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2차 대전이 막바지에 다다르면서 양측은 신중한 태도를 완전히 버렸고, 가끔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히틀러가 나치의 괴테르다메룽(신들의 황혼을 의미하는 독일어. 독일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가 북유럽 신화를 바탕으로 작사 작곡한 악극 <니벨룽겐의 반지>의 마지막 장 제목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나치의 붕괴를 의미한다.) 준비를 마무리하는 동안, 그때까지 세계대전을 어느 정도 잘 치렀다고 본 처칠은 지체 없이 소련과의 또 다른 전쟁을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사이 붉은 군대는 동유럽을 통과해 무자비하게 진격했고, 서방 연합군은 라인 강 쪽으로 돌진했다. 넓은 태평양 전선에서 일본군이 이오지마와 오키나와에서 사력을 다해 용감하게 싸웠지만, 대체로 전세는 연합군 쪽으로 기울었다. 연합군은 일본 본토를 나락으로 떨어뜨릴 계획을 이미 수립하고 있었다. 몇 개월간의 공습으로 일본인들에게 지옥을 일찌감치 경험하게 했지만, 여전히 격렬한 저항이 예상되었다. 따라서 일본 본토 침공 계획인 다운폴 작전(Operation Downfall)을 조금이라도 낙관적으로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전이 추진된다면 엄청난 규모로 정교하게 조직된 보급 활동이 무엇보다 필요했다.
다운폴 작전; 연합군의 일본 본토 침공 계획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는 핵무기 시대의 시작을 알렸다. 맨해튼 계획이 기대했던 성과를 매우 크게 (‘시의 적절하게’라는 말이 더 나을 수도 있지만) 내주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잊기 쉽다. 원자폭탄의 개발이 늦어졌다면 전쟁의 향방은 달라질 수도 있었다.
사실 전쟁터에 있던 지휘관과 고위 참모조차 재래식 싸움이 끝까지 계속될 것을 우려했다. 이들이 원자 폭탄의 위력을 알면서도 비밀 유지를 위해 작전을 수립하는 척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맨해튼 계획은 너무 철저하게 보안이 유지되어 군 최고 지휘관들에게조차 공개되지 않았다. 따라서 군은 일본군과의 결전을 준비할 때 매우 진지하게 임했고, 실제로 실행에 옮길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포위 공격: 가까스로 전세가 바뀌어서 연합군에 유리하게 돌아가는 것은 분명했지만, 최종 승리까지는 아직도 갈 길이 길고 험난하리라는 것도 확실했다. 일본군은 한발도 물러설 것 같지 않았다. 이제 이들은 자신의 목숨뿐만 아니라 아내를 비롯한 가족들, 그리고 자신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조국의 운명을 걸고 싸워야 했다. 일본군이 용감하게 싸우든지 아니면 절망에 빠져 있든지 간에, 전장에서 저항을 지속할 수 없도록 분열을 크게 조장하는 것이 연합군의 목표가 되어야 했다.
연합군의 일본 공습은 전쟁 내내 단발성으로 이루어졌지만 1944년 후반에는 폭격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상황은 미군이 태평양에서 탈환한 섬에서 새로운 기지를 확보함에 따라 탄력이 붙었고, 1945년 초 연합군은 일본을 포위했다.
결정의 시기: 무자비한 공습으로 일본군의 저항력을 아무리 약화시키더라도 전쟁을 어떻게든 끝내려면 어느 일정 시점에 본토를 침공해야만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역사상 최대 규모의 상륙 작전이 수립되었다.
1945년 2월 몰타 섬에서 열린 연합군 참모본부가 개최한 아르고 회담(Argonaut Conference)에서 처음으로, 그리고 다소 시험적으로 제안된 다운폴 작전은 5월 25일 회의에서 본격적으로 검토되었다. 취임한 지 몇 주 되지 않은 해리 트루먼 대통령(1945년 4월 12일 루스벨트 대통령이 뇌출혈로 사망하자 부통령 트루먼이 대통령직 승계)은 일본 침공을 주제로 한 합동참모본부 회의에 참석했다.
이 무렵 처음으로 이러한 논의가 성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키나와 전투가 벌어진 지 이미 2개월이 지났음에도 아직 몇 주를 더 싸워야 했고, 사상자가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확실히 전쟁은 마무리 단계에 있었다. 그 사이 전세가 완전히 연합국으로 기울었다. 일본군은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이전처럼 승리의 확신에 따른 용기라기보다 절망에서 비롯된 영웅심으로 싸웠다. 일단 미군이 오키나와와 류큐 열도의 나머지 섬을 장악하면 일본군은 태평양 기지를 모두 잃게 되었다. 남은 것은 본토 섬을 지키기 위한 싸움뿐이었다.
따라서 미군은 일본 침공을 결정했고, 미 육군 태평양 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이 침공군을 지휘하고 태평양 함대 사령관인 니미츠 제독이 이를 지원하기로 했다.
다운폴 작전의 추진 논리: 작전의 총책임자인 맥아더 장군은 당시 상황과 다운폴 작전의 추진 논리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일본 함대는 사실상 무력화되었다. 일본 공군은 조직이 와해되었고, 훈련기를 비롯하여 모든 기종을 동원해 자살 공격을 할 정도로 축소되었다. 전력 손실이 크고 활동을 지속할 힘도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다. 류큐 열도에 연합군 항공 전력이 구축된 뒤에 이러한 상황은 더욱 뚜렷해질 것이다. 장거리 공격의 템포가 빨라지면서 적의 대응 항공기 동원 능력이 감소하고, 일본군의 잠재 전력도 급속도로 쇠퇴할 것이다. 항공모함 탑재 항공기와 더불어 류큐 열도에 비행 기지가 생기면 규슈 상륙을 지원하는 데 충분한 항공력을 제공하게 되고, 이 지역에서 우리 공군력을 구축하면 혼슈 상공에 대한 완전한 공중 우세를 보장할 수 있을 것이다.”
올림픽 작전과 코로넷 작전: 일본은 여러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로, 남쪽에는 규슈 섬이 있고 더 남쪽에 류큐 열도가 줄지어 있다. 연합군 계획은 류큐 열도의 섬들을 최종 공격을 위한 발판으로 삼아 그때까지 고수해 온 ‘아일랜드 호핑’ 전략을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11월 1일에 착수가 예정된 ‘올림픽 작전’은 남쪽에서 규슈를 공략해 주요 인구 밀집 지역에서 대한 해·공군 공격을 유지·강화할 기지를 확보하는 것이다. 이 작전으로도 일본이 완전히 항복하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코로넷 작전’을 실행할 예정이었다. 1946년 3월 1일에 개시할 이 작전은 도쿄를 비롯해서 혼슈 중앙에 있는 칸토 평원에 대한 대규모 직접 공격이 포함되어 있었다. 작전을 2단계로 나눈 데는 전술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중요하게 고려된 것은 군수 문제였다.
올림픽 작전에 착수한 후 몇 주 동안 유럽 전쟁이 끝날 것으로 예상했지만 여전히 처리할 일이 많았다. 엄청난 병력과 장비를 극동 지역으로 옮기는 데 어려움이 있어서 1946년이 되어서야 제대로 된 병력 증원이 가능했다.
대규모 전력 동원: 연합군은 항공모함과 마리아나 제도에 속한 괌, 티니안, 사이판처럼 탈환한 섬, 그리고 오키나와 같이 일본 열도에 속한 섬에서 이륙한 항공기를 동원해 규수 남부의 적 저항력을 약화시키려 했다. 상륙 공격 자체에는 일본 앞바다에 있던 미영 항공모함 최소 32척의 함재기 1,900대와 오키나와에 배치된 항공기 2,700대를 배정했다. 공세는 서너 곳으로 나누어 실시하고 14개 사단 최소 40만 명을 동원할 계획이었다. 수송함정과 상륙함정은 약 1,300척이 필요했다.
당시로서는 대규모 작전이었다. 한 해 전에 실시한 노르망디 상륙 작전만 해도 연합군 5개 보병사단과 3개 공수사단이 투입되었는데, 코로넷 작전에만 25개 사단 약 50만 명과 군수품 61만 톤이 추가로 필요했다. 작전 기획자들이 더 세부적인 계획을 수립하지는 않았지만, 두 작전은 전함 수백 척 등 대규모 해군 지원도 필요했다. 작전의 성공을 장담했던 맥아더도 ‘군수가 가장 어려운 문제’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상륙 부대는 거점을 확보하고 장비와 군수품 68만 6,000톤을 내린 뒤에 북진에 착수하려 했다. 섬 중간까지 올라가면 동서로 높은 산등성이가 일종의 자연 방벽 역할을 하는데, 연합군은 이곳에 자리 잡고 일본군의 반격에 대비할 계획이었다. 당분간 이 지역에 연합군의 전선을 구축하려 한 것이다.
패망을 앞둔 일본: 계획이 구체화되면서 처음의 적극적인 목소리는 수그러들었고, 결국 ‘일본 열도에서 조직적인 저항을 끝내는 데 필요한 정도의 작전’이 제시되었다. 객관적으로 어느 정도의 불확실성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일본이 전쟁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반드시 항복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오히려 필사적으로 싸움에 나설 가능성이 높았다.
이 무렵 연합군은 승리를 충분히 예상했지만 그것이 언제가 될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대신 어느 정도 불특정한, 그리고 인지하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시점에 전세가 기울면서 전면적인 공격이 소탕에 가깝게 바뀔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마무리 단계가 수개월 또는 심지어 수년간 지속될 수도 있었다.
원폭 투하: 일부 일본인들은 외세와 싸우기 위해 수백만 명이 죽창이라도 들고 나서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했지만, 일부는 비탄에 젖은 채 이러한 선동에 고개를 저었다. 불행하게도 일본에서 여전히 큰 권력을 쥐고 있던 군 수뇌부 가운데 착각에 빠진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최후까지 영웅적으로 저항하기 위해 훈련기와 정찰기 할 것 없이 일본군이 보유하고 있는 모든 항공기를 카미가제 자살 공격용으로 개조했다. 7월 무렵 8,000대를 모았고, 9월에는 2,500대를 추가로 모을 예정이었다. 적어도 영광의 불길 속에 뛰어들고자 했던 것이다.
이렇게 절망적이고 점점 더 비현실적인 분위기에서, 마른하늘에 날벼락같이 ‘리틀 보이(Little Boy)’와 ‘팻 맨(Fat Man)’이라는 이름의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원폭 투하는 일본인들만큼이나 대다수 미국인들도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었다. 물론 피해를 당한 쪽은 일본이었다. 2개의 도시가 완전히 쑥대밭이 되었다. 13만 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고, 살아남은 사람 중에서도 수십만 명이 방사능에 노출되어 이후에도 고통을 겪었다. 원폭 투하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이 때문에 많은 생명, 특히 미국인의 생명을 살렸다고 말한다. 도덕적으로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이러한 주장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착수 시기가 임박해서 취소된 다운폴 작전을 대규모 희생 없이 실행에 옮기는 것은 불가능했다.<“가짜전쟁”에서 극히 일부요약 발췌, 마이클 케리건 지음, 역자 박수민님, 시그마북스>
▣ 저자 마이클 케리건
영국 리버풀에서 태어났고 세인트 에드워드 칼리지와 유니버시티 칼리지,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했다. 영국 일간지 《Scotsman》과 문학 평론지 《Times Literary Supplement》의 고정 필진으로 활동하며 고대와 현대사 전반에 걸쳐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한 측면에 초점을 두고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공동 저서로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리더스 다이제스트 세계사(The Reader’s Digest Illustrated History of the World)』가 있고, 이 책의 후속작 『냉전의 미실행 작전(Cold War Plan That Never Happen)』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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