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용서할 수 있을까?
행복의 기준 1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오 5, 48) 세상에 그 누구도 고통과 시련을 체험하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특히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힘들게 사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생각하기에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왜 그렇지 못한가를 말하면서 불공평한 세상이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세상에 일정하게 정해진 삶의 표준이나 기준이 있을까요? 즉, 행복과 불행이라는 구분을 정확하게 내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남과 나를 비교하면서 ‘그래서 내가 불행한 것이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해주시는 길은 세상의 기준을 통해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에도 나오듯이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그리고 나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을까요? 세상의 기준으로는 있을 수 없으며, 또 몇몇은 당연히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고 자신 있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제시해주시는 길은 나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 반드시 올바른 길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생각하면서 판단하고 비판하는 길이 아닌, 무조건적인 사랑의 길이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길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가장 올바른 길이기도 합니다.
생각을 해보십시오.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할 때의 내 마음을, 다른 사람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을 품고 있을 때 과연 편안하고 행복하셨습니까? 우리들 모두가 완전한 사랑 안에서 완전한 행복을 누리며 살기를 원하시는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위해서 결정적인 말씀을 하시지요.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에 맞게 살지 못한다고 우리들을 곧바로 벌하십니까? 아니지요. 하느님께서는 완전한 사랑을 가지고서 우리에게 계속해서 기회를 주시면서 우리 편이 되어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하느님처럼 완전한 사랑을 가지고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완전한 사랑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완전한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그 완전한 사람이 될 때 완전한 행복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다섯 번 죽는 김치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 하시자, 백인대장이 대답하였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오 8,7~8) 인터넷에서 우연히 '다섯 번 죽는 김치'라는 재미있는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제목 자체가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김치가 다섯 번이나 죽다니요? 그런데 이 글을 보니까 정말로 다섯 번 죽더라고요. 그 글을 그대로 실어봅니다. 김치가 맛을 제대로 내려면 다섯 번이나 죽는답니다. 땅에서 뽑힐 때 한 번 죽고, 통배추의 배가 갈라지면서 죽고, 소금에 절여지면서 죽고, 매운 고춧가루와 짠 젓갈이 범벅이 돼서 죽고, 장독에 담겨 땅에 묻혀 한 번 더 죽어야 제대로 된 김치 맛을 낸답니다. 정말로 그렇지 않습니까? 이렇게 죽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제대로 된 김치를 맛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들의 삶도 이런 것 같습니다. 우리의 삶이 진정으로 아름다우려면 고통과 시련처럼 보이는 죽음의 삶을 건너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은 정말로 견디기 힘든 고통과 시련이지만, 그 순간을 버티어 내면 제대로 된 나의 아름다운 삶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통과 시련에 대해서 화를 낸다고 절대로 바뀌지 않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참고 견디어 내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입니다. 그 믿음을 통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은총과 축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백인대장을 보십시오. 그는 지배층이라고 말할 수 있는 로마의 백인대장이었습니다. 따라서 피지배층이었던 유대인인 예수님에게 강제적으로 명령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명령보다는 대신 예수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는 순종을 선택합니다. 그 결과 예수님으로부터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라는 커다란 선물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자주 주님께 명령을 내리려고 합니다. 나의 모든 고통과 시련을 당연히 주님께서 없애주셔야 한다면서 명령조로 말합니다. 또한 ‘주님이 이 고통과 시련을 없애주시면 내가 성당 열심히 다니겠습니다.’라는 식의 조건을 내걸기도 하지요. 이는 믿음으로부터 오는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더 큰 실망과 아픔 속에서 헤맬 수밖에 없게 됩니다. 백인대장이 보여주었던 믿음을 내 마음 안에 간직해야 합니다. 이 믿음만이 어떤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큰 행복을 체험하게 만듭니다.
아주 작은 일상에서 행복 찾기
순수한 마음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가 2, 49) 누군가에게 밥을 한 끼 사면, 다음번에는 그에게 반대로 얻어먹기를 기대하게 됩니다. 그런데 다음번에도 내가 밥을 사야 한다면 어떨까요? 좋은 기분을 가질 수가 없지 않습니까? 기분이 좋아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를 돌려받고자 하는 마음이 들기 때문입니다. 사실 밥을 한 끼 살 때 처음에는 순수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받는 것보다는 주는 것이 훨씬 나를 행복하게 해준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돌려받고자 하는 마음이 들면 들수록 주는 것에 그리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대신 마음 한 구석에 작은 분노들이 조금씩 커져만 갑니다.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가를 우리 모두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무엇인가를 주려고 할 때에는 순수한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돌려받고자 해서도 안 되고, 보복을 해서도 안 됩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에 만족하고 있는 그대로 줄 수 있는 순수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마음이었고, 성모님의 마음이었습니다.
복음에도 나오듯이 예수님의 모든 일들을 마음속에 간직하신 성모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마음을 당신 마음속에 새겨서 철저하게 생활하셨던 성모님이셨지요. 따라서 우리 역시 예수님의 모든 일들을 당신 마음속에 간직했던 성모님의 마음을 우리들의 마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전에 인천교구 사제들이 모여 교육도 받고, 성시간과 미사를 함께 봉헌하면서 성화의 시간을 가졌던 ‘사제성화의 날’이 기억납니다. 교육 중에 요셉의원으로 유명한 고 선우경식 선생님의 다큐멘터리를 시청하게 되었지요. 가난한 이들의 벗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예수님을 믿으며 예수님처럼 사시기 위해 노력하셨고 그래서 그 모습과 마음을 보며 코끝이 찡해지는 감동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내 자신은 얼마나 다른 이들의 코끝을 찡하게 느끼게 하는 감동을 주고 있었는가?’라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티 없이 맑은 마음보다는 나 중심적인 이기적이고 혼탁한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예수님과 성모님의 거룩한 마음을 묵상하면서, 우리들의 마음도 예수님처럼 그리고 성모님처럼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때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처럼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바꾸어 생각하기
육신은 죽어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오 10, 28) 한 양념 회사에서 “어떻게 하면 매출이 늘 것인가?”라는 주제로 회의를 열었답니다. 여러 의견을 실행했지만 매출이 높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지요. 그런데 얼마 뒤 한 여사원이 제안한 아이디어를 적용했더니 매출이 배로 올랐습니다. 그 놀라운 아이디어는 “양념통 구멍을 크게 하면 어떨까요?”라는 것이었지요. 이러한 아이디어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어떻게 하면 매출이 늘 것인가?”라는 첫 질문을 “어떻게 하면 조미료를 빨리 사게 할까?”로 바꾸어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조미료를 빨리 사가는 방법을 찾다보니 양념 통 구멍을 크게 해서 소비를 늘릴 생각을 할 수 있던 것이지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고정관념에 갇혀 버리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문제의 한 면만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돌려서 바라본다면 그 문제에 좀 더 쉽게 다가설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이에 따른 답도 쉽게 찾을 수가 있는데 말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잘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만을 바라보고 있으면, 나보다 잘 사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이 보입니다. 그에 비해서 내 자신은 너무나도 초라해 보이지요. 결국 “잘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자마자, “나는 안 돼.”라면서 포기하는 경우가 많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의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즉,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잘 살 것인가?”라는 질문보다는 “어떻게 하면 주님의 뜻에 맞게 잘 살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말이지요. 이 질문에 답을 내다보면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세상의 기준을 따르지 않게 됩니다. 다른 사람과도 비교하지 않게 됩니다. 그보다는 나와 주님과의 관계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도 우리들에게 세상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지요. 그들은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대신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인 주 하느님을 두려워해야 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주 하느님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따라서 이 세상의 기준에 맞춰서 또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생각하면서 잘 살 것을 노력하기보다는, 주님 앞에서 떳떳한 내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우리들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돈 많이 버는 것? 아닙니다.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 아닙니다. 자기 혼자 모든 것을 독차지하는 것? 역시 아니지요.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함께 하나를 이루면서 사랑을 완성하길 원하시고, 그러한 모습을 좋아하십니다. 이를 통해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분은 주 하느님이심을 기억하면서,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즐거운 날들을 만드시길 바랍니다.
작은 것이 더 아름답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오 10, 34) 제가 있는 답동 교구청 근처에는 커다란 재래시장이 있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있었던 시장이니까 무척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시장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재래시장들이 점점 줄어든다고 하지요. 왜냐하면 대형할인마트가 우후죽순 생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대형할인마트를 가면 편하기는 합니다. 없는 물건도 없고, 또 가격도 싸고, 또한 쇼핑하기에 적당한 온도까지 유지하기 때문에 땀 흘리며 재래시장을 갈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 왜 사람들은 더 커다란 것들만을 좇을까요? 이렇게 큰 것들만을 만들고 찾다 보니 정말로 소중한 것들은 보지 못하고 또 찾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 외적으로 크고 화려한 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아주 자그마한 곳에서도 함께 하시는 분이며, 어쩌면 초라하고 볼품없는 곳에서도 진정한 사랑을 나눠주시는 분입니다.
얼마 전, 어떤 책에서 이러한 내용의 글을 읽었습니다. ‘사랑을 했던 사람이 잘 되면 배가 아프고, 사랑을 하던 사람이 잘 안 되면 가슴이 아프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면 머리가 아프다.’ 사랑은 어떻게든 아픔을 가져다주는가 봅니다. 그런데 아픔을 주기는 하지만, 이 뒤에는 더 중요한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건네줍니다. 이를 통해 진정한 행복과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특히 주님의 사랑은 더욱 더 그러합니다. 작은 곳에서부터 계시는 분이기에 겉으로 보기에는 초라해 보이기도 하고, 그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기에는 큰 아픔을 얻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우리가 진정으로 가고자 하는 행복의 길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보면 아주 의외인 이런 말씀을 하시지요.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임으로 인해 칼에 베이는 듯한 아픔을 얻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선택함으로 인해 가족 간의 분열도 생길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당신을 따름으로 인해 진정한 생명을,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말이지요. 아주 작은 일상 안에서도 당신의 사랑을 실천하라는 주님의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비록 이를 통해 큰 아픔을 얻을 수는 있지만, 곧 더 큰 선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르다는 이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오 12, 50) 우리들은 어떤 목적지에 가려할 때 다양한 교통편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서울에 갈 일이 있을 때 어떤 교통편으로 갈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직접 운전해서 갈 수도 있고, 전철이나 버스를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혹시 모르겠습니다. 자전거나 뛰어서 가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겠지요. 다양한 방법이 있는데 이 방법을 선택하는 이유도 분명히 있습니다. 길이 막히지 않는 시간이며 빨리 목적지까지 갈 것이라면 직접 운전하는 방법을 선택할 것입니다. 하지만 많이 막힐 것을 예상해서 또는 교통비 절감을 생각한다면 대중교통을 이용하겠지요. 그리고 시간이 많이 남아 있으며 자신의 건강을 생각한다면 자전거나 건강한 두 다리를 이용할 것입니다.
이렇게 다양한 방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 자신이 쓰는 방법과 다르다는 이유로 무조건 틀린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자가용을 이용하든, 대중교통을 이용하든, 걸어서 가든 그 사람이 지금 생각하기에 제일 합리적인 것을 선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반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사실 예수님을 이해하는 것도 절대로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다른 모습을 너무나도 많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에서도 그러한 장면을 발견할 수 있지요.
예수님께 성모님과 친척들이 찾아왔기에 사람들이 알려드립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반문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가족을 무시하며 살아간다는 것, 특히 자신을 낳은 어머니를 인정하지 않는 듯한 이 말투는 과거나 지금이나 큰 충격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뜻은 부모를 무시하고 가정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 모두가 빠짐없이 한 가족을 이루어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들에게 가르침을 주십니다. 우리들의 편협된 생각들을 꾸짖으시면서 자유로운 당신의 방법을 통해서 강한 깨달음으로 다가오십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주님의 말씀을 새기는 것입니다. 즉,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라는 예수님 말씀이 나를 보면서 하시는 말씀이 되지 않도록, 더욱 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성당에 의무적으로 다니는 것만으로는 선택받기 힘듭니다. 또한 입으로만 하느님의 뜻을 운운하는 것 역시 주님의 선택에서 제외될 것입니다. 몸과 마음으로 주님의 뜻을 실천할 때, 주님의 참된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버리는 연습하기
분별력 있는 선택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마태오 13, 44) 50대 이상 여성에게 꼭 필요한 4가지가 있다고 하지요. 그것은 돈, 딸, 친구 그리고 마지막으로 찜질방이라고 합니다. 맞는 것 같습니까? 그렇다면 50대 이상 남성에게 꼭 필요한 4가지는 무엇일까요? 첫 번째는 아내, 두 번째는 부인, 세 번째는 처,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는 마누라라고 하네요. 그래서 예전에는 ‘인명은 재천’이라는 말을 했지만, 요즘에는 ‘인명은 부인’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퍼지고 있다고 합니다.
우스갯소리로 나오는 이야기겠지만,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살아가는 우리들을 반성해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특히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을 제일 중요한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물론 우리들은 주님보다 물질적인 것들을 더 윗자리에 놓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럴까요?
옛날 어느 나라의 왕이 신하들에게 아름답게 빛나는 커다란 보석을 보여준 뒤에 당장 망치로 깨뜨릴 것을 명령했답니다. 그런데 신하들은 그렇게 값진 보물을 깨뜨린다는 것이 너무 아까워 설득시키기 시작하지요. “임금님, 이렇게 귀한 보석을 깨뜨린다면 임금님 명예가 손상될 것입니다.” 그런데 한 신하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임금님 말에 따라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곧바로 망치로 보석을 박살냈습니다. 다른 신하들은 이 신하에 대해 비판하기 시작합니다. “저 귀한 것을 저렇게 박살내다니 저 사람 어떻게 된 것 아니야?” 하지만 임금님은 곧바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석과 왕명 중에 어느 쪽이 더 귀한 것이냐? 깨뜨리라는 왕명을 어긴 자들을 모두 감옥에 가두어라.”
주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있어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의 가치보다 훨씬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주님의 말씀을 먼저 듣고 따르나요? 아니면 세상의 가치들을 먼저 소중하게 여기고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우리들 모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 말씀처럼 주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좋은 진주보다도 더 중요하기 때문에 자신의 전 재산을 팔아서라도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나라입니다.
다행히 주님께서는 이렇게 중요한 곳에 들어가는 것을 그렇게 어렵지 않게 만드셨습니다. 즉, 당신의 말씀을 철저하게 따르기만 한다면 원하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런데도 주님의 말씀을 듣기보다는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을 청하는 기도에 집중하고 있었던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솔로몬이 자신의 부귀영화를 청하기보다는, 하느님 백성을 제대로 통치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분별력을 청해서 칭찬을 받았던 것을 기억하면서, 내가 청해야 하는 것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잘 판단하셨으면 합니다.
버리는 연습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마태오 13, 48) 얼마 전, 일주일 동안 매 새벽마다 성서 사도직을 담당하시는 수녀님들을 위한 미사를 봉헌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새벽의 이 미사를 위해 수녀원으로 향하는데,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폭우가 쏟아지는 것입니다. 너무 많은 비에 지하 차도는 금세 잠겨버렸고, 고속도로 곳곳에도 많은 빗물이 고여서 운전을 하기 힘들었습니다. 조심조심 운전을 하는데, 곳곳에서 난 많은 사고를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빗길에 미끄러져서 가드레일과 부딪혀 크게 부서진 택시가 보였으며, 어떤 차는 빗길에 미끄러져 놀랐는지 비상등을 켜고 정차되어 있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비상벨을 울리며 달리는 많은 견인차들 역시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라디오를 틀어보니 곳곳에서 비로 인해 사건 사고가 많이 일어났다는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산사태로 인명사고도 있었고, 또한 급류에 휩쓸려서 실종되신 분들도 많았답니다. 자연의 힘에 다시금 놀라게 되었지요.
사실 사고라는 것은 언제 일어날지 모르며, 또한 순식간에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그 누가 “나는 언제 어디서 사고를 맞이하겠다.”고 말을 하면서 사고에 대응하나요? 또한 “나에게는 사고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거야.”라고 자신할 수 있을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의 심판 역시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우리가 주님의 심판날을 미리 예견할 수 없으며, 주님의 심판결과 역시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잘 준비하지 않습니다. 그냥 세상의 판단에 따르면서 주님의 뜻과는 정반대로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이런 모습을 비유해서 당신의 심판을 말씀하십니다. 바다에서 그물로 고기를 가득 잡은 뒤 물가에서 좋은 것들 취하고 나쁜 것들은 밖에 버리는 것처럼, 주님께서도 심판 때에 의인은 하느님 나라로 불러올 것이고 죄인은 불구덩이에 던져 버리신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의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 항상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합니다. 세상 종말이 언제 올지 그 누구도 알 수 없기 때문이지요.
언젠가 우리에게는 지녔던 모든 것을 놓아 버릴 때가 분명히 옵니다. 그런데 그때 가서 아까워 망설인다면 잘못 살아온 것입니다. 빈손으로 이 땅에 왔다가 다시 빈손으로 하느님 나라로 가야 하는 우리들이기 때문이지요. 지금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것은 잠시 맡아 가지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아까워 망설이는 삶에서 벗어나 주님을 위해 자신 있게 놓아 버릴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지금 이 순간 버리는 연습을 그리고 주님 뜻에 맞게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연습을 끊임없이 행해야 하겠습니다.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소박한 기쁨
베드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 그리고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마태오 17, 5) 어떤 책에선가 이러한 글을 읽었습니다. “행복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행복이란 양질의 생각이자 마음의 상태이다.” 이 글을 보면서 참으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행복을 소유하려 했던 적이 너무나도 많았거든요. 그래서 더 많은 것을 간직하려 했으며, 더 많은 능력을 채우기 위해 노력도 했습니다. 그럼으로 인해 행복도 내게 찾아올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더군요. 오히려 소유하려는 순간 행복은 내게서 더 멀어졌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순간을 떠올려 보세요. 삶에서 가장 즐거움을 주었던 마법과 같은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그리고 그 순간들을 종이에 적어보십시오. 놀랍게도 내 자신이 가장 멋진 순간들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매일의 일상 안에서 이루어진 것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어떠한 특별한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내게 즐거움을 주고 내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들은 일상의 소소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렇게 말을 남겼지요. “해가 갈수록 우리의 영혼을 진정으로 살찌우는 건 일시적인 성취감 따위가 아니라 소박한 기쁨이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이 더 크고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만약 특별한 곳에서만 행복을 얻을 수 있다면, 행복한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요? 우리의 평범한 일상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행복이기에 우리 모두 예외 없이 행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결과인 영광스러운 부활을 미리 보이시고자 거룩한 변모의 표징을 보여주시지요. 그러나 제자들은 그 표징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보다는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시고,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존경하는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 있는 이 특별한 곳이 너무 좋아서 제자들의 대표인 베드로가 나서서 말하지요.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특별한 체험을 하고 있는 거룩한 이곳에 계속해서 머무르길 원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한군데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사랑하는 아들인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지금 특별한 자리에 그냥 정체되어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일상의 삶 안에서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나의 일상 안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이렇게 일상의 삶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우리일 때, 먼 훗날 주님 앞에 나아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영광을 차지할 것입니다.
우선순위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 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오 19, 14) 많은 분들이 휴대전화의 단축번호를 사용하지요. 이 단축번호만 꾹 누르고 있으면 빠르고 쉽게 통화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제일 사랑하는 사람을 단축번호 1번에 놓는 경우가 많지요. 이 점에 대해 어떤 신문사가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연령별로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단축번호 1번만 놓고 봤을 때 10대는 엄마, 20대는 애인, 30대는 배우자, 40대는 자식, 50대는 배우자를 사용하고 있어 세대별로 1순위 대상이 변하는 것입니다. 가장 우선순위 사랑의 대상이 바뀌고 있다는 것이지요.
어린이들을 생각해봅니다. 어린이들에게는 엄마, 아빠밖에 없지요. 다른 어떤 것도 엄마 아빠의 자리를 채워주지 못합니다. 문득 옛날의 기억이 떠올려집니다. 지금은 회사원으로 성장한 제 조카가 갓난아기였을 때, 잠깐만 조카를 봐달라는 부탁을 형수에게 받았었지요. 잘 자고 있었기 때문에 별 일 없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형수가 외출 나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제 조카가 깨고 말았습니다. 저는 혹시라도 엄마가 없다고 울까봐 화려한 사진과 소리 나는 물건들을 얼른 손에 쥐어주었지요. 하지만 이러한 물건에 관심을 갖는 것은 잠시뿐, 엄마가 없음을 알고는 “엄마”만을 외치며 울어 재끼는 것입니다. 그 어떠한 것을 주어도 소용없었습니다. 갓난아기인 조카에게는 엄마만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오로지 엄마, 아빠에게만 매달리는 어린이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주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렇게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주님밖에 없다는 일관된 마음가짐, 세상에 그 어떤 것보다도 주님이 최고라는 생각을 간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주 관심사는 주님이 아닐 때가 참 많습니다. 1순위 주님이 아닌, 다른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이 1순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어린이들이 하늘나라를 차지할까요? 미숙하기 때문에? 능력이 없기 때문에? 힘이 없어서? 모두 아닙니다. 그보다는 어린이에게 제1순위가 엄마, 아빠밖에 없는 것처럼, 하느님만을 1순위에 모실 수 있는 어린이와 같은 마음을 간직한 사람만이 하늘나라를 차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1순위는 무엇입니까? 그래서 나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조명연 지음, 휴먼드림>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조명연 지음, 휴먼드림>
▣ 저자 조명연
1999년 사제서품을 받았고 소사성당, 주안1동성당, 보좌신부를 거쳐 갑곶순교성지 전담신부, 간석4동성당 주임신부를 역임했다. 현재 인천교구 성소국장이다. 2001년 6월 14일부터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라는 묵상 글을 인터넷에 쓰고 있으며, 현재 만 명이 넘는 카페 ‘http://www.bbadaking.com’을 운영하고 있다. 빠다킹이라는 별명은 ‘빠다’(느끼함)와 ‘킹’(왕)의 조합으로 목소리가 왕 느끼하다고 붙여진 별명이다. 저서로는 『주는 것이 많아 행복한 세상』, 『날마다 행복해지는 책』, 『괜찮아 괜찮아 다 괜찮아』, 『희망가게』, 『행복한 하루』, 『사랑이 숨어 있는 사막』 등이 있다.
저자는 어렸을 때 1등을 꼭 해보고 싶었습니다. 공부, 운동, 미술, 음악……. 그러나 그 어떤 것에서도 1등을 해보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꼭 2등까지입니다. 반장 역시 그렇게 해보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늘 부반장뿐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1등 못하는 자신에 대해 자격지심 비슷한 것도 생겼었지요. 그런데 얼마 전 초등학교 친구들을 만났는데, 그 친구들 중 한 명이 이러한 말을 하는 것입니다. “부반장이었던 네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라. 더군다나 너는 공부와 운동도 잘했지.”
1등 하지 못했던 초등학교 때의 자신을 그렇게 부끄럽게 생각했는데, 그토록 부러워했던 친구가 있었다는 사실에 저자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면서 행복에 대한 생각을 해봅니다. 행복은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행복은 특별한 곳에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삶 안에 그것도 바로 내 옆에서 나를 위해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매일매일 행복할 수 있습니다. 조금만 내 삶에 관심을 가지고 바라본다면, 조금만 더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면 매일의 삶이 아니 매순간의 삶이 행복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의 유쾌한 제안『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이 책은 조명연 신부가 매일 성경을 묵상한 글을 묶은 것으로, 우리 일상의 삶 안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고 특히 성경의 기쁜 소식을 쉽게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성경말씀 한 구절과 일상의 이야기, 그리고 명언 한 마디는 안일한 마음으로 살았던 우리의 인생을 변화시키며,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참 행복의 길에 들어서도록 안내한다. 이 책을 통해 신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점검할 수 있으며, 지금보다 한 단계 더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계기를 마련한다. 또한 비신자들은 주님이 어떤 분인지를 깨닫게 하고 행복의 또 다른 관점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왔다.
톨스토이에게 어떤 사람이 찾아가서 물었다고 하지요. “선생님, 어떻게 하면 저의 인생이 바꿔질 수 있을까요?” 이에 톨스토이가 대답했지요. “좋은 사람을 만나시오. 그러면 당신의 인생은 바뀌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좋은 책을 한 권 만나시오, 그러면 역시 당신의 인생은 바뀌게 될 것입니다.” 좋은 사람과 좋은 책을 만나면 인생이 바뀌고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는 말에 깊은 공감을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이 바뀌고,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성경을 만나면 행복해질 수 있음을 지금까지의 삶에서 많이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요즘 힘들어 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납니다. 그들은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어렵고 힘들어 좌절 속에 빠져 있습니다. 때로는 극단적인 선택을 통해 이 세상과의 연을 끊어버리는 분들도 심심치 않게 매스컴을 통해 보게 됩니다. 이렇게 어렵고 힘들어 하는 분들에게 예수님과 성경을 권하고 싶습니다. 예수님과 성경만이 진정으로 인생의 참된 행복을 발견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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