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자료

적응 연속성

[중산] 2011. 12. 19. 18:22

 

 

보일의 법칙을 다윈의 혁명으로 변형시킨다_ 스티븐 제이 굴드: 미국의 고생물학자, 진화생물학자, 하버드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적응 연속성: 나는 찰스 다윈이 진화를 옹호하고 진화의 메커니즘을 적응에 대한 설명으로 본 것을 영국의 자연사와 오랜 신화적 전통에 그 뿌리가 있음을 입증하고자 한다. 우리가 현재 극단적 다윈주의의 사고방식이냐 구조주의적 사고방식이냐를 놓고 벌이는 싸움들도 동일한 논쟁을 계속하는 영국적인 연속성이라 확신한다. 영어권의 진화론자들은 적응의 탁월성을 받아들이는 데 대단히 익숙해서 그런 탁월성을 또 다른 의미가 없는 자명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적응을 진화의 중심 현상으로 설명하는 것은 특히 영국적인 전략이며, 전혀 보편적인 접근 방식은 아니다. 다윈 혁명의 특성은 적응을 중심 주제로 삼은 것이 아니라, 적응에 대해 근본적으로 새롭고 완전히 전도된 설명을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좋은 설계는 적어도 200년 동안 영국 자연사의 주제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는 적응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좋은 설계에 대해 신의 지성을 설명하려는 피상적이고 특별한 일련의 조작(근본적인 구조와 동물의 분류학적 질서와 관련한 변화 패턴)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던 대륙의 많은 생물학자에게는 독특해 보였을 것이다. 대륙의 구조주의자들은 대부분 물갈퀴가 있는 오리의 발이나 땅을 파기에 좋은 두더지의 앞발을 신의 전지전능만큼 황송하고 일반적인 무언가를 설명하기에는 너무도 기묘하고 보잘것없는 것으로 여겼다. 동물학자이자 마지막 과학적 창조론자였던 스위스의 루이스 아가시는 동물의 분류학적 구조가 신의 본성과 의도를 가장 잘 드러낸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각각의 종은 신의 마음속에서 구체화된 생각이고, 종들 사이의 관계는 신의 정신적 기제라는 특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보일의 공식: 과학 혁명의 개척자들은 자연에서 신의 역할에 대해 독특한 태도를 유지했다. 모두가 독실한 유신론자였지만 아마도 로버트 보일(Robert Boyle, 아일랜드의 자연철학자)보다 더 독실한 유신론자는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신이 원할 때마다 혹은 필요하다고 느낄 때마다 자연사에 기적적인 개입을 한다는 신의 전통적 특권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리고 사실상 언제나 신이 그렇게 개입하지는 않을 것이다. 영속적으로 자연의 일에 개입해 자신의 전지전능으로 마땅히 예측했어야 할 어떤 결함을 수정하는 신은 사실 보잘것없고 무능할 따름이다.

 

 

태초에 법칙을 제대로 만들어 그 후에는 자연이 자신이 정한 불변의 원칙에 따라 돌아가게끔 하는 시계공(clockwinder) 신이라는 이러한 원칙은 진지한 믿음과 구속받지 않는 과학 사이의 아름다운 조화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작적인 태도는 패러독스를 수반한다. 만약 하늘이 신의 영광을 선포하고 창공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낸다면, 우리가 모든 진실 가운데서 가장 근본적인 진실을 어떻게 알겠는가? 우리가 어떻게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알겠는가? 이 패러독스와 관련해 가장 재미있는 분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인(final cause) 원칙에서 찾을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학(Organon)』에서 인과율(causality)을 네 가지 독특한 양상으로 나누었으며, 그것을 각각 질료인(meterial), 동력인(efficient cause), 형상인(formal cause) 그리고 목적인으로 명명했다. 집의 비유를 이용하면, 질료인은 건축물의 재료다. 동력인은 그 효과를 실제로 조작하는 사람들로서 벽돌을 놓는 벽돌공이 여기에 해당한다. 형상인은 그 건축물을 좌우하는 추상적인 계획이나 원형이다. 목적인은 목적이다.

 

 

목적인은 무생물에는 적용되지 않으며, 생물의 진화에서는 자연선택의 우연한 결과로 받아들여진다(두더지는 땅을 파기에 좋은 튼튼한 앞발을 갖고 있지만, 그러한 구조를 의식적으로 진화시키기 위해 노력하지는 않았다). 인간의 뇌는 우리에게 원래 의미의 의도성과 목적인을 허락했지만, 인간은 자연에서 괴짜나 다름없다. 그러나 어떤 자연 현상이 그 목적인을 발견하고 설명하는 데 가장 적합할까? 보일이 설명하는 논리를 따라가면 곧바로 생물과 그들의 좋은 설계로, 요컨대 신의 존재와 속성을 보여주는 본질적인 자연현상과 같은 적응으로 이어진다.

 

 

보일은 목적인에 대한 두 가지 주요 상반된 철학적 믿음을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변칙적인 우주는 어떤 목적도 드러낼 수 없다는 에피쿠로스학파의 믿음과 신의 목적은 형언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위대해서 인간은 이해할 수 없다는 데카르트학파의 주장이 그것이다. 보일은 우주의 삼라만상을 목적인을 설명하기에는 너무 큰 카테고리로 인식한다. 태양과 혜성은 신의 목적을 갖고 있는 게 틀림없지만, 여기서는 데카르트가 당연히 옳다. 왜냐하면 작은 행성에 사는 우리 같은 작은 거주자들은 신의 목적이 너무 커서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주의 존재는 확실히 신의 영광을 보여주지만, 신이 우리에게 자비롭다거나 우리를 아낀다는 것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대안적 개념화의 중요성: 우리는 이제 17세기를 살았던 보일의 개념적 감옥의 한계를 쉽게 인식할 수 있다. 보일의 자연 세계는 어떤 역사적 관점도 포함하고 있지 않았다. 그의 자연관은 도처에 편재하는 목적을 분명히 나타낸다. 따라서 그는 계통으로 배열된 체제에서 다르게 그리고 적절하게 만들어진 광범위한 현상 때문에 곤경에 처하지 않을 수 없다. 적응은 항상 진화론적 사고에서 꼭 필요한 주제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생물은 정말로 잘 설계되려는 경향이 있고, 자연선택은 입증된 유력한 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응이 반드시 생명 변천사의 탁월하고 지배적인 현상인 진화의 인과 작용의 기본적 결과일 필요는 없다. 어쩌면 대륙적 인식이 더 옳으며, 대부분의 적응은 근원적 구조의 부차적이고 특수한 변형이자 그것들의 변형된 원칙과 규칙성의 산물로 평가될지도 모른다.

 

 

나는 진화론적 생물학 안에서 극단적 다윈주의의 궤변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전문가는 그러한 견해의 한계를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의 대표적 선두 주자인 리처드 도킨스는 오직 신학적이라고만 불릴 수 있는 신조에 계속 집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오히려 다른 학문 분야의 전문가들이 진화생물학에 잠깐 발을 담근 상태에서 이 전통적인 관점만을 보고 그 재미있는 단순성에 흠뻑 빠져 또 다른 분야를 그들 자신의 분야로 정확하게 해석했다고 착각하는 큰 오류를 범하는 것이 더 걱정스럽다. 따라서 예컨대 철학자 대니얼 데넷은 극단적 다윈주의를 정확하고 엄밀하게 극구 칭송하는 반면, 다윈주의적 기능주의가 풍부하게 담겨 있는 풍자 글에는 진화심리학을 자처하는 새로운 분야의 패러다임으로 그것을 통용시킨다.

 

 

극단적 다윈주의의 이런 새로운 주창자들은 많은 보편적 특성이 슬프게도 현대 사회에서는 적응하지 못하게 되었지만, 아프리카 사바나에서 생겨났을 때는 적응했을 게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자연선택이 진화의 원인이고, 자연선택이 적응을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화심리학자들은 인간의 모든 보편적 특성의 적합한 기원을 철저하게 극단적인 다윈주의에서 찾는다. 하지만 진정한 대안은 그러한 보편적 특성이 생길 수 있는 많은 비적응적 방법에 대한 인식을 필요로 한다.

 

 

여러 세기에 걸쳐 계속된 이런 논쟁에서 다윈의 입장은 여전히 대단히 타당하며 단순한 역사적 관심 이상이다. 풍부한 자연사를 일차원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지적 소산인 자연선택의 힘을 소중히 여겼던 명석한 사상가로서 다윈은 자신의 전통을 규정한 적응주의에 대한 영국적 성향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동시에 이런 단 하나의 양식에 너무 의존하지 말 것을 경고했다. 사실 그의 이론을 자연선택을 유일하고 전능한 보일의 신과 동일시하는 명색뿐인 이론으로 왜곡하는 것보다 이 놀라운 천재를 불쾌하게 만드는 것은 없을 것이다. 다윈은 『종의 기원』 최종판을 내면서 거의 절망적인 글을 썼다.

 

 

나의 결론들이 최근 들어 많이 잘못 해석되고, 내가 종의 변화 원인을 오로지 자연선택으로만 생각한다고 언급되었기 때문에 나는 이 책의 초판과 그 후에 나온 개정판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인 서론에 나는 자연선택이 변화의 주요 수단이지 유일한 수단은 아니라고 확신한다고 언급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렇게 말해도 전혀 소용이 없었다. 끊임없는 오해의 힘은 정말로 대단하다. 다윈의 기본적 세계관은 적응을 진화의 중심 문제로 규정함으로써 다른 무엇보다도 기능적 양식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면서 현대 과학의 초석을 다진 보일과 그의 동료들로 거슬러 올라가는 국가의 전통에 충성을 표했다. 나는 그동안 수세기에 걸친 생물학 역사에서 가장 지적인 변화를 통환 연속성에 대해 써왔듯이 또다시 똑같은 입장에서 베이트슨을 인용하며 나 개인의 작은 연속성으로 이 글을 마치려 한다. 우리는 그가 이루어낸 유한한 업적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다양성과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무궁무진한 발견의 길을 열어준 독창성 때문에 그를 가장 존경해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은 진화한다”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앤드루 C. 페이비언 엮음, 역자 김혜원님, 에코리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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