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두르지 말고, 머뭇거리지도 말고
우리의 인생은 두 종류의 시간으로 흐른다
도심 한복판에서 일을 하다 보면 분 단위, 초 단위로 일하는 것이 몹시도 당연하게 느껴진다. 분초를 다투며 정신없이 움직이는 게 자연스럽게 여겨진다. 하지만 지방에 한번 내려가 보라. 때때로 이 모든 일이 무의미하게 보이기도 한다. 얼마 전 교토에 갔을 때도 그랬다. 카페 취재를 갔는데, ‘프랑소와’라는 교토의 오래된 카페에는 분명히 도쿄의 카페와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1934년에 창업했다는 그곳은 바로크양식의 고풍스러운 인테리어에 조용한 음악이 흘렀다. 무심하게 놓인 메뉴의 표지 그림은 이곳의 단골이었던 화가 후지타 쓰구하루(藤田 嗣治)가 그린 것이었다. 많은 문화인들에게 사랑받은 ‘프랑소와’에는 여전히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느긋하게 대화를 즐기고 있다.
늘 스톱워치를 들고 다니면서 일의 속도를 중시하는 나로서도 이렇게 지방에 가서 맛보는 ‘느긋한 시간의 흐름’은 결코 싫지 않다. 싫기는커녕 요즘은 일상에서 그런 시간을 많이 만들려고 노력한다. 그 감각의 차이는 도시에서 바쁘게 일하다가 휴가를 얻어 지방에 갔을 때 느끼는 인상과 비슷하다. 다른 것이 있다면 휴가는 기간이 한정되어 있지만, 인생은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것이다. 길어야 일주일인 휴가 때는 아무것도 안 하고 지낼 수 있지만 인생을 그렇게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휴가를 통해 맛보는 여유로운 시간은 좋지만, 그 좋은 느낌은 어디까지나 휴가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현재 일본은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장수국가다. 여성의 평균수명은 86.39세로 26년 연속 세계 1위를 고수하고 있으며 남성은 그에 못 미치지만 79.64세로 세계 4위 수준이다. 이는 은퇴 후의 제2의 인생이 여성에게는 약 25년, 남성에게는 20년가량 있다는 것을 뜻한다. 한 사람이 성인으로 성장하고도 남는 시간이다. ‘여생’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긴 시간이다. 이 아까운 인생을 그냥 없는 셈 칠 수 있겠는가? 물론 더러는 성실히 준비한 덕분에 정년이 되었을 때 ‘이제야 비로소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겠다’며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건 착실히 준비한 일부 사람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이 사라지면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하다가 기운을 잃고 만다.
부지런한 직장인들은 대부분 은퇴를 맞이하는 그날까지 젊을 때와 똑같이 열심히 일한다. 하지만 일에 자신의 모든 인생을 바친 사람일수록 은퇴와 동시에 상실감에 사로잡힌다. 어딘가 소속되어 있다는 느낌, 세상이 나를 필요로 한다는 느낌, 자신이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일순간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런 상실감을 잘 견디려면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 제대로만 준비하면 새로운 세계와 그곳에 흐르는 시간을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기에 충격이 적고, 두 번째 산맥도 수월하게 만들어갈 수 있다.
계속하는 비결은 성취감에 있다
뭔가 배워보고 싶다. 지금까지 안 해본 것을 시도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의외로 많다. 그런데 그 ‘시작’이 참으로 어렵다. ‘내가 과연 계속할 수 있을 것인가’ 고민이 되기 때문이다. 앞에서 하이쿠를 지어 신문에 투고하는 지인이 있다고 했는데, 이런 경우는 가끔이라도 신문에 실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계속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아무리 하이쿠를 지어 보내도 실리지 않고, 그래서 결국 투고를 그만두면 결과적으로 하이쿠 짓기 자체에도 흥미가 떨어질 것이다.
인간이 무언가를 지속하려면 의욕이 유지되어야 하고 지속적으로 동기부여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젊은 시절이나 나이가 들어서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다른 점도 있다. 인생의 후반 특히 제3단계 이후에는 거창하게 ‘목표’를 내걸지 않아도 된다. 소소한 성취감을 느낄 수 있을 정도면 된다.
나의 아버지는 예순을 넘기고 한가해지자 직소퍼즐과 오층탑 쌓기 등의 모형 만들기에 집중하셨다. 매일 텔레비전을 보면서, 혹은 술을 홀짝거리면서 퍼즐을 맞추고 모형을 만드셨다. 항상 무언가를 만들고, 하나가 완성되면 다음번에는 더 어려운 것을 사 와서 다시 만드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우리 앞에는 상당히 많은 직소퍼즐이 완성되어 남았다. 모형 역시 완성품의 수가 많았는데, 꽤 세밀한 부품을 붙여서 만든 큰 배도 있었다. 어찌나 그 수가 많고 정교한지 ‘이 에너지를 조금 다른 곳에 쓰셨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데 한번 빠지면 하나를 완성하면 또 다른 것을 만들고 싶어진다고 한다. 섬세한 작업을 좋아하는 사람은 더 세밀하고 더 난이도가 높은 것을 찾게 된다. 핀셋을 이용해 위스키병 속에 배를 만드는 ‘보틀 십(bottle ship)’에 빠지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다. 나는 완성된 보틀 십을 보고 그 섬세한 작업 과정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땀이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귀찮고 어려울수록 완성했을 때의 성취감도 커서 연세가 있으신 분들도 즐겨 만든다고 한다. 아버지는 모형이나 퍼즐 외에도 나무를 깎아서 담배 파이프를 만들기도 했는데 깎으면 깎을수록 재미난다고 하셨다. 사람의 손이 닿으면 닿을수록 좋아지는 것. 화초 기르기도 그런 취미 가운데 하나다. 세상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비싼 화초도 있다. 그런 고가의 화초는 가지의 형태나 줄기의 휘어짐에도 상당히 신경을 써서 손질해야 한다. 관심이 없는 사람은 도저히 알 수 없는 깊고도 섬세한 세계다.
이처럼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성취감을 얻을 수 있는 것, 혹은 정성스러운 손길을 더할수록 좋아지는 것을 찾아라. 그것이 바로 새로운 것을 오래 지속할 수 있는 비결이다. 내 손이 닿음으로써 없었던 것이 생기고, 조금씩 다른 모습을 갖춰가는 것을 지켜보는 건 상당히 신비한 경험이다. 그것으로 성공하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계속해서 완성하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둔다면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다. 자신이 어떤 것에 성취감을 느끼는지, 아무리 해도 질리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기 바란다.
인생을 하나의 명작으로 완성하라
화가는 자신에게 맞는 ‘모티브’를 찾지 못하면 예술 인생을 제대로 꽃피울 수 없다. 세잔느에게 젊었을 때의 모티브는 사과였고, 최후의 모티브는 생 빅토와르 산(세잔느의 고향에 있는 산)이었다. 그리고 사에키 유조(佐伯 祐三)의 모티브는 ‘포스터가 붙어 있는 파리의 벽’이었던 것 같다. 세잔느는 자신의 기질에 맞는 모티브를 발견하는 것이 화가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비단 화가뿐 아니다. 작가도 그렇고 음악가도 그렇고 자신이 몰입할 대상, 자신의 세계를 확장시켜나갈 대상을 찾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인생의 원숙기를 맞이한 사람에게도 이러한 모티브가 필요하다. 예술가들이 자신의 모티브를 찾았을 때 비로소 독자적인 스타일을 확립할 수 있듯, 어떤 사람이든 제2의 인생을 풍요롭고 보람되게 보내려면 자기 나름의 ‘모티브’를 찾아야 한다. 그렇다고 너무 어렵게 생각할 일은 아니다. 어떤 이에게는 등산, 또 어떤 이에게는 장미꽃 접기가 모티브가 된다. 개가 모티브인 사람도 있고 스모가 그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도 있다. 생각만 해도 즐겁고 알면 알수록 흥미가 가는 것, 스스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것이면 충분하다.
무언가 하나를 모티브로 삼으면, 모든 것을 그 기준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렇기에 무엇이 모티브냐에 따라 일상의 풍경이 달라진다. 어느 것이 좋고 나쁘다는 기준은 없다. 각자 제각기 친숙하게 느끼는 것, 끌리는 것을 삶의 중심으로 끌어안으면 된다. 젊을 때는 특별히 좋아하지 않았는데 나이가 든 이후 새로운 것에 관심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 세잔느는 만년에 생 빅토와르 산만을 바라보았고, 모네는 수련만을 끈질기게 그렸다. 이러한 방식은 언뜻 고집스러워 보이지만, 아마 그들 내면에는 매우 안정된 편안함이 자리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을 편안하게 하는 것,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생각이 나는 것이 바로 모티브다. 쉽게 말해 모티브란, 지금 자신이 몰두할 수 있는 무언가이다.
새로운 것에 눈을 뜨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이를 먹은 후 어릴 때의 취미로 되돌아가는 사람도 종종 있다. 최근 『시즈오카 모형전사(靜岡模型全史)』라는 책의 서평을 부탁받았는데 다미야, 하세가와, 아오시마, 반다이, 후지미 등 시즈오카에서 탄생하고 성장한 모형회사의 증언을 엮은 책이다. 시즈오카는 프라모델 회사의 발상지이자 번성지인데, 어렸을 때 프라모델을 만든 적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책이 무척 반가울 것이다. 프라모델을 어린아이들이나 가지고 노는 장난감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세계도 나름 깊고 전문적인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 나이를 먹은 지금도 프라모델 팬임을 자부하는 어른들도 많다. 어렸을 때 좋아하던 놀이가 평생 지속되고, 이를 죽을 때까지 즐길 수 있다는 것은 상당히 행복한 일이다. 산이나 돌, 불교처럼 나이 들고 나서 새로 눈뜬 것에 몰두하는 사람도 있고, 어릴 때의 취미를 다시 찾아 즐기는 사람도 있다.
어떤 경우든 상관없다. 자신이 행복한 한때를 보낼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괜찮다. 인생 후반기에 무엇을 즐기며 무엇에 몰두할지, 즉 무엇을 모티브로 삼을지는 인생의 마지막을 어떤 색으로 채색할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다. 인생을 하나의 명작으로 완성하고 싶다면, 자신만의 모티브를 찾아라.
더 큰 세계를 상상하라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살아오며 이미 한두 번쯤 어쩔 도리 없이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경험을 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인간은 현재에 머무를 수 없고 흐르는 강물처럼 언젠가는 그 여정을 모두 마치고 큰 바다로 나아가야 할 때를 맞이한다.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의 작품 『마음』의 주인공인 선생님은 ‘메이지 정신을 위해 순사(殉死)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을 하는데, 노기 마레스케(乃木 希典)에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그려진다. 이는 혼자 죽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막상 죽음을 대면하고 보니 외롭고 두려워서 메이지 정신, 혹은 노기 마레스케와 함께 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물론 순사는 전근대적인 윤리관이지만, 인생의 마지막에 누구와 정신세계를 함께할 것인가를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 이는 인생을 마무리하는 데 필요한 하나의 큰 명제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도 있고, 붓다를 섬기는 사람도 있다. 요시다 쇼인(吉田 松陰)이나 사카모토 료마와 함께하겠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정신적으로 누굴 따를지 생각하고 그 세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면, 비록 몸은 분리되어 있을지언정 정신적으로는 같이 살고 같이 죽을 수 있다.
예순 살까지는 딱히 정신적 지도자의 손을 잡지 않아도 일이나 육아 같은 할 일이 많기 때문에 시간이 바쁘게 지나간다. 하지만 일을 그만두고 아이들도 품을 떠나 각자의 가정을 꾸리고 나면 그때와는 전혀 다른 흐름의 시간이 찾아온다. 70대 중반을 넘어 인생의 ‘제로 출력기’에 들어서면 슬슬 옛 선현, 역사상의 인물 중에서 정신적 지도자를 찾는 것이 좋다. 마음을 안정시키는 데 이만큼 좋은 방법도 없기 때문이다. 마음을 울리는 가르침, 인생의 진리를 깨칠 수 있는 한 줄의 명언은 큰 의지가 된다. 정신적으로 기댈 수 있다면, 영감과 깨달음을 준다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디서든 그 대상을 찾아라.
일본 대체의학의 권위자인 오비쓰 료이지(帶津徠一)는 죽음을 앞둔 환자들에게 한 가지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중에는 환자들이 하도 조르는 통에 똑같은 이야기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했다고 한다. 환자들이 이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 이유는 그 속에서 어떤 안식과 평안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야기는 이렇다. “우리 생명은 이 세상에서 끝나지만 모든 것이 끝은 아니다. 우주라는 큰 흐름 속에서 보면 우리의 생명은 우주를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이고, 우주에서 받은 생명은 언젠가 다시 우주로 되돌려주지 않으면 안 된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했다 해도 ‘생명’은 여전히 신비롭고, 아직 많은 것이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오비쓰 료이지의 이야기는 그런 생명의 미스터리를 자기 혼자만의 문제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더 큰 흐름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정신적으로 의지할 무엇인가를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인생을 마무리할 때 많은 차이가 난다. 인생을 관통할 진리 하나를 마음에 품은 사람은 생을 마무리할 때 그렇지 않은 사람과는 다른 표정을 짓는다. 그들은 아쉬움과 회한의 표정이 아니라 평안한 미소를 머금는다.
<"타임 콜렉터"에서 극히 일부 요약발췌, 사이토 다카시 지음, 역자 황미숙님, 명진출판>
▣ 저자 사이토 다카시
메이지 대학교 문학부 교수이자 베스트셀러 작가. 깊이 있는 사유와 실용을 결합한 새로운 스타일의 글을 선보이며 활발한 집필활동을 펼친 덕에 ‘학문적 연구 성과를 누구보다도 대중적으로 전달한다’는 평을 얻고 있다. 일본 최고의 교육심리학자이자 CEO들의 멘토로 인정받으며 다양한 분야에서 맹렬하게 활약하고 있지만, 마흔다섯에는 병으로 쓰러져 큰 위기를 맞은 적도 있다. 그것은 그에게 세계관을 바꿀 정도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추상적으로만 생각했던 ‘죽음’, 즉 ‘시간의 끝’을 눈앞의 현실로 느꼈기 때문이다.
그 후 인생 후반전을 제대로 행복하게 살아내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와는 확연히 다른 시간감각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 깨달음을 실천적 지침과 함께 집필한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다. 1960년생인 그는 여전히 각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는 동시에, 행복한 제2의 인생으로 이행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인생의 각 단계에는 그에 맞는 시간 사용의 기술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그는 이 책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길어진 인생을 더 행복하게 완성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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