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과 프로이트, 무의식의 원더랜드
융과 프로이트의 암호
프로이트와 융은 팔씨름을 했다. 두 사람은 꿈이 어떻게 꿈이 되는가, 상징은 어떻게 상징이 되는가란 문제를 논쟁거리로 삼았다. 두 사람은 상상의 본질과 상상에 부여되는 신뢰를 놓고, 거기서 우리가 발견하는 바가 환영인지 창의성인지를 놓고 씨름을 벌였다. 한동안 앞뒤로 서로를 당겨대다가 마침내 프로이트가 한쪽으로 기울자 융도 반대쪽으로 기울어졌다. 당시 두 사람은 이를 ‘리비도 이론’이라 칭했다. 리비도는 일종의 분석암호다. 리비도는 복잡한 전문용어의 미로 속에 숨어 있는 경우가 많지만, 일단은 감정의 강렬함과 관련 있다고 이해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리비도는 정신은 물론 육체 안 깊은 곳에서부터 나온다. 우리는 매일 다양한 강도의 강렬함을 경험하거나 또는 강렬함의 결여를 느끼고 결국 리비도가 관여하게 되는 상황을 맞닥뜨린다. 사랑과 증오, 분노, 열정, 흥미, 매료는 강렬함이 분산되고 활용되는 방식과 관련이 있다.
두 대가의 논쟁
프로이트와 융은 리비도를 흐르는 강물에 비유했다. 프로이트와 융은 강렬함이 새로운 방향, 새로운 관심사, 새로운 매료거리, 새로운 애착거리 쪽으로 진로를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상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데 공감을 했다. 이러한 상징이라는 우선 장애물, 한계선, 금기, 억압을 꼽을 수 있으며 역류, 가동 중단, 후퇴도 이에 포함된다. 이와 같은 모형에 따르면 장애물로 인해 길이 막히고 막대한 양의 에너지가 쌓이게 돼 가공할 만한 긴장상태가 조성된다. 축적된 에너지 전부는 위력적인 세를 과시하며 상징 속으로 쏟아져 들어가고, 에너지는 다시 본연의 흐름을 되찾는다. 하지만 이러한 후퇴 현상의 본질에 대해서는 프로이트와 융의 의견이 서로 엇갈렸다. 우리가 근원으로 돌아갈 때 과연 무엇을 만지게 되는가라는 문제를 놓고 이견을 보인 것이다.
우리가 환상을 통해 경험하게 되는 각종 이미지라는 물살이 우리를 앞으로 끌고 갈 것인가 아니면 뒤로 끌고 갈 것인가, 이것이 문제가 된다. 먼저 신경학자의 입장에서 프로이트는 이러한 강렬함이 본래의 생물학적 현상이라고 주장했다. 강렬함은 육체에 나타나는 성적 흥분으로 거의 측정 가능한 현상이며 오르가즘의 경우에만 경험할 수 있다고 역설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강렬함은 그 진로가 가로막히면 일정한 증세, 대체물, 승화昇華 속으로 흘러든다. 우리가 꿈, 종교, 신경증 속에서 대면하게 되는 내용물의 실체는 바로 이것이다.
반면 정신과 의사 입장에 선 융은 문제의 강렬함이 본래 정신적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강렬함은 중성적 정신 에너지이며 각기 다른 수많은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역설했다. 진로가 막힐 경우 강렬함은 구별이 가해지지 않은 모체(Matrix)로 돌아가 상징으로서 스스로를 재조형한다. 이때 상징은 발전적 성격을 띠며 문제의 에너지에 대한 새로운 형태와 표상을 부여해준다. 우리가 꿈, 종교, 정신질환 속에서 대면하게 되는 내용물의 실체는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융에게 있어서는 모체로의 귀환 역시 잠재력의 귀환을 의미했다. 바로 이 점이 상징을 ‘상상적 존재’로 만드는 결정적 요인이다. 즉 상징은 잠재력을 가리키는 존재인 것이다. 융은 기호적 접근방식의 유용성을 부인하진 않았지만 한편으론 상징이야말로 우리에게 귀환의 길뿐 아니라 그보다 더 중요한 전진의 길을 안내해준다고 주장했다.
무의식의 방문을 열며
우리는 창조적 순간의 경계에 다다른다. 창조적 순간에는 이미지, 기억, 행위는 물론 관계까지도 한층 더 깊은 차원으로 불현듯 거듭난다. 곧이어 우리는 의미의 문제와 직면하게 된다. 예컨대 어떤 이유로 꿈에 상징적 의미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꿈에 관해 해석할 땐 당연히 꿈은 상징성을 띠며 의미를 지닌다는 가정 하에 접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이러한 질문이 생소하게 와 닿으리라. 우리는 대개 꿈이 무의식적으로부터 발현된다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굳이 정의를 내리자면 우리의 기억 속에 남은 꿈은 무의식이 아닌 의식에 해당된다. 일찍이 융이 말했다시피 “무의식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무의식은 정말로 무의식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말이다.”
발현몽(우리가 기억하는 꿈)과 잠재몽(무의식에 나타난 상태 그대로의 꿈)을 구분할 당시 프로이트는 이 점을 고려하고 있었다. 프로이트가 볼 때 창조적 순간이란 잠재몽과 발현몽 간의 놀이 속에 존재했다. 그가 생각하는 창조의 순간은 내면의 삶이 의식적 삶에 마주하는 잠재의 공간이었다. 이처럼 잠재몽이 발현몽으로 변환되는 과정을 프로이트는 꿈 작업(Dream-work)이라 명명했다. 이러한 꿈에 대한 작업은 우리가 깨어나기 전 무의식 속에서 이뤄진다. 유명한 저서 『꿈의 해석』에서 프로이트는 우리의 기억 속에 잔류하는 꿈, 발현몽이 꿈 작업에서 탄생한다고 설명했다. 무의식적인 꿈인 잠재몽의 경우 우리는 결코 이를 볼 수 없다. 꿈 작업은 잠재몽이 응축, 전위, 표현, 2차적 수정에 걸친 전 과정이 실제로 환상 활동에서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필자로서는 놀이와 신화뿐 아니라 꿈에 등장하는 잠재적 요소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배제하고 싶지는 않다. 의식이 전면에 등장하는 순간 우리의 정신 속엔 하나의 공간이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억 속에 잔류하는 꿈을 이러한 공간으로 인해 빚어지는 하나의 결과로 생각해 보면 어떨까? 무의식적 에너지 패턴과 의식적 기억, 인상과 이미지가 가깝다 할 만큼 서로에게 다가간다고 가정해 보자. 전자의 패턴은 그 패턴만의 특정한 정렬 상태에 가장 가깝게 공명하는 이미지를 끌어당긴다. 이 과정에서 선택된 이미지는 경우에 따라 패턴에 들어맞도록 ‘구부리기’ 또는 ‘비틀기’ 단계까지 거치기도 한다. 이러한 정황에서 볼 때 무의식을 잠재적 형태들의 집합체로 간주할 수 있다. 여기서 잠재적 형태는 꿈의 내용에 대해 특정 방식으로 그 형태를 결정하는 것이다.
꿈은 곧 상징의 공간이 아니다. 꿈은 길잡이로서 우리를 그 공간으로 안내할 뿐이다. 더불어 우리가 그 공간으로 입장하기에 적절한 태도를 갖출 경우 그곳으로 들어가는 데 유용한 수단이 돼줄 수 있다. 꿈은 우리를 위해 상상과의 연결고리를 열어준다. 무의식은 의식적으로 경험할 수 없으며 늘 상상을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꿈이 담아내는 변형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꿈을 따라 그 꿈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공간 속으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바로 이 순간이 공명의 순간이며, 우리가 꿈의 의미를 탐색할 때 꼭 다시 찾아봐야 할 드림타임(Dreamtime)이다. 뭔가가 매번 처음인 양 느닷없이 모습을 드러내는 바로 그 순간인 것이다.
조 잭슨 유령과의 기이한 조우
기울어지는 집의 딜레마
“저기 남자가 있어. 형체는 보이네. 야구선수 유니폼을 입었는데 좀 구닥다리야.” “맨발의 조야. 조 잭슨.” 꿈의 구장에 조 잭슨의 유령이 홀연히 나타나고, 이를 계기로 일단의 이미지가 나타난다. 놀이의 심리적 공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처럼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잠재적 삶의 이미지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볼 때 킨셀라의 소설은 일종의 적극적 상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조 잭슨의 유령은 하나의 상징이다. 잭슨은 전성기 시절 베이브 루스에 버금가는 잠재력을 지닌 선수였지만 1919년 월드 시리즈 당시 신시내티 레즈와의 경기에서 일부러 패함으로 긍부 조작에 연루됐다는 죄목으로 축출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맨발의 조』는 우리 모두에게 이루지 못한 삶의 패턴과 공명하는 이미지로 기억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맨발의 조』는 주인공의 기억 속에서 끌려나온 이미지라 할 수 있다.
『맨발의 조』는 개인적인 신화의 진화를 소재로 한 이야기다. 의미생성 과정으로의 초대를 다룬 이야기인 셈이다. 킨델라(W. P. Kinsella)의 소설에서 우리 모두가 한 번쯤 맞닥뜨리는 딜레마에 봉착한다. 우리의 발밑에서 내면의 삶과 외부의 삶이 균열을 일으키는 순간 겪게 되는 딜레마에 대면한 것이다. 그는 단층선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우리와 동떨어진 외부에 존재하면서도 우리의 삶의 지형을 새롭게 바꿀 힘을 가진 ‘과정’을 어떻게 신뢰해야 할지 고민한다. 이와 관련해 환상 과정 자체를 살펴보고 수많은 변화 과정을 거쳐 신화로 결정화되려는 상상의 습성을 탐구해 보고자 한다.
오늘날 우리는 단층선 위에 지어진 집에 살고 있다. 우리가 속한 문화의 기존 신화가 하나둘 효용성을 잃어감에 따라 구성원 각자의 내면에는 균열이 생겨 서서히 커져가고 있다. 최첨단의 스칸디나비아풍의 디자인으로 꾸며진 위층들이 오른쪽으로 점점 기울어가고 있는 모습에 비유할 수 있겠다. 반면 지하층은 각종 골동품으로 어질러진 채 아예 왼쪽으로 자리 잡고 앉았다 보면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예고도 없이 지지용 들보가 모조리 무너지고 만다. 엄청난 긴장을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은 것이다. 들보를 한때 붙들어주고 있던 것은 바로 신화였다. 신화는 이런 들보 전부를 적절히 정렬, 배치하는 역할을 한다. 신화는 삶의 방식이 될 수 있었던 기능적 관계를 알려준 당사자이기도 하다.
균열은 (한 편의) 주관적 내면세계와 (다른 한 편의) 객관적 외부의 삶 사이에 발생한다. 다시 말해 환상적 사고와 지향적 사고 사이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분열증 환자나 연구실에 갇혀 지내는 왜소한 교수나, 최소한 한 가지 사실에서만은 닮은꼴이다. 둘 다 무언가로부터 물러나 균열의 한쪽에서만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정신분열증 환자는 외부의 삶으로부터 물러나 있다. 그가 보기에는 외부의 세계는 전적으로 삶을 꾸려나갈 장소로선 왠지 미덥지 못한 곳이기 때문이다. 반면 교수는 내면의 삶으로부터 물러난 상태다. 실제적 가치의 원천으로서 내면세계를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두 인물이 우리 모두의 내면에 함께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단절된 자아, 부분적인 자아로서 개개인의 내면 구석에 갇혀 지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겐 중간지대, 즉 두 세계 사이의 공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 공간에서는 내면의 삶이 스스로 지탱한다는 사실이 받아들여지며, 동시에 외부의 삶이 상상을 향해 문을 열어젖힐 수 있다. 이때 상상은 풍요로움을 토대로 우리의 정신에 의미를 제공해준다. ‘중간지대’란 주관적 상상과 객관적 실체가 만나는 지점이다. 다시 말해 삶의 방식이 될 만큼 돈독한 신뢰 속에서 놀이를 할 수 있는 곳이다. 킨델라의 소설 『맨발의 조』는 놀이에 대한 신뢰를 되찾은 한 남자의 이야기인 것이다.
신화를 창조한 천재들
백만 살 된 정신과 접촉하다
인적 신화가 결정될 때 그 배후에는 강렬한 경험이 자리하고 있다. 어느 금요일 밤에 융의 딸이 하얀 형상이 자신의 방을 지나가는 모습을 보았다고 얘기했다. 한편 다른 딸도 침대를 덮고 있던 담요를 누군가가 두 차례나 낚아채갔다고 말한다. 다음 날 아침 아들이 그림을 그려 보이는데 아주 기이한 그림으로, 전날 밤의 꿈을 그린 것이라고 했다. 융은 집안이 ‘영적 존재’로 가득 차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당황한 융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맙소사, 대관절 이게 무슨 일이지?” 그러자 어디선가 대답이 들려 왔다고 한다. “우리는 예루살렘에서 돌아왔다. 그곳에선 우리가 구하던 바를 찾지 못했다.” 이 말을 들은 융은 마침내 타개할 묘안을 떠올렸고 이내 책상으로 달려가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3일 밤 만에 융은 『일곱 편의 설교문』의 집필을 끝마쳤다.
인적 신화가 결정화될 때 그 배후에는 강렬한 경험이 자리하고 있다. 이와 같은 강렬한 경험은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생 이야기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 필자의 생각엔 이와 같은 주장이 융 자신에 관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본인도 인식하고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대부분의 사람은 훨씬 소소한 방식을 통해 개인적 신화를 발견한다는 사실 또한 유념해야 한다. 비록 신화가 개인의 삶에서 주관적 의미를 유지하긴 하지만 말이다. 나무에서 난 과실처럼 개인의 삶에서 자라난 신화 역시 자양분을 제공함으로써 본연의 기능을 완수한다. 자양분을 제공 받는 대상이 굶주린 영혼 하나뿐인지 백만 군중인지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하지만 우리가 모르는 사실이 있다. 적어도 개인이 삶 속에서 갖는 신화적 경험이 아무리 보잘것없다 해도 이 경험이 상위 차원의 신화에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치유를 위한 신화
무의식에게 손 내밀기
과연 우리는 신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정신과의 관계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가운데 그 관계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자문하고, 또 자신이 처한 상황과 직면할 필요가 있다. 정신건강은 갖가지 개인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 이상의 기능을 발휘한다. 우리는 바로 이 점을 다시 학습할 필요가 있다. 심리치료에 의해서 치료가 되어지는 문화적 정황은 환자의 개인사만큼 중요하다. 사실 문화적 정황은 개인사에게 이미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구성요소다. 치료가 이뤄지는 병원이 어디에 위치하든, 빈민가든 교외 지역이든 아니면 맨해튼의 상류층 주거지역에 있든 상관없이 문화적 정황의 작용이 미치지 않은 곳은 없다. 정신건강 역시 라이프스타일과 연관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서 신화적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신화가 제 구실을 못할 때, 정신과의 관계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때 우리는 정신에게로 되던져진다. 문화적 정황이 이 상태에 다다를 경우 우리는 각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해야 한다’를 듣는 법부터 배워야만 한다. 실상 내면의 권위 또한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별 다른 수가 없다. 우리는 각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해야 한다’를 참아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정신에게 필요한 것은 정신만이 안다. 정신은 마치 살아 있는 지도처럼 개인이 그간 정찰해온 모든 길을 낱낱이 기억한다. 그 길이 개인이 실제로 가본 길이라면 말이다. 그렇지만 결정은 설 자리를 잃는다. 필요는 일정 방향을 따르도록 강제한다. 개인은 자신이 영위해야 할 삶을 살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병이 들고 마는 것이다.
의미 있는 삶으로 걸어 들어가기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개인적, 사회적 고통의 근본 원인은 구속력 있는 신화의 상실에 있다. 따라서 새로운 중추적 신화의 발견만이 개인과 사회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다. 정신과의 새로운 기능적 관계는 진화하고 있는 중이다. 즉 부분을 전체에 연결짓는 새로운 방식이 진화된다는 말이다. 이러한 관계야말로 현재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요소다. 우리는 부분을 전체에 어떻게 연결시키는지 도통 모르고 있다. 예컨대 시민을 정부에, 일상생활을 삶 전체에, 각기 다른 관심사와 책임을 전체적 인격에 어떻게 연결지을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인격과 의식의 관계이다. 이러한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일컬어 융은 ‘개체화’라고 명명했다. 다시 말해 ‘자아’와 상위의 ‘자기’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의 축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우리의 작업, 다시 말해 의식의 작업은 정신에 살아 있는 형태를 제공하는 일이다. 살아 있는 형태는 이러한 복구 과정을 통해 상상이 열어놓은 창문을 통하여 부여된다. 우리의 일은 순수한 잠재력으로부터 현실을 결정화해내는 것이며, 맹목적인 경험으로부터 증류해내는 것이다. 인간 정신에 있어서 부분과 전체의 관계에 대해 융이 생각한 신화는 다음과 같았다. “우리가 알아낸 바에 의하면 인간 존재의 유일한 목적은 삶의 어둠 속에서 불빛을 밝히는 것이다. 삶의 어둠 속에서 인간은 단순히 존재하는 상태에 그친다.”
생각해 보라. 역사상 중요한 순간들, 역사적 사건들은 언뜻 한꺼번에 일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수천 년에 걸쳐 신화의 체계가 탄생하고 사멸하는 패턴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이러한 주기를 그려보면 높낮이를 반복하는 곡선이 나타날 것이다. 세월의 경과와 더불어 나타나는 곡선의 정점과 하단부는 역사적 시점과 상관관계가 있을 수 있다. 고대 근동지역에서 천상의 신들이 지상의 신들을 공격해서 제압했다는 신화가 태동했던 기원전 2천 년 전후를 떠올려 보자. 수백 년 사이 신화적 변동이 일어났던 이 시기의 신화는, 역사적으로는 북방으로의 침입과 전차의 발명이라는 역사적 사실에서 관련성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서구문명의 발달사가 신화의 흥망과 궤적을 같이 한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신화의 생명주기
세월의 흐름에 따라 신화는 성盛하고 쇠衰한다. 난공불락처럼 보이던 가설조차도 새로운 현실 앞에선 무릎을 꿇는다. 살아 있는 신화가 탄생하고 세월과 더불어 발달하다 어느덧 절정에 이르고는 세월과 함께 노쇠하고 퇴락해 마침내 사라지고 만다. 그렇다 해도 신화의 역사적 형태는 생명력이 빠져나간 채 남는다. 구식 의식이 남아 있으되 이를 사용하는 의시가 없으며, 예전의 신들 이름을 기억하긴 하되 더 이상 숭배하는 사람이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렇게 볼 때 신화는 완전히 소멸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신화는 ‘신화를 생성하는 모체’로 돌아가 재형성된 후 다시금 망자의 세계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프로이트와 이별하다”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D. 스티븐슨 본드 지음, 역자 최규은님, 예문>
봄소식을 전하는 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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