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의 언론이 의기양양하게 마르크스의 죽음을 알리던 시대는 지나갔다. 오히려 글로벌 금융위기를 맞아 그의 귀환이 주위를 떠들썩하게 흥분시키고 있다. 《타임》은 마르크스를 “안개 속에서 다른 탑들을 굽어보는 거대한 탑”에 비유했다. 월스트리트에서조차 “마르크스가 옳았다.”는 구호를 외치면서 시위를 하고 있다. 현 시점에서 이 세계가 처한 현실을 보면, 자본주의는 마르크스가 제시한 개념과 맞닿아 있다. 자본주의는 물건, 서비스, 지식, 생명 등 모든 것을 상품화 한다. 그뿐 아니라 인류의 공동 재산마저도 사유화 하고 있다. 또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무차별적으로 확산시킨다.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현재의 위기는 이제까지 한 번도 겪지 못한 순수한 자본주의의 위기이다. 그런 연유로 우리는 적어도 마르크스가 남긴 정신적 유산을 고려하지 않고는 미래를 생각해 볼 수 없다.
오늘날 마르크스는 자본을 바라보며 느끼는 양심의 가책을 상징한다. 그가 자본에 관한 몽타주를 작성하던 당시만 해도 자본의 해악이 이제 막 드러나기 시작한 초창기였다. 하지만 오늘날 자본은 전 지구를 유린하는 살인마가 되어 버렸다. 지구상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번역되었다는 『공산당 선언』을 통해 마르크스는 비인격적인 ‘사회적 권력’으로서 자본의 놀라운 성장성을 근원에서부터 포착한다. 그의 사상에서 핵심은 계급투쟁도, 프롤레타리아 혁명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비판정신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책은 자본주의의 모순과 위기를 설명한 마르크스의 사상, 생애, 저작을 딱딱하지 않게 소개한다. 촌철살인적인 삽화와 철학, 유머와 종합적 정신을 결합한 일목요연하고 재미있는 파노라마, 반자본주의 이론가의 사상을 최근의 시사적 맥락에서 재조명한다. 그리고 오늘날 마르크스 부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왜 이 시점에도 여전히 ‘마르크스의 유령’이 떠도는지를 알기 쉽게 설명한다...(요약)
어떻게 하면 수염 기른 공산주의자가 되는가
1818년 5월 5일 독일 트리어 시에 있는 유태계 마르크스 집안에서 건장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판사였다. 어렸을 때부터 마르크스는 김나지움 시절에 쓴 「직업선택에 관한 젊은이의 성찰」이라는 논문에서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 행동하고자” 하는 열망을 드러냈다. 1835년 대학생이 된 마르크스는 술집과 시인 클럽을 부지런히 드나들었다. 열정적인 데다 논쟁을 좋아하고 유목민 기질이 농후하던 그는 빚 때문에 소송을 당하는가 하면, 결투와 철학은 양립 불가능하다는 아버지의 잔소리에 결투를 단행하기도 하였다. 1938년 마르크스는 본을 떠나 베를린으로 간다. 그리고 1941년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는다. 당시 독일은 반동적이고 편협한 신앙의 틀을 강조하는 국가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대학의 미래를 암울하게 생각한 지식인들은 언론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마르크스도 23세의 나이에 《라인 신문》 기자로 데뷔했다. 그가 언론 자유에 관해 쓴 최초의 기사는 굉장한 파문을 일으켰다. 1943년 《라인 신문》이 검열에 걸려 발행이 금지되자 마르크스는 고국을 등지기로 결심하고 파리로 망명길에 오른다.
1843~1845년 파리에서 마르크스는 독일 이민 노동자 집단과 프랑스 사회주의 운동 집단과 만난다. 그곳에서 공산주의자임을 자처했던 엥겔스를 만나고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교류하면서 마르크스의 철학적, 정치적 변신은 속도를 더한다. 막 태동하기 시작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에서 역사적 창의성을 전혀 발견하지 못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프롤레타리아를 실험실에서 제작한 “학문과 사회적 법칙”으로 대체하기로 하였다. 그들은 미래를 설계하면서 사회적 활동을 자신들 고유의 창의성으로, 해방의 역사적 조건을 환상에 불과한 조건들로 각각 대체했다. 프롤레타리아를 하나의 계급으로서 점진적이고 자발적으로 조직하는 대신 하나부터 열까지 그들이 만들어낸 조각을 통해 조작한 사회로 대체한 것이다.
마르크스가 동조하는 공산주의는 ‘계획서에 담긴 상상 속의 낙원’이 아니라 ‘기존 질서를 제거하는 실재적인 운동’이었다. 『1844년 파리 초고』에서 마르크스는 공산주의를 ‘사유재산제 폐지에 대한 긍정적인 표현’이라고 정의했다. 1947년 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독일 이민자가 주축이 된 ‘정의로운 자들의 연맹’에 가입했다. 그해 6월 런던에서 개최된 총회에서 연맹 이름은 ‘공산주의자 연맹’으로 변경되었고, ‘모든 인간은 형제’라는 연맹의 구호는 ‘모든 국가의 프롤레타리아들이여, 단결하라’로 바뀌었다. 11월에 개최된 연맹의 두 번째 총회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선언서 작성 임무를 맡았다. 1848년 2월 『공산당 선언』이 인쇄될 무렵, 파리에서는 혁명이 한창이었다. 바야흐로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유럽 도처를 휘젓고 다니는 시절이었다. 베를린의 애송이였던 마르크스는 이제 턱수염을 더부룩하게 기른 건장한 장년이 되었다. 게다가 그는 공산주의자였다.
왜 신은 죽었나
『기독교의 본질』에서 포이어바흐는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 아니며 오히려 인간이 신을 창조했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포이어바흐는 “철학은 사상 속에서 변형되고 발전해 온 종교에 불과하다.”는 점을 입증해 보였다. 또한 그는 인간의 인간에 대한 관계를 이론의 뼈대로 이루는 원칙으로 삼음으로써 그는 진정한 유물론을 창시했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이란 이 세계 밖에 쭈그리고 앉은 추상적 인간이 아니라 생산하고 교환하고 투쟁하고 사랑하는 사회 속에서의 인간을 뜻한다.
마르크스는 1844년부터 이미 신앙과 인위적 낙원의 탄생을 필요로 하는 사회적 조건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민중을 위한 행복이라는 환상으로서의 종교의 폐지는 민중의 실재적인 행복을 위한 필연적인 요구다. 민중이 자신이 처한 상황에 더 이상 환상을 품지 않도록 종용하는 것은 민중으로 하여금 환상을 필요로 하는 상태를 단념하도록 종용하는 것이다.” 종교비판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제한적인 목표를 추구한다. 그 목표는 인간으로부터 환상을 제거한다. 인간의 눈꺼풀을 덮고 있는 콩깍지를 걷어냄으로써 실망한 인간, 비로소 이성에 도달한 인간으로서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자신이 몸담고 있는 현실을 모색하도록 하는 것이다. 종교에서 말하는 진리의 내세가 사라지면 속세의 진리를 확립하고 신격화되지 않은 세속적인 형태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소외를 밝혀내는 일이 역사적 임무도 대두된다.
관조적, 추상적 무신론에 대한 비판 입장을 고수한 마르크스는 “종교적 감정 그 자체가 사회적 생산물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한” 포이어바흐와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 정신은 자연의 산물이며, 그 반대는 성립할 수 없다는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은 부르주아의 사회적 관점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의 유물론은 ‘인류 사회 또는 사회적 인류에 대한 역사적 관점에 입각한 새로운 유물론’으로 극복해야 한다. 이 같은 새로운 사회적 유물론, 즉 추상적 무신론에 대한 지양은 공산주의로 귀착된다.
“신을 부정한다는 의미에서 무신론이 이론적 인본주의의 발전 형태인 것과 마찬가지로, 사유재산을 부인하는 공산주의는 인간 고유의 특성으로서 진정한 인간적 삶을 요구한다. 공산주의는 실천적 인본주의의 발전단계이다. 무신론이 종교와 배제를 매개로 하는 인본주의라면, 공산주의는 사유재산의 배제를 매개로 하는 인본주의이다.” 정치적 또는 민주적 공산주의는 국가의 제거, 인간 소외의 극복 그리고 인간 자신으로의 회귀를 추구한다. 그런데 “필요를 대하는 인간의 본성을 잘 알지 못하고 그로 인해 오염되고 그 영향력 아래 놓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사유재산의 긍정적 극복과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 본성의 실재적 전유로서 공산주의란 인간이 사회적 인간, 다시 말해 인간적인 인간으로 온전히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될 때에 “비로소 공산주의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갈등,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갈등에 대한 진정한 해결책, 실존과 본질, 객관화와 주관화, 자유와 필연, 개인과 종 사이의 투쟁에 대한 진정한 해결책이 될 수 있다.”
왜 투쟁인가, 지겹지도 않은가
마르크스가 1840년대 초반에 밀고 나간 공산주의는 하나의 철학적 사상, 곧 살과 뼈가 없는 유령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는 파리의 근교에 밀집한 노동자들의 혼란스러운 모임과 많은 독일 이주자 사이에서 이 실천적인 운동과 새로운 형태의 사회성을 발견한다. “공산주의 노동자들이 단결할 경우 그들은 우선 이론을 정립하거나 선전을 하려고 든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이런 행동을 통해 사회 전체라는 새로운 필요를 전유한다. 그리고 이때 하나의 운동에 불과했던 것이 목표로 승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하나가 된 프랑스 사회주의 노동자들에게서 이 실천적인 운동의 가장 훌륭한 사례를 발견한다.”
넓은 의미에서 볼 때 계급에 따른 사회 분화는 노동의 분업에서 발생한다. 도구 사용 덕분에 생산성이 잉여분을 발생시켜 이를 축적하는 수준에 도달하면, 그 사회적 잉여분을 축적하고 그것을 관리하는 사제들을 필두로 하는 특권 계급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노예제도가 되었건 농노제도가 되었건 착취 관계는 즉시 눈에 띈다. 현대 노동계약에서 이 같은 폭력과 구속력은 은밀하게 감추어져 있다. 마르크스에게서 계급에 대한 단순한 정의, 사회 직능별 범주에 따른 통계표 따위를 찾으려 한다면 헛수고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에게 계급이란 상호대립적인 관계에서 발현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 계급은 투쟁을 통해 정의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계급투쟁이란 전략적이면서 사회적이다. 아니 사회적이라기보다는 전략적인 개념이다.
『자본론』 1권은 착취관계를 집중 조명한다. 이 관계는 노동자와 노동자가 사용하는 생산수단, 농부와 토지 등이 분리됨으로써 초래된다. 생산이라는 영역을 놓고 볼 때, 착취 관계는 계급 관계를 감싸고 있는 뼈대일 따름이다. 이 같은 체제(자본주의)에서는 “생산을 발전시키기 위한 모든 수단은 생산자를 지배하고 착취하는 수단으로 변질되며, 그렇게 되면 생산자는 부분으로 쪼개진 인간 또는 기계의 맹장 같은 존재가 되어 버린다.” 반대로 “생산수단은 생산자에게 생산에 관한 과학적 권력을 적대적인 힘으로 대립시킨다.” 그리고 “강요된 노동이 창의적인 노동을 대체하고, 생산자의 삶 전체를 노동시간으로 바꾸어 놓는다.”
자본의 유통(자본을 투입한 초기 투자에서 상품의 생산과 소비를 거치며 이윤의 실현으로 바뀌는 과정) 문제를 다룬 『자본론』 2권에서는 임금 문제를 통해 노동력의 구매와 판매라는 새로운 변수를 도입한다. 특히 직접 생산에 관계하는 노동이냐, 간접적으로 생산에 관여하는 노동이냐 아니냐 같은 개념을 도입한다. 『자본론』 3권은 자본주의 생산 전반을 다룬다. 따라서 유례없는 추상적 자본이 밟는 궤적을 비유적으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시장에서 경쟁을 벌이는 다양한 자본 전체의 동향을 파악하는데 주력한다. 이 수준에서 계급 관계는 비로소 ‘총제적인 노동자’와 ‘총체적인 자본’ 사이의 갈등으로 극명하게 나타난다.
어떻게 유령이 뼈와 살을 갖게 되었으며, 그 유령은 왜 미소 짓는가
스무 해 전쯤 《뉴스위크》는 의기양양하게 마르크스의 죽음을 톱 기사로 실었다. 하지만 유령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2008년 세계적인 자본주의 위기가 닥치기도 전에 “마르크스가 돌아왔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캔터베리 대주교는 금융 위기의 주범인 이윤 추구 경향을 비난하고, ‘고삐 풀린 자본주의가 그 자체로는 존재할 수 없는 사물들에게 현실성과 권력을 부여하는 신화처럼 작용할 수 있는지를 오래전에 밝혀낸’ 마르크스에게 경의를 표했다. 왜 마르크스는 부활했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우리와 동시대인이다. 그는 자본을 바라보며 느끼는 양심의 가책을 상징한다. 그가 자본에 관한 몽타주를 작성하던 당시만 해도 자본의 해악이 이제 막 드러나기 시작한 초창기였다. 하지만 오늘날 자본은 전 지구를 유린하는 살인마가 되어 버렸다.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은 지구상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번역된 책이다. 이 책은 비인격적인 ‘사회적 권력’으로서 자본의 놀라운 성장성을 근원에서부터 포착한다. 이 책이 지닌 무시할 수 없는 시사성은 다음 일곱 가지 주장으로 요약된다.
첫째, 세계 시장 형성은 계급투쟁까지도 세계화시킨다. 부르주아는 끊임없이 생산 수단 혁명을 시도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착취와 지배라는 사회적 관계로 꽁꽁 묶인 이런 식의 진보는 자본이 지닌 파괴적 속성에 의해 여지없이 무력화되고 만다. 이러한 모순은 오늘날 우리가 세계화라고 부르는 현상 속에서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둘째, 계급투쟁이야말로 역사를 발전시켜 온 비밀이다. 이 문장은 신의 섭리에 의해 미리 기록된 보편적 역사냐, 인간에게 세계의 정신과 운명을 드러내 보여주는 역사냐를 두고 벌어진 철학적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셋째, 소유의 문제는 사회운동의 근간이 되는 문제이다. 이는 모든 형태의 소유를 폐지하자는 주장이 아니라 어느 한쪽이 다른 쪽에 가하는 착취에 토대를 둔 전유 방식을 문제 삼는 것이다. 타인을 박탈함으로써 얻는 소유, 즉 지배당하는 자의 노동과 삶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력을 부여하는 소유만이 폐지해야 할 대상이다. 넷째, 가장 우선적인 목표는 정치권력의 장악이다. 이런 생각은 순수성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정치 행위와 적당히 거리를 두는 실험적 사회주의라는 환상과의 결별을 의미한다.
다섯째, 각국의 프롤레타리아는 국가라는 편협한 울타리를 뛰어넘어 단결해야 한다. 교환의 세계화는 결과적으로 계급투쟁의 세계화를 초래한다. 이것이 바로 세계주의의 요점이다. 프롤레타리아가 지향하는 해방은 국가라는 테두리 내부에서 시작되지만, 대륙을 넘어 세계 수준으로 확대될 때에야 제대로 꽃을 피울 수 있다. 여섯째, 행위임과 동시에 과정으로서 새로운 혁명은 영속적인 혁명이다. 마르크스는 1848년 혁명의 성과를 평가하며, 프롤레타리아가 국가 권력을 쟁취할 때까지, 프롤레타리아 연합이 단 한 개의 나라가 아닌 이 세계 모든 나라에서 전진하는 날이 올 때까지 혁명을 영구히 계속하는 것이 임무라고 선언했다. 일곱째,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은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다. 공산주의를 익명의 집단에 바친 개인의 희생으로 간주하는 반동적인 입장과는 달리 『공산당 선언』은 공산주의를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결사라고 정의한다.
왜 혁명은 시간을 정확하게 지키지 못하는가
하나의 세계는 소멸하는데, 새로운 세계는 이제 겨우 태어날까 말까 한다. 두 세계 사이에서 필연적인 것과 가능한 것은 합류하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혁명의 슬픈 운명이다. 마르크스는 1848년 일어난 사건들에 비추어 이를 예감했다. “혁명은 우리가 원하는 시기보다 앞서서 일어날 수 있다. 혁명가들에게 식량 구입에 신경을 써야 하는 일만큼 최악의 상황은 없다.” 엥겔스는 한층 직설적인 방식으로 이를 말했다. “우리는 프롤레타리아 민중에게 떠밀려 아직은 시기상조임을 우리 자신이 그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를 실험해야 한다.”
혁명은 일치하는 않는 시간들을 연결한다. 그러므로 어제의 임무와 내일의 과업이 혁명 안에서 서로 포개진다. 그렇기 때문에 혁명은 불안정하며 언제든지 변화할 수 있고 변모를 거듭할 수 있으므로 부르주아 혁명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다, 혹은 사회 혁명이다, 국내 혁명이다 하는 식의 단순명료한 정의로 축소할 수 없다. 성공의 기회를 확실히 잡기 위해서 혁명 운동가들은 처음엔 공식적인 정부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되 기존 사회와 조화를 이루는 인물들의 색깔을 가져와야 한다. 요컨대 혁명은 지배계급이 활동하는 공적인 무대에 들어갈 수 있는 입장권을 얻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혁명은 결코 시간을 지킬 수 없다. ‘너무 늦었거나’와 ‘너무 이르거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느라 꼭 알맞은 때를 알지 못한다.
마르크스에 대해 사람들은 식민정책이 진보라는 이름으로 강요된 현대화의 한 형태라고 주장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식민 정책을 찬양했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이는 그의 세계관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하는 말이다. 그에게 역사는 직선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갈림길과 분기점으로 이루어진다.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사회 혁명이 일어날 빌미를 제공했다면, 그건 영국이 의도하지 않았을지라도, 인도로 하여금 자본주의적 축적 과정이 초래하는 고통을 건너뛰게 해주었으며, 이로써 인도를 수구주의에서 깨어나게 한 덕분이다. 착취와 억압 시스템이 아무리 오래도록 지속된다 해도 마르크스의 눈에 진보와 재앙은 치명적으로 얽혀 있다. 이것이 바로 역사를 정치적으로 사고해야 하며, 정치를 혁명적으로 사고해야 하는 이유이다. “혁명은 과거에 대한 모든 미신에서 벗어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임무를 개시할 수 있다. 예전에 일어난 혁명은 자신들만의 고유한 내용을 감추기 위해 역사에 대한 희미한 기억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19세기의 혁명은 죽은 자들일랑 그들의 무덤으로 고이 보내주고 자신만의 고유한 목표를 실현해야 한다. 과거엔 수사학이 내용을 능가했다면, 이제는 내용이 수사학을 능가해야 한다.”라고 마르크스는 말했다.
무에서 갑자기 솟아오르거나 순전히 신의 의지에 의해 생겨나는 종교적 기적과 달리 혁명은 나름대로의 이유를 갖고 있다. 그런데 이 이유라는 것들은 우리가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예상하지 않았던 시기에 찾아온다. 약속 시간을 정확하게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혁명에 따른 깜짝 효과는 클 수밖에 없다. 주역들마저 아무런 준비 없이 맞이하는 바람에 어울리지 않는 배역을 소화해야 하는 위험부담도 배제할 수 없다. 법칙이 아니라 투쟁을 생각하는 사상가였던 마르크스는 그러므로 역사철학자가 아니다. 그는 정치적 행동을 생각하는 전략적 사상가였다.
왜 정치는 시간을 교란하는가?
사람들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대해 단조로운 경제 결정론을 주장한다고 나무랄 뿐만 아니라, 두 사람에게 정치적 사고가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는 비난을 서슴지 않는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마르크스는 영국 의회에 관해서라면 매우 섬세한 비평가였지만, 당시만 해도 유럽엔 의회 체제라는 것이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않는 상태였다. 반면, 마르크스에게서 국가 존립에 관한 비판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헤겔의 국가관을 비판함으로써 마르크스는 억압당하는 자들의 정치, 즉 국가로부터 배제되거나 소외된 사람들이 그들의 일상적인 투쟁을 통해 자기 나름의 정치를 만들어가는 방식을 탐구했다. 그는 사회적 재생산이라는 장막을 찢어버리는 정치적 대사건을 탐구했으며, 전쟁과 혁명은 이러한 사건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였다.
정치적 행위는 역사적 논리의 밋밋한 예시나 미리 정해져 있는 운명의 성취 정도로 축소되지 않는다. 사건의 불확실성이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사소해 보이는 원인이 엄청난 결과를 낳는 것이다. 모든 혁명은 특이한 불공정, 스캔들, 선동 등 나름대로의 뇌관을 지니고 있다. 1871년 벨빌에 운집한 민중을 무장 해제하려는 시도가 파리 코뮌의 도화선이 되었다. 국가 반역죄로 기소된 장교 드레퓌스의 강제 추방은 하마터면 내란으로 번질 뻔하였다. 경찰을 투입해 소르본 대학에 모인 학생들을 강제 해산함으로써 1968년 총파업이 발생했다. 이처럼 사건은 역사의 단조로운 연속을 단번에 끊어놓는다.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에서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한다. “프롤레타리아는 점점 더 혁명적 사회주의, 즉 공산주의를 주축으로 집결한다. 이 사회주의는 영구적인 혁명의 선언과 동의어라고 할 수 있다.” 영구적인 혁명이라는 이 희한한 조합은 행위와 과정, 역사와 사건, 순간과 지속을 한데 아우른다. 이 표현은 ‘공산주의자 연맹에 부치는 글’에서 구호로 등장한다. ‘싸우러 나가자고 외치는 노동자들의 구호’가 바로 ‘영구적인 혁명’이라고 마르크스는 기록한다. 혁명에서 과거, 현재, 미래의 임무는 중첩된다. 파리의 프롤레타리아는 1948년 해방을 위한 그들만의 투쟁의 저변을 획득했다. 이는 해방 자체만을 위한 행위와는 전혀 다르다. 왜냐하면 당시에 노동자 계급은 자신만의 혁명을 성취할 역량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정치는 음모와 오해로 가득 찬 무대이다. 배우들은 가면을 쓴 채 나타나 서로의 역할을 교환하며, 배역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기도 한다. 선거권 확대라는 결과를 얻은 영국에 대해 마르크스가 보인 실망이 이를 확인해준다. 초기 사회주의자들은 정치적 다수 세력이 사회적 다수 세력과 힘을 합쳐 선거권 확대를 얻어내면, 억압받는 자들의 의견이 제대로 반영될 수 있을 것이고, 이로써 보편적 행복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영국의 예에서 보듯이 노동자라고 해서 반드시 자신들이 속한 계급의 이익을 위해 투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 성향마저 보인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따라서 반대자들이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뒤집어씌운 밋밋한 사회학적 결정론자라는 비난은 전혀 타당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왜 임시당원에 불과했는가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두 번씩이나 자신들이 창설에 기여한 기구(1852년 공산주의자 연맹과 1874년 제1인터내셔널)를 자진해서 침몰시켰다. 공산주의자 연맹은 불과 몇 년, 제1인터내셔널은 10여 년 밖에 지속하지 못했다. 이러한 단명은 현대 의회 정치 기구의 장수나 보수주의와 크게 대조된다. “공산주의자는 다른 노동자의 정당과 구별되는 정당을 형성하지 않는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 일반과 그들을 분리해야만 하는 그 어떤 이해관계도 갖고 있지 않다. 공산주의자는 다른 노동자 정당과 오로지 두 가지 점에서만 구별된다. 국가적인 차원의 각종 프롤레타리아 투쟁에서 공산주의자는 국적과 무관하며 프롤레타리아 전체에 공통된 이익을 내세운다. 또한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사이의 투쟁이 넘어서야 하는 각 단계에서 공산주의는 항상 전체라는 관점에서 운동이 지향하는 이익을 대변한다.” 이는 『공산당 선언』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대목이다. 공산주의자는 따라서 분명하게 분리된 조직이라기보다 계급과 관련한 보편적 운동의 한 분파 정도로 이해된다. 공산주의자는 실천면에서 부르주아의 공화주의적이고 민주적인 흐름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제한적인 입장을 취하며, 동업 조합이나 직능 단체의 이익을 넘어서 보편적 이익을 옹호한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우리는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당이라는 개념은 이중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주 짧은 기간 동안 통용되는 의미에서 이 용어는 특정 상황이 필요로 하는 특정 임무를 수행하기에 적합한 조직을 가리킨다. 반면 광범위한 의미로는 맥락상 우발적으로 구체화된 조직이나 단편적인 일화를 초월해 역사상 노동자 계급이 전개해 온 운동과 동일시된다. 이 두 번째 이해 방식은 혁명을 조직의 숙성 과정이라고 보는 관점과 일맥상통한다. 엥겔스는 한 논문에서 “물리학적 법칙에 의해 발생하는 순전히 자연적인 현상”이라는 표현도 마다하지 않았다. 역사의 흐름에 대한 이 같은 신뢰는 하지만 상당히 모호하다. 발단이야 어찌 되었든,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성가신 존재가 되어 버린 당을 망설이지 않고 처리해버린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따금 자신들만이 역사적인 당을 세울 수 있는 독점적인 설립자라고 내세우는 경향을 보였다.
누가 잉여 가치를 훔쳤는가: 『자본론』을 둘러싼 추리 소설
『자본론』은 어려운 책으로 정평이 나 있다. 하지만 마르크스 자신은 노동자를 위해서 이 책을 저술했다고 말한다. 진실은 이 둘 사이에 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자본론』은 어렵지만 그래도 읽을 만한 책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이 책에 열광할 수도 있다. 이 책은 아주 전형적인 추리소설이기 때문이다. 자본론은 1권 ‘자본의 생산과정’, 2권 ‘자본의 유통과정’, 3권 ‘자본주의적 생산의 총 과정’ 등 세 권으로 되어있다. 마르크스는 상당 부분 헤겔의 논리학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래서 세 권의 책은 『철학 강요』에 등장하는 자연의 세 가지 계기를 따른다. 즉 기계론적 계기(자본 생산에 있어서의 착취 관계), 화학적 계기(자본 유통의 각기 다른 형태), 유기 물리학적 또는 생명체적 계기(자본주의적 생산 과정 전체의 재생산)라는 순서로 전개된다. 기만적인 가상의 세계를 가로지르는 모험의 출발점 문제는 이로써 해결되었다.
태초에 상품이 있었다. 얼핏 보기에 탁자, 손목시계, 접시처럼 지극히 평범한 물건이 그 속에 엄청난 세계를 감추고 있다. 껍질을 열면 마술사의 모자에서 스카프나 토끼가 나오듯이 ‘사용가치-교환가치’, ‘구체적 노동-추상적 노동’, ‘불변자본-가변자본’, ‘고정자본-순환자본’ 등 쌍을 이루는 일련의 카테고리가 줄줄이 따라 나온다. 말하자면 끊임없이 양과 질,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개인과 시민 사이에서 이분되는 정신분열증의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이처럼 마르크스는 애초에 부를 ‘상품의 거대한 축적’이라고 정의함으로써 현대 사회의 거대한 수수께끼, 곧 돈이 돈을 낳는다는 경이로운 현상을 파헤칠 수 있는 단서를 손에 쥐었다. 부는 요컨대 잉여 가치의 부당징수, 다시 말해서 노동자에게 임금을 지불하지 않고 강제로 노동시킨 시간만큼을 훔치는 범죄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노동력은 특별한 상품이다. 노동력은 자신의 재생산을 위해 필요한 시간보다 더 오래 기능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덕목을 발휘한다. 돈을 가진 자본가는 이 특별한 덕목을 제공받는다. 노동력 말고는 아무것도 내다 팔 것이 없는 노동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일단 근로계약이 성립되면 노동자는 ‘의인화된 노동 시간’, 곧 고용주가 합법적으로 최대한 오래 작동시킬 권리가 있는 시간 덩어리로 환원된다. 마르크스는 노동자와 그 가족의 노동력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과 고용주에 의해 무상으로 강요하거나 착취된 초과 노동의 공평한 분배야말로 계급투쟁에서 으뜸가는 쟁점이라고 말했다. 필요한 노동과 초과 노동, 임금과 잉여가치를 분배하는 과정에서 노동자는 자신의 몫을 늘리려 하는 반면, 고용주는 이와 반대되는 효과를 노린다. 이렇게 하여 자본가에 의해 노동자의 잉여가치가 도난당하는 원초적인 범죄가 자행된 것이다. 범죄의 희생자인 노동자는 죽지는 않지만 신체적, 정신적으로 크나큰 재해를 입게 된다. 현대식 제조업에서는 노동 분야에서만 파업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개인도 조각조각 파편화되어 배타적인 작업의 자동 용수철 같은 부품으로 변해 버리기 때문이다. 파편화된 노동자가 상실한 것은 그들과 대치하고 있는 자본에 집중된다.
마르크스는 왜 녹색 수호천사도 생산성만 쫓는 아귀도 아닌가
마르크스는 당시에 팽배했던 생산 제일주의의 열광을 공유하는 축에 들긴 했지만 ‘진보라는 환상’까지 자신의 것으로 삼지는 않았다. 진보가 지닌 이중적 성격이 착취에 기초한 생산 방식에 기인하는 한 기술적 진보와 사회적 진보는 애초부터 손에 손을 맞잡고 나아갈 수가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식민지 개발과 노동의 왜곡으로 인한 고통을 충분히 인식했던 마르크스는 진정한 진보란 자본주의를 넘어선 곳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진보의 신화를 경고하는 마르크스의 메시지는 뚜렷하고 솔직하다. “대규모 사회혁명이 실현되기 전까지, 문명의 모든 진보 또는 모든 사회적 생산력의 증가는 노동자가 아닌 자본을 부유하게 만들어주며 노동에 대한 자본의 지배력, 자본의 생산력만을 증가시킨다. 자본은 노동자와 대립 관계에 있으므로, 이러한 진보는 궁극적으로 노동자들 위에 군림하는 객관적 권력을 증진시킨다.”
마르크스의 생태학적 직관은 그의 인류학적 사상과 독일의 자연철학에 굳건하게 뿌리내리고 있다. 마르크스에게 생산 관계는 노동을 매개로 맺어진 관계, 즉 인간이 자연과 맺는 관계, 인간이 인간과 맺는 관계와 떼려야 뗄 수 없다. 인간은 인류학적으로 결정된 생명체로서 ‘자연적인 힘, 생명력을 부여받은’ 존재이다. 이러한 자연적인 제한과 자연에 대한 의존성은 자연을 복속시키려는 프로메테우스적인 유혹에 저항하며 감히 신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던 그리스 영웅을 향한 젊은 마르크스의 열광을 누그러뜨린다. 인간 존재는 자연적인 존재일 뿐 아니라 역사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자연은 객관적으로도, 주관적으로도 인간 존재에 적합한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 존재는 역사적으로 자신의 필요와 능력을 발전시킨다. 이것이 바로 역사가 “인간의 진정한 자연사”인 이유다.
마르크스는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나
마르크스는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적에 대해 생각할까? 그는 뛰어난 프로파일러로서 사회적 살인자의 파일 속에 들어가 그 살인자의 논리를 그대로 적용함으로써 그를 파멸시킨다. 그는 사람들에게 사실은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는 법이 없다고, 모든 건 사실을 바라보는 시선과 그것들을 비추는 조명, 맥락, 전체에 따른 관점에 달려 있다고, 외양은 본질의 충실한 반영이 아니며 본질을 가리고 있는 베일도 아니며, 외양은 단지 존재의 겉모습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는 또 한편에는 우연, 다른 한편에는 필요, 이런 식으로 확실하게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는 나름대로의 우연이, 우연에는 나름대로의 필요가 동반된다고, 생산자는 동시에 소비자이며, 개별적인 자본가에게 순수한 생산 비용으로 간주되는 임금은 자본 일반의 입장에서 보면 지불가능한 수요라고 말한다.
마르크스는 때로 반박 증거를 거부함으로써 학문 연구의 규칙을 지키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는다. 사실 『자본론』은 어느 모로 보나 결코 정치경제학 교본이라 할 수 없다. 『자본론』은 물신화된 부분적인 범주로서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비판이다. 이 저작은 추상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것으로 나아가기 위해 경험적인 거짓 명증성의 들판을 가로지른다. 그리고 도중에 이따금씩 새로운 결정을 개입시킨다. 그 점에서 마르크스의 생각은 분명하다. “생산관계의 사물화 그리고 그 관계들이 생산주체로부터 자율화되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우리는 어떻게 세계 시장의 개입, 다시 말해 시장 동향, 가격 변동, 신용 주기, 산업과 상업 주기, 호황기와 위기의 교대 등이 생산 주체에게 전능한 자연 법칙처럼, 다시 말해 운명적인 지배력, 맹목적인 필연성이라는 양상으로 비쳐지는지를 상세하게 제시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지 않은 까닭은 경쟁의 실제적인 움직임은 우리 구상 너머에 있으며, 이 책에서 자본주의 생산 방식의 내적인 조직 탐구, 이를테면 이상적인 평균치 속에서의 탐구만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만들어 낸 자본의 개념은 하나의 역동적 체제로, 내적인 은밀한 모순들로 인해 수많은 가능태를 상정하는 것이 가능하다. 계급투쟁은 이처럼 많은 가능태 중에서 어느 것이 현실화될 것이며, 어느 것이 도태될지를 결정한다. 구조와 역사, 우연과 필연, 개별 행위와 과정, 개혁과 혁명, 주체와 객체,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이해하고 구상할 수 있는 사상은 근본적으로 전략적 사상이며, 이는 곧 ‘혁명의 분석’이다. <“마르크스 사용 설명서”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다니엘 벤사이드 지음, 역자 양영란님, 에코리브르>
▣ 저자 다니엘 벤사이드
1946년 프랑스 툴루즈에서 태어났다. 프랑스 좌파를 대표하는 지식인 중의 한 명으로, 1968년 프랑스 5월 혁명 당시 낭테르 대학의 학생운동을 이끌었다. 파리 8대학 철학 교수를 지냈고, 제4차 인터내셔널의 프랑스 지부인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의 지도적 활동가이자 신반자본주의당의 열렬한 당원이었다. 2010년 1월 지병인 암으로 사망했다. 지은 책으로 『저항』, 『불굴』, 『유령의 미소』,『때를 잘못 만난 마르크스』, 『카를 마르크스의 열정: 현대성의 상형문자』 등이 있다.
<몽상가 블로그님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