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에게 말할 기회를 주기: 읽기와 쓰기 배우기
“네 공책을 보여주렴.” 토마스는 반응이 없다. 선생님은 다른 아이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수업이 끝난 뒤 토마스를 자기 방으로 불렀다. “선생님도 네 나이였을 때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내가 쓴 글을 소리 내어 읽지 못했단다.” 토마스는 눈물을 보이며, 공책을 내밀어 보였다. 날짜별로 짤막한 글이 적혀 있었는데, 그 가운데 읽을 수 있게 쓴 글은 하나도 없었다. 토마스는 특수한 경우가 아니다. 요사이 우리 학교 신입생 가운데 읽기와 쓰기에서 어려움을 겪는 학생이 20퍼센트에 이르기도 한다.
토마스와 교사가 틀린 문장으로 가득한 이야기가 적힌 공책을 앞에 놓고 앉았다. 선생님이 공책을 덮으며 말한다. “오늘 네가 생각한 이야기를 내게 말해주겠니?” 처음에는 더듬더듬, 그러더니 점점 자연스럽게 토마스는 검치호와 영양의 우정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가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종이에 적으면서 이야기를 듣는다. 토마스가 이야기를 마치자 선생님은 그 종이를 토마스에게 건네준다. “내일까지 네 힘껏 이대로 따라 써오렴.” 이튿날 토마스는 최선을 다해 끼적거린 글을 선생님에게 제출했다.
초등학교에서 학생 대부분이 제대로 읽고 쓸 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하는 교육은 더 이상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왜 그럴까? 읽기와 쓰기에 대한 동기를 부여하는 가장 중요한 곳은 가정이다. 아이들이 집에서 읽기와 쓰기가 정말 중요하고 쓸모 있으며 심지어 달콤한 것이라는 사실을 경험하면,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스스로 배우려 한다. 반대로 집에서 어른들이 되도록 쓰기와 관련된 일을 줄이고자 한다면 어떨까? 오늘날 대중매체도 이 같은 안타까운 현실을 부추기고 있다.
담임선생님은 쓰기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에게 효과가 있는 방법을 토마스에게도 적용해보기로 했다. 바로 수업시간에 타자기를 갖고 들어간 것이다. 이내 토마스는 타자기를 쳐보겠다고 맨 먼저 자원했고, 자기 글을 한 글자 한 글자 쳐 내려가기 시작했다. 다 치고 나서 토마스는 처음으로 친구들 앞에서 자기 이야기를 읽겠다고 손을 들었다. 토마스는 더듬더듬 자기가 쓴 글을 다른 아이들 앞에서 읽어내려 갔다. 토마스는 반 친구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한 해가 끝날 무렵에는 이렇게 발표한 글들을 엮어 하나의 책으로 만든다. 토마스의 글도 함께 엮어내게 될 것이다.
글쓰기의 동기: 읽기와 글쓰기에 흥미를 잃은 아이들까지 아우를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다. 즉, 벽보, 학급일지, 아이들이 쓴 희곡을 연극으로 공연하기, 교사와 학생 간의 편지교환 등이 그 예다. 또 아이들이 쓴 글을 직접 책으로 엮는 방법도 있다. 자신이 쓴 글들 중 상당수가 ‘공개적으로 제시되거나 출판’되기 때문에, 아이들도 ‘바르게’ 쓰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글쓰기에 약한 아이들에게 ‘교정’을 보도록 하는 것 또한 글쓰기 연습을 할 동기를 불러일으키기에 좋은 예다.
타자기 하나로 시작된 일이 토마스와 그 반 아이들에게 오전시간의 중요한 일과로 자리 잡았다. 이내 교실 앞 공간에 타자기를 하나 더 놓았는데, 이는 타자기 두드리는 소리가 다른 아이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곧이어 담임선생님은 그 옆에 필요한 장비를 모두 갖춘 작은 인쇄소(인쇄시설이 있는 작은 공간)를 마련했고, 아이들은 인쇄기술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 하나하나를 정렬하고, 제대로 놓였는지 거울에 비춰 다시 한 번 확인한다. 그러고 나서 인쇄판을 정비하고 잉크를 칠한 뒤 시범으로 한 장을 인쇄한다. 인쇄물을 보고 다시 한 번 확인해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바로잡고,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판단되면 50에서 100장을 인쇄한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완성된 인쇄물은 걸어두어 말리고 활자들은 깨끗하게 닦아 다시 상자에 넣어둔다.
2주마다 ‘자유글쓰기’를 한 작품씩 쓰고, 이 과정을 거쳐 선정된 글들이 인쇄, 출판된다. 아이들이 쓴 글을 모아 책으로 엮는 과정은 일주일가량 걸리며 학급 아이들 모두가 참여한다. 첫 번째에 실린 글은 토마스가 많은 정성을 들여 쓴 ‘검치호와 영양의 우정’에 관한 이야기였다. 마침내 이 학급의 모든 아이들은 자신들이 쓴 스물다섯 개의 이야기가 담긴 책을 손에 쥐게 되었다. 이게 다가 아니다. 이 책은 그 뒤 마인츠 소책자 박람회에서 성황리에 판매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같은 자유글쓰기야말로 ‘아이들에게 말할 기회를 주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방식이다.
읽기를 하나의 사건으로 연출하기: 얼마 전부터 헬레네 랑에 학교에서는 ‘책 읽는 밤’ 행사를 열고 있다. 학생들이 자기 교실에 이부자리를 마련해놓고 다 함께 저녁식사를 한 뒤 교사가 책을 읽기 시작한다. 반 시간쯤 지날 무렵 한 아이가 선생님이 읽던 책을 이어받아 읽는다. 또 다시 다른 아이가 연이어 읽고, 그 뒤를 또 다른 아이가 잇는다. 거의 모든 아이들이 잠들 때까지 이렇게 읽는다.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 같은 책을 읽다가 적어도 몇몇 아이들은 심심치 않게 그 이야기에 매료된다. 집을 나와 한 섬에 숨어 있다가 뗏목을 타고 미시시피를 따라 여행하는 허크의 이야기 말이다. 만일 내가 집을 나와 이러한 모험을 떠난다면 어떨까? 부모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놀라실까, 화를 내실까, 아니면 슬퍼하실까? 이런 식의 책 읽는 밤을 보내면서, 아이들은 종종 책을 읽는 행위를 통해 텔레비전으로 접하는 모험이야기와는 다른 어떤 경험을 하게 된다. 책 읽는 밤을 보내고 난 이튿날 아이들이 전날 읽었던 책을 끝까지 읽고 싶어 선생님에게 빌려가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이와 더불어 ‘책 소개하기’라는 것도 있다. 우리 학교의 초등과정 수업에서 이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2주마다 서너 명의 학생들이 같은 반의 다른 아이들에게 책 하나씩을 소개하는 것이다. 자유글쓰기에서처럼 여기에도 하나의 의식이 치러진다. 책 소개는 책의 제목과 저자를 소개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런 뒤 짤막하게 책의 내용을 간추려 소개한다. 마지막으로 다른 아이들에게 책 내용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을 골라 읽어준다. 바로 이 부분에서 아이들은 가장 정성을 많이 기울인다. 이런 식으로 책을 읽어주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큰 즐거움이다. 가장 이상적인 경우는 같은 반의 다른 아이들이 이렇게 소개받은 책에 흥미를 느껴 자기가 직접 읽게 되는 것이다.
책 읽기라는 문제를 넘어, 읽은 것을 어떻게 소화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 또한 매우 중요하다. 학생들은 보통 10학년이 될 때까지 독서일지를 작성하는데, 여기에 책에 대한 자기 감상을 상세히 기록한다. 소감을 간추려 적고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이어질 내용을 상상해보고, 읽은 글을 희곡으로 바꾸어보고, 저자에게 편지를 쓰거나 학교의 독서수업 때 저자를 초대하기도 한다. 9학년의 한 교사는 먼저 학생들에게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 〈변신〉의 첫 문단을 읽어준 뒤, 각자 그 뒤를 이어 이야기를 지어보라고 했다.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스물다섯 개의 이야기는 교정과정을 거친 뒤 인쇄, 출판하여 나중에 학교 축제에서 판매되었다. 10세에서 16세의 아이들을 위해 학교에서 가장 중시하는 과제 중 하나가 바로 ‘읽기와 쓰기를 배우는 학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읽는 것(처음에는 글자를, 그 다음에는 글을, 그 다음에는 그 글 뒤에 숨은 뜻을, 그 다음에는 적어도 몇 개의 맥락을 파악하는 것)’을 배우지 못했거나, 자신의 생각과 의견 그리고 주장이 무엇인지 말하고 쓰는 능력을 키우지 못한 아이는 위험집단에 속한다고 봐야 한다. 이런 아이들은 앞으로 다가올 삶의 과정에서 그리 많은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읽기’와 ‘쓰기’는 죽은 사회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끊임없이 정확하게 비판적으로 ‘읽는 것’을 배운 사람은 혼잡스러운 텔레비전 영상이나 심지어 이른바 ‘진실’을 말한다고 하는 인쇄 매체를 안심하고 대할 수 있다. 관청에서 날아오는 얽히고설킨 단어나 끝없이 긴 문장에 대해, 그리고 자기 자신도 참여하여 공동설립한 시민단체가 낸 성명서에 대해 명철한 판단력으로 반기를 들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용기 있고 기꺼운 마음으로, 분명히 이해할 수 있고 정확하게, 그리고 설득력 있게 대중 앞에서 ‘말하고’ 또한 ‘쓸’ 줄 아는 사람일 것이다.
다투고 화해하기: 민주주의와 책임의식 배우기
요나단과 알렉산더는 서로 미워했다. 그 누구도 이들이 분노에 차서 서로 달려드는 것을 말릴 수 없었다. 몇몇 교사들은 요나단을 다른 반으로 옮기자고 했다. 이 아이는 자기 반 아이들 사이에서도 소외되고 있었다. 두 아이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면 다른 아이들은 보통 알렉산더 편을 들었다. 반 아이들도 반복되는 싸움에 지쳐 있기는 마찬가지였고, 유일한 해결책은 요나단이 사라져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학급 아이들 모두가 함께 짊어져야 할 책임을 쉽사리 거두고 싶지는 않았다.
어느 날 나는 반 아이들과 둘러앉아 “더 이상 이렇게는 안 되겠다. 이 싸움이 너희 반을 망가뜨리고 있구나.”라고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알렉산더와 요나단에게 가운데로 나와 일 미터 정도 사이를 두고 서로 마주보고 앉아 똑바로 쳐다보도록 했다. 둘 다 내켜 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했다. 둘러앉은 아이들에게는 침묵하면서 앉아 있는 두 아이를 위하는 마음으로 평화롭게 화해를 이끌어낼 방법을 함께 생각하도록 부탁했다. 그렇게 한 뒤에 두 아이에게 내가 시키는 대로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나는 서로 상대방이 보이는 전형적인 행동을 한번 흉내내보라고 시켰다.
요나단과 알렉산더는 아마 그 자리를 뜨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아이는 이미 내 제안에 동의한 상태였고 반 친구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요나단은 왼손잡이인 알렉산더가 어떻게 글을 쓰는지 따라 해 보였다. 몇몇 아이들이 킥킥거리기 시작했다. 만일 내가 보고 있지 않았더라면 알렉산더는 즉시 요나단에게 달려들었을 것이다. 그 대신 알렉산더는 근시인 요나단이 자기 안경을 닦고 그것을 어설프게 콧잔등에 얹는 모습을 풍자하는 것으로 맞받아쳤다. 또다시 몇몇 아이들이 웃었다.
다음으로, 서로에게 그래도 좋게 생각하는 점이 있다면 말해보라고 했다. “네 청바지가 마음에 들어.”라고 알렉산더가 말했다. 멍하니 앉아 있던 요나단이 눈물을 보이더니 작은 목소리로 “저번에 네가 그림을 멋지게 그렸어.”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두 가지 과제가 남아 있었다. 매일 아침 반 아이들이 요나단과 알렉산더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고 둘러싼 가운데 두 아이가 서로 하루를 축복해주는 말을 주고받을 것과, 쉬는 시간에 두 아이가 너무 가까이 있지 않도록 반 친구들이 지켜봐 주는 것이었다.
다음 주 월요일, 한 시간가량 유지되던 화해의 분위기가 깨지고 말았다. 요나단은 악수를 하지 않으려고 완강하게 뒷짐을 지고 있었고, 알렉산더 또한 자기도 악수를 하지 않겠다고 했다. 반 아이들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 조마조마해하고 있었다. 나는 지난 번에 두 아이가 나의 당부대로 하겠다고 한 약속을 일깨워줬다. 결국 불편하고 지루한 몇 분이 흐른 뒤 요나단과 알렉산더는 다시 서로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날 이후로 적어도 학교에서만큼은 두 아이 사이에 싸움박질은 일어나지 않았다.
요나단과 알렉산더는 끝까지 악수하는 것을 어색해하고 불편해하기는 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저 형식적으로 하는 인사를 넘어, 시험 잘 보라는 얘기나 테니스 시합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라는 등의 인사도 주고받게 되었다. 매주 학급 전체 혹은 몇몇 아이들이 수행할 과제가 주어졌고, 반년 뒤 요나단과 알렉산더는 ‘화산’을 주제로 함께 발표를 준비하기에 이르렀다. 4년이 흐른 뒤 알렉산더는 나에게 요나단과의 적대관계는 그저 희미한 기억으로 남아 있을 뿐이라고 말해주었다.
핵심내용을 기억하고, 성찰적ㆍ이성적 사고를 하며, 지식을 분류하고 통합하는 등의 능력을 키우는 것은 기본적으로 학교교육이 지향해야 할 바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학교는 그 이상의 것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아이들이 자기가 선택하지 않은 사회 안에서 타인을 배려하고 여럿이 힘을 모아 공부하고 함께 살아가는 법을 학교가 아니면 어디서 배우란 말인가? 학교 말고 어디서 아이들이 민주주의 의식을 체득할 수 있겠는가? 학생들은 일상에서 어떻게 하면 공동체 내에서 자기 책임을 다할 수 있을지, 어떻게 자기 능력과 힘을 자기 자신뿐 아니라 공공의 이로움을 위해 쓸 것인지를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사회적 책임감을 키우는 교육을 행하고 있는 학교가 너무도 적다.
스스로 청소하기: 쓰레기를 예로 들어보자. 학교 청소부가 쓰레기를 치워주는데, 학교는 사실상 건물정비나 학습 자료에 책정될 예산을 삭감해가며 이 돈으로 청소부를 고용한다. 그렇다면 학생들은 왜 자기 학교를 스스로 청소하지 않는가? 우리 학교에는 교실, 학생생활나눔터 그리고 복도 등의 공간이 있는데, 우리 학교는 학년별로 각기 ‘구역’을 나누어주어, 각 구역마다 백 명의 학생과 여덟 명 정도의 교사가 책임을 지고 이 공간을 깨끗하고 아름답게, 또한 학습하기 좋은 분위기로 만들 책임을 지도록 한다. 방학 중에도 말이다. 이렇게 한 결과 아이들의 행동에 변화가 생겼다. 오늘이 만일 자신이나 자기 짝이 청소하는 날이라는 것을 알면, 아이들은 주변 환경에 더 세심하게 신경을 쓴다. 어디에 쓰레기가 떨어져 있는지, 행여 망가진 것은 없는지를 살피고 서로서로 알려준다.
청소가 항상 즐거운 일만은 아니다. 학생들 중에는 간혹 청소하는 법을 몰라 따로 가르쳐줘야 하는 경우도 있다. 세면대를 단 한 번도 닦아보지 않은 아이도 있다. 집에서는 이런 일을 가사도우미나 어머니가 대신해주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청소를 시킨 조치는 뜻밖의 반발에 부딪혔다. 사실 학생과 교사들은 일정 기간이 지나자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관료주의에 사로잡힌 교육청이 이를 막아선 것은 뜻밖이었다. 결국 학생 위생문제가 걸려 합의점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즉, 복도 계단과 화장실은 사설 청소기관에 위탁하기로 한 것이다. 청소에 관한 우리 학교의 방침이 언론에 보도되었을 때 심지어는 독자란에 우리가 아이들을 강제로 “부려 먹는다”는 비난조의 글까지 올라왔다. 우리는 우리 아이들이 자기 생활반경 안에서 환경에 대한 책임의식을 갖도록 하고 싶다. 학교에서 청소를 해본 아이들은 나중에 학교를 벗어나서도 자기 주변 환경에 세심히 신경을 쓰고, 길거리 아무데나 쓰레기 버리기를 주저하지 않겠는가?
학급회의: 학교는 각 이해집단 사이의 끝없는 논쟁으로 학업이 지장을 받거나 심지어 뒷전으로 밀려나는 상황을 막기 위해 어떠한 제도적 틀을 마련해야 한다. 우리 학교에서 ‘벽보’와 ‘학급의회’는 이를 위한 두 가지 핵심적인 제도로, 프랑스 교육학자인 셀레스탱 프레네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제도이다. 학급의회는 벽보를 바탕으로 열리는데, 벽보에는 모든 학생들이 한 주간을 지내면서 자기가 원하는 사항이나 건설적 제안, 비판 혹은 갈등상황 등을 적어 넣을 수 있다. 회의는 회의 진행자가 “벽보에 적힌 내용을 중심으로 오늘의 학급의회를 개최하겠습니다.”라고 말함으로써 시작된다. 회의 진행은 보통 임기당 두 명이 함께 맡아 한다. 교사는 옆에서 벽보에 적힌 첫 번째 내용을 가리킨다. “토비아스가 내 정강이를 세 번이나 발로 찼다.” 이것을 쓴 사람이 먼저 상황 설명을 하고, 이어 토비아스가 자기 입장을 밝히면 다른 아이들도 발언권을 갖고 개입한다. 더는 새로운 발언이 나오지 않고 논조가 반복되기 시작하면 회의 진행자가 해결방안을 내놓는다. 회의를 마무리 지으며 진행자는 당일 회의 때 논의되지 못한 내용이 있는지 검토하고, 이를 다음 회의로 넘길 것을 공표한다.
처음에는 자기가 적은 내용이 그날 다루어지지 못하면 화를 내거나 실망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은 점점 어떻게 하면 주어진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지 배우게 된다. 회의가 혼란스러운 분위기에서 끝나버리는 경우도 생기나, 이 역시 하나의 자연스런 과정이다.교사는 자기 반 아이들이 실제로 학급의 내부 문제와 갈등 상황을 주체적으로 해결하는 법을 터득할 수 있도록 북돋아줘야 한다. 어떤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결국 자신과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는 행위다. 따라서 이러한 행위는 다수결의 원칙만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되며, 좀 더 근본적인 차원의 원칙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강자가 약자를 강압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되며, 우리 학교에서 폭력은 절대로 허용되지 않는다는 등의 원칙 말이다. 특정한 행동원칙이 집단 내에 자리를 잡으면, 그때부터는 생산적인 토론도 가능하다.
실력이 인정받는다: 학업성적의 평가
요샤는 정서가 매우 불안했고 집중을 못 했다. 숙제를 제때 해오는 경우가 없었고, 해오더라도 대충 해오기 일쑤였다. 심지어 어떤 날은 수업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관심조차 없는 듯 마음은 완전히 딴 곳에 가 있을 때도 있었다. 그러다가도 돌연 눈에 띄는 경우가 있었다. 교사들이 ‘연극’이라는 틀로 수업을 진행하고자 하는 날에는 그것이 영어 수업이든 프랑스어 수업이든 관계없이 요샤가 수업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러다가 9학년이 되어 요샤의 숨은 끼가 ‘발견’되었다.
파리에서 온 한 프랑스 연극연출가가 요샤 네 반 아이들과 코메디아 델 아르테풍의 작품을 연습하던 중이었다. 그 연출가는 흥분한 얼굴로 나를 찾아와서는 아주 특출한 재능을 가진 아이가 있다며 요샤 이야기를 했다. 요샤는 훌륭한 코미디언이며, 보기 드물게 타고난 재능을 가졌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그의 평가는 이내 현실로 나타났다. 요샤는 연극반에 들어가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 전체를 뒤흔들었다. 요샤는 관객들을 매료시켰다. 저학년 학생들은 요샤의 사인을 받으려고 줄을 섰고, 요샤의 사진이 나돌았다. 일 년이 지난 어느 5월, 요샤는 주요 역할을 맡게 된 두 번째 작품의 첫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학생들의 학업성취도에 따라 졸업장 수여 여부를 심사하는 회의가 열렸다. 요샤의 경우 자신이 바라던 레알슐레 졸업이 위태위태했다.
결국 학년 말을 두 달 남짓 앞둔 때에 요샤에게 하우프트슐레 졸업 판정이 났다. 요샤의 담임교사는 요샤의 부모님에게 보낼 편지를 손에 쥐고 있었다. 편지가 요샤 어머니의 손에 들어가는 순간, 요샤가 연극반을 그만둘 수밖에 없게 될 것은 눈에 보듯 뻔했다. 무엇보다 지금껏 준비한 공연을 못 하게 되는 것은 요샤로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담임교사에게 이런 사안은 학교 운영자에게 맡겨진 일이므로 학부모와는 내가 이야기를 하겠다고 했다. 그런 뒤 나는 그 편지를 내 책상서랍에 넣어두었다. 첫 연극공연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이어지는 공연들에서도 요샤는 관객들 앞에서 자신의 역량을 한껏 발휘했다.
나는 요샤가 정규수업에 들어가기 전에 요샤를 내 방으로 불렀다. 나는 우선 심사회의 결과가 좋지 않다고 말해주었다. 요샤는 울음을 터뜨렸다. 이 사실을 어머니가 알게 되는 날에는 큰일이라고 했다. 게다가 사진공부를 할 계획인데 이는 레알슐레 졸업장 없이는 아예 시작조차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 한 가지 방법이 있다며 내가 위로했다. 그리고 프랑스어와 물리 과목에서 발표를 하는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저 그런 것 못 해요!” 내용을 하나도 모를뿐더러 그 모든 것을 공부해서 발표 준비를 하는 것은 시간상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어떻게든 할 방법을 찾아야 해. 프랑스어 발표는 내가 도우마.”라고 내가 말했다.
또한 선택과목으로 물리를 택한 고학년 가운데 기꺼이 돕겠다는 여학생이 나타나 요샤에게 필요한 기본 공식들을 가르쳐주는 한편, 발표자료 준비까지도 도와주었다. 요샤는 이렇게 해서 준비한 내용을 낱말 하나하나 외웠다. 이 부문에서 요샤는 물 만난 물고기였다. 그는 마치 하나의 연극 공연을 준비하듯, 모범생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연습했다. 6월 말이 되자 요샤는 자기 관객들, 즉 물리 선생님과 프랑스어 선생님 앞에 섰다. 그들의 반응은 똑같았다. 놀라우리만치 훌륭한 발표였다는 것이다. 요샤가 인간이 스트레스 상황 가운데 성과를 거두는 최고의 예를 보여주었다고 했다.
어쨌든 이렇게 하여 요샤는 레알슐레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다. 몇 년 뒤 요샤가 사진공부를 시작한 지 이미 오래되고 카메라맨 교육을 앞두고 있던 때, 나는 책상서랍을 정리하다가 아직 뜯어보지 않은 편지 한 통을 발견했다. 이 편지는 아직까지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귀한 추억이 담긴 물건 중 하나다. 이를 보며 나는 학교가 아이들에 대해 판단할 때 얼마나 신중해야 하는가를 생각한다.
‘학교 문지방’을 넘어 들어오세요!: 학부모들과의 협동과 갈등
바이스 씨 앞에는 자기 아이의 새로운 담임선생님이 수첩을 하나 꺼내놓고 앉아 있다. “자, 적으세요! 시험일정은……” 그녀 기억에 담임선생님은 자기소개도 하지 않았다. 그녀 옆에 앉은 한 부부는 어쩔 줄 몰라 하는 듯했다. 아마 김나지움에서 맞는 첫 학부모회의인 것 같았다. 질문을 해도 될까? 바이스 씨가 보기에 첫 줄에 앉은 어떤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는 모습이 마치 초등학교 1학년 학생 같았다. 일정을 쭉 훑어본 선생님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말했다. “질문 있나요?”
선생님은 누군가가 입을 뗄 용기를 미처 내기도 전에 말을 이었다. “여러분의 아이가 숙제를 잘 해오도록 함께 신경 좀 써주십시오.”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선생님은 네 가지 사항을 더 이야기했고, 서로 간에 문제가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 자리에 있던 어느 누구도 문제가 생기기를 바라지 않았다. 선생님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첫 만남은 그렇게 끝났다. “이렇게 신속하게 처리되어 좋군요.”라고 말하더니 선생님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학부모회의: 참 신기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경제활동을 하고 자기와 가족을 위해 중요한 결정을 내리고 대화할 때는 당연히 그리고 당당하게 자기 의견을 말할 줄 아는 어른들이, 유독 자기 아이가 공부하는 학교 교실에서 담임선생님과 마주앉게 되는 상황인 학부모회의에서는 전혀 딴사람이 되는 현상 말이다. 그들은 불안한 눈으로 옆에 앉은 다른 학부모들을 쳐다본다. 누가 어떤 행동을 하나? 최대한 눈에 띄어서는 안 된다! 교사가 행여 자기를 이상한 부류로 취급하면 안 되니까. 그래도 대부분은 최대한 잘하려고 노력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자기 아이가 불이익을 당하면 안 되니까.
한편 교사 입장에서 볼 때도 이 학부모회의는 부담스러운 자리다. 질문 하나에도 마치 자기 정당화를 해야만 할 것 같고 통제당하는 느낌이다. 부모는 자기 아이를 교사와는 전혀 다른 눈으로 바라본다. 이런 그들에게 하필 당신 아이가 문제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학부모회의는 이렇듯 요상한 분위기로 흘러갈 수 있다. 서로를 믿지 못하는 교사와 학부모가 마주 앉아 어떤 이는 빠져나갈 구멍을 찾는가 하면, 어떤 이는 자기 권리를 쟁탈해내려는 전투적 자세를 취한다. 이 같은 광경은 사회의 여러 다른 영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자기 권리를 스스로 인식하고 찾지 않으면 권리를 찾기가 힘든 상황 말이다. 학교라고 다를 게 뭐가 있겠는가? 수줍어하지 않고 자신감 있게 앞에 나서는 사람만이 대우를 받는다. 다른 방식은 없을까? 다음은 어떨까?
바이스 씨 앞에 자기 아이의 새로운 담임선생님이 수업자료들로 가득 찬 상자 하나를 두고 앉아 있다. “이제부터 우리가 지난 몇 주간 여러분의 자녀들과 어떻게 수학수업을 진행했는지를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마지막으로 도형을 접한 게 언제였는지 그녀는 기억조차 할 수 없다. 그녀 옆에 앉은 한 부부는 어쩔 줄 몰라 하는 듯했다. 아마 헬레네 랑에 학교에서 맞는 첫 학부모회의인 것 같았다. 질문을 해도 될까? 그녀의 눈에 저기 저 마지막 줄에 앉아 있는 한 아버지마저도 호기심이 발동한 것처럼 보였다. 교사가 학부모들을 바라본다. “질문 있나요?” 거의 30분이 다 되도록 학부모들은 판에 이리저리 핀을 꽂아 도형을 만들고 있다. 그러는 동안 선생님은 자기가 왜 되도록 학생들에게 숙제를 내지 않으려 하는지, 그러나 간혹 숙제를 내줘야 하는 상황에서 왜 부모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지를 설명한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어서 공동으로 네 가지 핵심사항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낸다. 선생님은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한뜻이어서 좋군요.” 선생님은 자리를 뜨기 전에 문제가 있으면 언제든 전화를 달라고 당부한다.
예로 든 학부모회의는 물론 아주 이상적인 경우로, 우리 학교에서도 예외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다른 학교들과는 분명 구분되는 점이 있다. 대부분의 학부모들이 이 학부모회의를 학교를 함께 만들어나가는 데 동참할 수 있는 하나의 기회로 본다는 사실이다. 이 자리에서 학부모들은 적극적으로 발언권을 가지며, 자기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선생님들과 함께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수업과 교육 전반에 대해 서로 의견을 나누고 조정할 수 있다. 참여율도 매우 높아서 교실은 항상 꽉 찬다.
학부모를 학교 일상에 엮기: 학교 입장에서 보면 학부모는 절실히 필요하고 중요하며 신뢰할 수 있는 학교의 동반자와도 같다. 유독 우리만 학부모가 자기 아이의 활동에 동참하는 것을 마땅하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다. 수업시간에 다루었던 내용은 어떠한 형식을 통해서든 공개된다. 부모들은 자기 아이가 무엇을 배웠는지 볼 수 있고, 아이들이 학교에서 잘 지내고 있는지, 얼마나 편안함을 느끼며 학교를 다니고 있는지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카이는 자기 집 복도에 있던 대나무를 학교에 가져다 놓겠다고 졸라댄 끝에 결국 허락을 받아냈다. 이 나무를 자기네 교실 한쪽 구석에 놓으면 잘 어울릴 것이라 생각해서 그런 것이다. 한나와 도로테아는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책을 다른 친구들도 읽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학교에 가져와 창가 선반에 꽂아 놓았다. 부모들은 학교에 와서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그제야 자기 아이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별다른 설명이 없이도 이해하게 되며, 나아가 자기가 도울 일은 없는지를 찾기도 한다.
〈장화 신은 고양이〉의 첫 공연을 엿새 앞둔 시점에 프랑크푸르트 극장에서 무대의상을 빌려주겠다던 약속을 취소했다. 우리는 학부모들에게 급히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일곱 명의 어머니들이 여선생님 한 분과 함께 밤낮으로 재봉틀 앞에 앉아 무대의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리허설은 반쯤 완성된 의상을 입고 진행했다. 마지막 30분을 남겨놓고 완성된 이 완벽한 의상을 입고 첫무대에 선 극단은 빛났다. 일곱 명의 어머니들도 이 단원들만큼이나 자랑스러웠다. 다른 학부모들은 첫 공연이 끝나고 열릴 잔치를 위한 음식을 준비했다. 한 부부는 매표소를 지켰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공연이 성공리에 이루어지기를 기원했다. 학부모들의 이 같은 전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아마 공연은 어떻게든 진행이야 되었겠지만, 그 수준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을 막을 길이 없었을 것이다.
학교가 가정교육에 관여하는 문제에 대하여: 학교교육과 부모의 교육은 긍정적 혹은 부정적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학교와 학부모가 공동의 목표와 방법에 대해 기본적으로 한뜻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이는 오랜 시간과 끊임없는 도움닫기 작업들, 또한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신뢰란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경험을 통해 얻는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학교에서 아이는 글을 읽고 독후감을 쓰며 맞춤법을 익히고 정기적으로 이야기와 시를 창작해 발표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그러나 집에서는 정반대다. 하루 중 많은 시간을 텔레비전을 보거나 컴퓨터 앞에 앉아 보내는데, 이런 일은 부모의 암묵적 동의하에 이루어지곤 한다.
우리는 이런 부분에 대해 스스로를 성찰하자는 의미로 사순절 기간을 종종 활용했다. 이 기간에는 학생뿐만 아니라 교사까지도 모두가 자기가 절제하기 힘든 것을 참는다. 자주 언급되는 것으로 군것질이 있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많이 나오는 얘기는 텔레비전이다. 그래서 우리는 3일 동안 각자 텔레비전 시청에 대한 자기평가를 하고 나서, 그 뒤 일주일 동안 텔레비전을 절대 보지 말자는 약속을 했다. 그 주에 아이들은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를 털어놓느라 난리가 났다. 집에 그냥 있기가 너무 힘들다는 것이었다. 부모들조차 그런 약속은 왜 했느냐며 농담을 했다고 했다.
이에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학부모와 합의가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아이 방에 텔레비전을 들여놓는 것에 아무런 문제의식도 가지지 않은 부모라면 아이를 우리 학교에 등록시키지 말아달라는 것을 하나의 기본원칙으로 세웠다. 우리는 입학희망자를 위한 학교설명회에서 누차 우리 학교의 교육목표와 우리가 학부모에게 바라는 점(예를 들어, 학생들은 글 읽는 법을 텔레비전이 아니라 책을 통해서 배운다는 점)을 설명했다. 그런데 만일 어떤 학부모가 이러한 교육방침에 동의하지 않아 가정에서는 학교의 교육방침에 반하는 입장으로 아이를 대한다면, 그 아이는 학교와 학부모가 한뜻으로 아이를 대할 때보다 혼란을 겪을 것이 당연하다.
이렇게 한 아이의 교육은 학교와 가정 모두가 책임을 지고 해나가야 할 일이다. 학교는 학생들
에게 삶의 바탕이 되는 지식을 체계적으로 전달하고 학생들이 이를 체득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동시에 학교는 여러 가지 행사, 편지, 자료 등을 이용해 학부모에게 수업의 목표와 내용을 알릴 의무를 진다. 학부모는 학교에서 제공받은 정보를 바탕으로 자기 아이를 집에서 어떤 식으로 도울 수 있을지 생각해야 한다. 아이에게 과외를 시키고 받아쓰기나 단어암기를 하게 하라는 게 아니다.
읽기와 쓰기를 예로 들자면, 아이에게 장볼 거리 목록을 만들라고 한다거나, 할머니에게 편지를 쓰게 하는 등 다양한 글을 써볼 기회를 제공해준다든지, 아이가 읽고 있는 책에 대해 한가한 저녁시간에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든지 하는 것을 뜻한다. 자기 아이가 읽고 쓰는 일을 즐기는 환경을 만드는 데 자신이 얼마나 기여했는지 잠시나마 돌아보는 학부모가 많아진다면, 자기 아이의 읽기와 쓰기 능력이 그저 그런 것에 대한 책임을 모조리 학교교육에 돌리는 부모들의 원성도 줄어들지 않을까?
<“꿈의 학교”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 헬레네 랑에 에냐 리겔 지음, 착한책가게>
복숭아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