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자료

[중산] 2011. 12. 19. 18:16

 

 

evil(악)이라는 영어 단어를 거꾸로 하면 'live'(살다)라는 단어가 된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이것은 사소한 것처럼 들릴 수 있지만, 스캇 펙(M. Scott Peck)의 주장에 따르면 (evil)은 언제나 (ㅣife) 또는 활기(liveliness)의 반대 개념으로 그것을 저하시키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제시한다. 악은 인간의 삶을 파괴시키고 죽음으로 향하게 만드는데, 이는 육체적 죽음뿐만 아니라 심리적, 영적 죽음도 의미한다. 요컨대 악은 무엇인가를 고갈시키고 부패시키는 성질을 갖고 있다. 심지어 악은 매우 정리되고, 풍성한 환경을 제공해도 그 속에서 혼돈과 무질서, 파괴와 파멸을 야기하는 경향이 있다.

 

대개 악이라는 단어는 종교적 상황에서 자주 사용되며 그 용어를 들으면 종교를 연상하게 한다. 사실 종교는 악이 어떻게 탄생했는지에 대해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이따금 우리는 이러한 이야기를 신화라고 부르는데 이는 우리가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설명하려는 하나의 상징적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악의 근원에 대한 개념들이 종종 종교적 맥락으로 설명되어온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 두 가지를 덧붙여 설명하고자 한다. 첫째, 이라는 단어는 점점 더 크게 일반화되어가고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사람들은 종교적 범주 밖에서도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무신론자들도 유대인 대학살은 악하다 또는 연쇄살인범 테드 번디는 악한 사람이었다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교인이 아닐지라도 잔인하고 의도적인 악의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둘째, 종교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복잡한 세상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인간의 엄청난 파괴성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 물론 종교인들은 두 가지의 질문을 갖고 있다. 첫째는 신정론(theodicy)의 질문이라고 부르는 것으로서 이는 어떻게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이 세상에 악과 고통을 허락하시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이는 비종교적 관점에서는 다룰 필요가 없다. 두 번째 질문은 종교인과 비종교인 모두에게 묻는 것으로 비정명론(anthropodicy)의 질문이다. 이는 인간이 어떻게 서로에게 악하고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인간의 본성에 대해 알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은 이 질문 앞에 가로막히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을 믿기 위해 반드시 종교적일 필요는 없으며, 다만 악에 대한 우리의 특정한 관점이 우리의 세계관과 일치하는가가 문제라고 말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서양에서는 자연적 악(natural evil)도덕적 악(moral evil)으로 구분했다. 자연적 악은 암과 같은 질병뿐만 아니라 태풍이나 거대한 회오리바람(tornado) 또는 지진 등 자연적 재해를 가리킨다. 이것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것으로 종종 인간의 안녕에 파괴적 결과를 초래한다. 물론 어떤 사람은 자연은 도덕적이지도 비도덕적이지도 않으며 의도나 계획이 없는 중립적 존재이므로 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어떤 사람은 자연재해는 악한 결과(영향)를 가져오기 때문에 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전통적으로 도덕적 악은 인간의 의도적인 선택으로 인해 생겨난 을 의미한다. 인간에게는 행동에 대한 책임이 있기 때문에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것은 악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이 서로에게 또는 다른 생명체에게, 더 크게는 지구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은 악한 행위이다.

 

또한 개인적 악(personal evil)과 집단적 악(collective evil)으로 나눌 수 있다. 예를 들면 개인적인 악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살해하는 등과 같은 개인의 파괴성을 뜻하며, 집단적 악은 집단 또는 사회 전체에 의해 미치는 일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한 가지 명백하지 않은 개념은 어떤 형태의 악이 더 근본적(본래의 것)인가 하는 의문이다. 사회 지향적 관점에 입각한 이론들은 개인적 악은 가난, 경제적 불평등, 인종차별, 성차별 또는 자본주의 같이 만연된 사회적 질병들이 만들어낸 결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우리는 개인을 직접 변화시키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사회적 불평등을 개선하여 매우 공명정대한 사회에서 살아갈 때 개인적인 악은 순리적으로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본다.

 

 

또 다른 사람들은 사회 악이 실제 상당부분 존재하지만, 그것은 각 사람의 욕심(탐욕), 이기주의, 다른 사람을 경시하는 마음, 그리고 그밖에 다른 내적 요인들로부터 자라난다고 믿는다. 개인적 악의 관점은 사회적 불공평을 간과하거나 인간의 내적 갈등에 너무 지나치게 중점을 두었을 때 오점이 생긴다. 또한 우리가 일단 공공정책 문제들을 처리하면 모든 개인문제들이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 것은 비인간적이며 극단적으로 단순화된 생각이다. 현실적으로 모든 문제들이 사회적, 정치적 문제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사회과학 영역에서는 개인적, 사회적 악 가운데 무엇이 우위에 있는가에 대한 의견대립들이 진행되고 있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이 논쟁은 시그문드 프로이드(Sigmund Freud)와 마르크스(Marx)의 대립이라고 요약될 수도 있겠다. 프로이드는 인간의 파괴성의 내적 요소들에 그 우위를 둔 반면 마르크스는 모든 인간의 파괴성은 경제적 불평등과 불공평한 사회조건에 그 뿌리를 두었다고 주장했다.<“기독교 상담에서 본 악”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테리 D. 쿠퍼, 신디 K. 에퍼슨 지음, 역자 전요섭님, CLC>

 

 

전요섭님

성결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총신대학교 대학원, 미국 aral Robert University,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단국대학교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한국복음주의상담학회 회장,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회장, 성결대학교 학생상담소장, 진로교육상담소장, 심리상담연구소장을 역임하고 현재 성결대학교 기독교상담학 전공주임교수 및 교목 실장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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