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경우 신화는 아주 먼 옛날에 있었던 신비한 사람들의 신기한 이야기 정도로 간주된다. 이러한 신화는 대체로 누군가의 신화, 즉 타인의 신화다. 어떤 민족에게는 뿌리를 찾을 실마리가 되고 자긍심을 줄 수 있는지는 몰라도, 우리 삶의 길잡이가 되어주지는 못한다. 실상 우리는 스스로의 인생에 나침반이 되고 영혼의 뿌리를 찾아줄 신화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다. 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은 이처럼 개개인의 삶과 직결되는 ‘나의 신화’에 최초로 주목한 사람이었다. 융 이후 신화는 원형심리학으로서 가치를 인정받았다. 일찍이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신화의 소재는 바로 우리 자신의 내면에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비록 현대인들에게 낯설게 느껴질지 몰라도, 환상과 신화는 정신분석학이 대두된 바로 그 시점부터 집중적인 논의의 대상이 되어 왔다. 하지만 신화적 경험을 받아들이는 데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상상, 환상, 신화, 라이프스타일 등은 실로 난감한 주제가 아닐 수 없다. 결국 많은 경우 개개인의 직조하는 ‘지침이 되는 가공의 이야기’나 주관적 의미를 가진 개인적 환상쯤으로 간주되곤 한다. 이처럼 자율성이 극대화된 이미지는 개인적인 무의식에서 흘러나와 시각과 음성·종교적인 경험을 통해 다듬어진다. 그러나 정신과에서는 이런 이미지들에 대해 망상체계로 판단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문화적 상상을 재생하는 일은 물론이거니와 개인의 삶에서 상상을 복구하는 일은 오늘날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한 문제이다. 특히 너나 할 것 없이 상상력의 중요성을 외치면서도 상상의 빈곤에 시달리는 현대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때문에 심리학적 용어나 익숙치 않은 개념으로 인해 쉽게 읽히지만은 않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이 책을 끝까지 따라와 주길 부탁하는 바다. 상상과 의미를 이해하는 데 실패하면 신경증이나 정신질환의 근저에 있는 환상을 창의성이나 천재성의 근원으로 오인할 여지가 있다. 반대로 창의성이나 천재성의 기저가 될 만한 환상을 망상쯤으로 치부해 버릴 위험도 존재한다. 어느 쪽이든 심리적 고통의 요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상상과 삶의 방식 간의 관계(신화는 이 부분에서 생명력을 얻는다.)를 통해 개개인의 삶에서 의미 있는 신화, 즉 ‘살아 있는 신화’를 탐구하고자 했다. 필자는 신화의 가장 중요한 측면을 찾으려면 우리 자신의 삶에 깃든 의미와 이미지를 담아낸 현대의 기틀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요약).
무의식을 만지는 사람
왜 호주머니 속에 돌을 넣어 다니냐고?
나는 호주머니 속에 돌멩이를 넣고 다닌다. 이를 알게 된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어쩌면 사람들 중에는 남몰래 주머니 속에 돌멩이를 지닌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저 엄지손가락으로 살살 문질러 돌이 매끄럽고 미끌미끌한 기가 들 때까지 말이다. 이러다 보면 어느새 기분도 좋아진다. 돌의 정체는 모호하다. 사람의 손길이 닿은 것인지, 자연의 힘만 거친 것인지, 또는 어떤 목적 하에 쓰였던 것인지 확실한 답은 없다. 바로 이처럼 모호한 정체성이야말로 문제의 돌이 신화적 존재로 거듭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언젠가 뒤뜰에서 무심코 이 돌을 집어든 것도 바로 이런 이유이다.
잠시 후 이 돌은 눈 깜박할 새에 내 상상력 속에서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유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신화적 물체로 탈바꿈하기 시작한다. 굳이 ‘신화’라고 말하는 이유는 돌과 나 자신의 관계에 어떤 종교적 여운을 두고 싶기 때문이다. 사실 돌을 가지고 다닌 지 수개월이 지나도록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잠에서 깨었을 때 돌이 사라지고 없으면 어쩌나 생각만 해도 아찔해지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깨달았다. 어느새 내 일과 속 하나의 의례가 돼버린 셈이다. 그리고 이내 또 다른 걱정이 들었다. 행여 아이들이나 아내가 돌을 발견하고 치워버리면 어쩌나 하고 말이다. 나는 돌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불현듯 나만의 비밀이 생겨버린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수중에 나만의 신화석神話石 하나를 지니게 된 것이다.
이 세상에는 갖가지 신화석들로 가득하다. 브르타뉴 지방의 카르나크(Carnac) 인근에는 거대한 신화석 무더기라고 할 수 있는 매우 인상적인 유적이 남아 있다. 고인돌과 길쭉한 기둥 모양의 선돌(입석, 立石) 수백 개가 원형 내지는 수마일에 걸쳐 널따란 길 같은 형태로 자리해 있다. 각각의 돌 무게는 수톤에 달한다. 한편 브르타뉴 케르카도(Kercado) 고분의 석실 위에는 바닥이 편평하고 꼭대기가 뾰족한 선돌이 하나 세워져 있는데 그 연대가 기원전 4,700년경으로 추정된다. 즉, 이집트 피라미드보다도 훨씬 이전에 지금의 자리에 놓인 것이다. 이로 미루어보아 선돌들이 그 자리에 세워진 채 얼마나 유구한 세월이 흘렀는지 조금은 감이 잡히리라. 선사시대의 신화석들은 이 밖에도 유럽과 아프리카, 일본, 한국, 티베트, 볼리비아, 페루 이스터 제도 등에서 발전했다.
같은 신화석이라지만 주머니 속에 거대한 선돌을 넣고 다닐 수는 없는 법. 바로 이 지점에서 내 돌에는 한 가지 중요한 차별성이 부여된다. 이 돌은 ‘그냥’ 신화석이 아니라 ‘나만의’ 신화석인 것이다. 이 둘은 부족의 속성을 규정짓는 토템이 아니다. 이것은 나 자신을 규정짓는 페티시(Fetish, 주물 혹은 숭배의 대상)다. 과거에 호주 원주민들은 장방형의 돌을 다듬고 장식한 후 이를 추령가(Churnga)라 불렀다. 이러한 주술적인 돌들은 다양한 용도로 쓰였는데, 가령 임신을 원한다면 아이의 영혼이 깃들여 있는 차일드 스톤(Child-stone)을 추령가로 문지르는 식이었다. 추령가에는 조상의 넋은 물론, 지니고 다니는 사람들의 혼령까지 깃든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를 숨기거나 묻어뒀다. 이와 유사한 성격의 돌들은 인도나 유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나 말고도 호주머니 안에 비밀의 돌을 넣고 다녔던 사람이 있다. 그의 사연을 한번 들어보자. 어린 시절 그는 자물쇠가 달린 노란색 연필통에 나무자를 넣고 다녔다. 어느 날 무심코 펜나이프로 나무자를 깎던 그는 놀라운 일을 경험했다. 자신도 모르게 나무자가 사람 모양으로 다듬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 연필통을 집 다락방에 숨겨놓고 보는 눈이 없다 싶으면 살그머니 다락에 올라가 목각인형을 꺼내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라인강에서 주운 까만색 장방형의 돌멩이의 매끄러운 감촉이 무척 마음에 들었던 소년은 그것을 호주머니 속에 지녀와 목각인형이 든 노란 연필통에 넣었다. 소년은 이로써 목각인형이 생명력을 얻게 됐다고 생각했다. 이 소년의 이름이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이다.
살아본 적 없는 생의 생존자들
쓰러진 고래의 해변
신화에서 떨어져 나오는 것은 기이한 경험이다. 마치 바닷가에 서서 자신이 바로 얼마 전 빠져나온 고래(신화)를 경이에 찬 시선으로 뒤돌아보고 있는 상태와 같다. 그렇다. 신화는 한여름 뙤약볕 아래 모래사장에 누워있는 거대한 고래와 같다. 우리는 불과 어제만 해도 저 고래의 뱃속에 있었다. 어떻게 그 안에 갇히게 됐는지, 바깥의 망망대해는 얼마나 더 크고 넓을지 짐작도 못한 채로. 이제 신화 밖에서 자신의 삶을 바라보자. 그동안 토대로 삼아온 모든 것이 순식간에 그 가치를 재평가받기에 이른다. 문득 저토록 생기 있는 몸체가, 저토록 아름다운 존재가 적막 속에 경직된 채 누워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물결이 달빛에 이끌려 알 수 없는 심연 속으로 고래의 뼈를 실어 나를 때까지, 이제 저 존재(신화)는 그저 시간과 더불어 오랜 기간 지속될 부패의 시작만을 기다리고 있다.
이런 신화의 시대가 저물어 가고 있지만 개중에는 사냥꾼이 막 잡은 고기 맛에 굶주린 부류, 살아 있는 물에 목말라 있는 부류 또한 존재한다. 그들의 집단 신화가 쇠락해가는 칠흑 같은 밤, 모든 신화가 탄생한 바로 그 동굴 속으로 신화적 여행을 떠난다. 불빛 속에서 온갖 짐승의 모습이 그림자 사이를 넘나들며 춤추는 라스코(Lascaux)의 동굴과 같은 곳으로 말이다. 이런 사람에게 이 같은 공간과 상황이 주어진다면 개인적 신화는 탄생할 수 있다. 칼 융은 바로 이런 부류의 사람이었다. 융은 자신이 속한 문화의 지배적 신화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다시 말해 융은 이전 세대로부터 계승한 삶의 방식이 더 이상 만족스럽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신화란 삶의 방식과 일상생활의 구조를 제시해줄 수 있을 때 살아있는 것이다. 우리 삶의 방식이 더 이상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그 신화는 화석이나 다름없다.
융이 제시하는 개인적 신화이론의 기본 배경이 되는 세 가지 주요 개념을 살펴보자. 신화의 심리적 기능, 신화 쇠퇴의 문제, 문화와 개인의 관계가 바로 그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인류학과 신화학, 철학, 신학을 두루 거쳐 심리학에 귀착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도중에 숱한 샛길로 빠져 꼼짝없이 길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융이 말하는 ‘개인적 신화’의 중요성은 학문적 필요 그 이상이기에 충분히 어려운 여정에 나설 가치가 있다. 자신컨대, 개인적 신화가 단순히 이론에 머무를 뿐이었다면, 융 역시 한가한 공상 따위에 이끌려 이 길을 걷진 않았으리라.
몇몇 독자들은 이미 눈치챘을지 모르지만, 개인적 신화라는 용어 자체에는 이미 모순이 내재돼 있다. 알다시피 신화란 문화의 유물, 사회 내에서 공유되는 의미 체계로서 일반적으로 개인의 힘만으로 생성되진 않는다. 신화는 여러 세대에 걸쳐 세심한 전수 과정을 통해 전승된다. 살아있는 신화 또는 일정 민족을 지배하는 세계관은 상상력의 원천으로서 수세대에 걸쳐 정교함을 더해가고 꾸준히 재생을 거듭해 나간다. 그런데 만약, 집단적 신화의 맥락이 사라져버린다면?
최근 동유럽과 러시아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문화적 마비는 아주 짧은 시간 내에 정치적·사회적 혼란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필자에게 있어 이처럼 동구권에서 전개되는 일련의 사건은 바로 우리 문화의 쇠락을 예고하는 그림자로 비친다. 문화가 한계에 다다를 때 문화의 발전은 역설적이게도 그 문화의 경계 밖에서 유입되어야 한다. 문화적 상상력을 복구하는 데 개개인의 덕을 보지 못한다면, 그 문화는 대체 어떻게 재생해나갈 수 있단 말인가? 즉, 문화를 지탱하는 신화가 과거 개인의 삶에서 개인적 신화로 가능했던 것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면 대체 어디에서부터 연유한다는 말인가? 따라서 개인적 신화의 가능성은 주관과 집단 사이 정가운데 지점에 정확히 위치하는 것이다.
까마귀와 춤을 춘 여인
그들이 나를 불렀어요
문화의 장벽 밖에서 우리는 어두운 숲을 만난다. 그리고 숲 속을 홀로 걷는다. 문화의 장벽 너머에 있는 그 숲의 이름은 ‘개인적 신화’다. 개인적 신화의 숲길을 걷는 그 과정에서 우리는 융 심리학의 근본적 통찰력을 보여주는 한 가지 개념과 맞닥뜨린다. 주관적 경험의 타당성이 바로 그것이다. 인류의 보편적 경험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개인적 체험 또한 오로지 개인적 신화를 통해서만 표현되고, 하나의 의미가 될 수 있다. 일반적·외부적 사실은 삶의 경험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개개인의 삶은 일반적 방식이 아닌 주관적 방식으로만 영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 즉 행동·갈망·일·놀이에 담긴 의미는 애초 미완성 상태로 우리에게 주어진다. 따라서 우리는 물려받은 의미를 보존하는 것보다는 진행 중인 의미 과정에 참여하는 데 더 치중해야 한다. 여기에는 역설이 깔려있다. 개인적 신화의 의미에 대한 인식이 주관적 경험인 반면, 진행 중인 그 과정은 몰개인성을 띠기 때문이다. 적절한 화학적 상황이 갖춰졌을 때 수많은 분자가 격자 패턴을 따라 늘어서고 결정화되듯, 신화의 갖가지 이미지도 개개의 내용은 다양하지만 조직 패턴은 몰개인적이다. 개인적 신화는 보다 심층적이고 몰개인적인 패턴에 의해 조직된 일련의 주관적 상을 결정화한 것이다. 따라서 개인적 신화는 신화적(집단적·보편적·몰개인적)이면서 동시에 개인적(개별적·독보적·주관적)이다.
개인적 신화는 흔치 않은 속성을 띤다. 개인적 신화와 관련된 학설은 객관성을 내세우지만, 이로 인해 내면적 삶의 자취가 뿌리에서 잘려나간 꽃처럼 시들어버리는 점은 문제다. 그래서 심리학에서는 삶 속의 경험을 그려낸 언어를 반드시 찾아내야 한다. 살아있는 신화는 결코 객체가 될 수 없기에, 학설이 될 수도 없다. 살아있는 신화의 바깥으로 나가는 순간, 우리는 신화가 유물이나 화석처럼 이미 죽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안에서 밖을 내다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경험이 이미 그 자체의 타당성이 되는 정황 속에 자리 잡은 상태에서 이야기를 꺼내야 하는 것이다.
독자 여러분에게 어느 여인의 이야기를 들려줄까 한다. 휴양지에 있던 한 여인이 어느 날 아침 일찍 숲 속으로 신책을 나섰다. 그런데 까마귀들이 일순간 동시에 하늘로 날아올라 울어대기 시작했다. 여인은 화들짝 놀랐다. 그러나 여인은 홀린 듯이 그 뒤를 따라갔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난생 처음 보는 거대한 참나무가 위용을 드러냈다. 여인의 무릎 높이보다 길게 드러난 뿌리는 땅속, 즉 신성한 대지 속으로 곧장 뻗어 내려가 있었다. 신성한 대지라 함은 여인의 마음속에서 그곳이 성지, 즉 경의를 바치는 장소라는 깨달음이 일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주저 없이 마치 새의 날갯짓처럼 양팔과 다리를 내저으며 원을 그리듯 춤추기 시작했다. 그때 불현듯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와 여인의 머리 위를 지나 그 동안 걸어온 방향으로 거슬러가기 시작했다. 돌아오는 길목에서 발견한 깃털만이 그날 아침의 일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당신에게는 그러한 개인적 경험이 없었는가?
<“프로이트와 이별하다”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D. 스티븐슨 본드 지음, 역자 최규은님, 예문>
▣ 저자 D. 스티븐슨 본드
심리치료사이자 ‘융’학파 정신분석가로서, 한때 사도교회의 목사로 재직한 바 있다. 현재는 매사추세츠 주 노스앤도버 및 캠브리지에서 심리 클리닉을 운영 중이다. 1989년 ‘조셉 캠벨과 신화의 영향’이란 주제로 토론회를 주관한 이후, 심리학과 신화학의 세계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상상력과 신화 그리고 의미에 대한 현대인들의 갈증이란 문제에 천착해 왔으며 ‘융’ 심리학에 근거, 신화를 연구하는 모임을 이끌고 있다.
<중국 장가계 원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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