확했다. 미국의 50개 주를 제외한 미국 영토와 전 세계의 다른 나라들에서는 2009년 내내 일자리 축소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2009년 10월 푸에르토리코에서는 수천 명의 노동조합원들이 ‘2만 명이 넘는 노동자를 정리해고한다’는 정부의 계획에 항의했다. 2009년 스코틀랜드에서는 조니워커 공장폐쇄에 항의하기 위해 2만 명 이상이 거리로 나왔다. 2010년 10월 프랑스에서는 노동자 정년을 60세에서 62세로 변경한다는 정부의 계획에 반발하여 주요 노동조합이 모두 전국적 파업에 돌입하는 바람에 비행기와 기차 여행이 모두 취소되고 국민들의 일상생활이 엉망이 되었다. 만약 미국 정부가 사회보장을 받는 연령을 끌어올리려 한다 해도 미국인들이 프랑스 사람들과 비슷한 행동을 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거대한 억압, 미미한 저항
물론 미국에도 대중의 저항 운동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다른 나라와 비교하거나 미국 역사 속의 다른 시기와 비교하면 지금의 저항은 너무나 미약해서 도무지 기업정치의 권력자들이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일 것 같지가 않다. 대다수 선진국과 비교할 때, 미국의 국민들이 억압을 당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미국인들의 노동과 세금 납부는 다른 선진국 국민들과 어떻게 다를까?
명확하고 구체적인 지표는 노동시간과 휴식이다. 대다수 선진국들과 달리 미국에는 기업이 피고용인에게 유급 휴가를 의무적으로 주어야 한다는 연방정부 법률이 없다. 미국에서는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간에 노동자들이 연 평균 9일의 유급 휴가를 받고 6일치의 공휴일 수당을 지급받는다. 그리고 미국의 노동자 4명 중 1명은 유급 휴가를 전혀 얻지 못한다. 유럽연합(EU) 회원국들은 의무적으로 노동자에게 공휴일을 제외하고 1년에 최소 20일의 유급휴가를 보장해야 한다.
또한 미국의 건강보험 체계는 아픈 사람에게나 건강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미국을 제외한 거의 모든 선진국에서는 누군가가 병에 걸리더라도 당사자와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오로지 건강을 회복할 걱정만 하면 된다. 질병 때문에 경제적으로 파산할까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대다수 선진국에서는 누군가가 일자리를 잃더라도 오로지 다른 일자리를 찾을 걱정만 하면 된다. 의료보험이 없는 신세가 될까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미국에서는 순전히 의료보험료를 납부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매년 수천 명이 사망한다. 최근 의료보험 개혁안이 통과되긴 했지만 대다수 미국인이 가질 수 있는 의료보험은 여전히 형편없는 수준이다.
다른 선진국들과 비교할 때 미국인들은 휴가와 의료보험만이 아니라 고등교육이라는 측면에서도 기만당하고 있다. 대다수 선진국에서는 고등교육에 대한 정부 보조금의 비율이 높고 학비가 무료이거나 아주 저렴한 편이다. 미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대학 졸업생들이 빚을 잔뜩 안고 사회에 진출하지 않는다. 대다수 선진국들과 달리 미국 연방소득세의 나머지 부분은 불필요한 전쟁에나 쓰이지 국민을 위해 쓰이지 않는다.
이처럼 대다수 미국인들은 기업 엘리트와 비교해서 자신들이 경제적으로 불공정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단순 논리를 따른다면 상황이 나빠질수록 사람들의 저항도 거세져야 하겠지만, 현실에서는 그 논리보다 ‘심리학적 논리’가 힘이 센 듯하다.
<“Get up Stand Up(깨어나라 일어나라)”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브루스 E. 레빈 지음, 역자 안진이님, 베이직북스>
▣ 저자 브루스 E. 레빈
《허핑턴 포스트》, 《카운터 펀치》, 《얼터넷》, 《Z매거진》 등의 인터넷 매체에 정기적으로 글을 기고한다. 그의 칼럼과 인터뷰는 《애드버스터즈》, 《에콜로지스트》, 《하이 타임즈》를 비롯한 다수의 잡지에 게재되었다. 주로 임상심리 전문가로 활동하면서 종종 주류 심리학에 반기를 드는 그는 강연과 워크숍 활동도 병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우울증을 이겨내고 상식적으로 반항하기(Surviving America’s Depression Epidemic and Commonsense Rebellion)』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