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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우다이모니아’를 찾아서!

[중산] 2012. 11. 21. 18:13

 

아리스토텔레스가 권하는 행복하게 살아가는 기술!

 

나는 고대 그리스철학에서 자주 만나는 자급자족이라는 이상이 ‘좋은 삶’을 살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고독한 요새에 홀로 안전하게 있는 무적의 금욕적 슈퍼맨이 아니고, 그렇게 되려고 노력해서도 안 된다. 우리에게는 서로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현대의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인간은 몇 세기에 걸쳐서 교회, 국가, 공동체의 간섭으로부터 개인을 해방시키려고 투쟁해 왔다. 그렇게 개인의 자유와 프라이버시를 얻었지만, 그 대가로 심한 외로움 또한 얻었다. 우리는 자유롭고 개인적이며, 자율적인 개인을 지나치게 강조한다. 상처를 받아도 다른 사람들이 없는 데서 받는다. 아리스토텔레스(BC384-322)는 기원전 384년에 그리스 북부 해안도시인스타게이로스에서 마케토니아 아민타스 왕의 주치의 아들로 태어났다.

 

열여덟 살 때 그는 아테네로 와서 아카데미아에서 플라톤에게 수학했다. 그리고 플라톤의 가장 유명한 제자이자 플라톤을 비판한 가장 위대한 인물이 된다. 그는 아카데미아에서 20년 동안 공부했고, 플라톤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아테네를 떠나 그리스와 소아시아 일대를 여행했다. 그 후 마케토니아 필리포스 왕 아들의 개인교사가 되었다.

 

라파엘로<아테네학당>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앙에 서있다.

플라톤은 하늘을 가리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땅을 가리킨다. 플라톤은 지상의 것이나 구체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었고, 추상적인 것과 신적인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훨씬 과학자 같은 면모를 지녔고, 지구상에서 사물이 가능하는 방식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런던 임페리얼칼리지의 아만드 르로이교수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대단히 박학다식했고, 생물학에서 논리학, 문학 비평에 이르기까지 각종분야에 글을 썼다. 플라톤이 글을 훨씬 더 잘 썼지만, 인류 역사상 아마도 세익스피어 정도를 제외하고는 아리스토텔레스만큼 폭넓은 분야에서 박식함을 자랑한 지식인도 없을 것이다. 그는 생물학에서 심리학, 문학, 윤리학, 정치학, 천체물리학에 이르기까지 우주 전체를 아우르는 철학을 창조했다. 그리고 이 철학은 몇 세기에 걸쳐 가톨릭 교회를 통해서 중세 기독교 국가들의 기초가 되었다. 그 정도로 넓은 영역에 역사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 철학은 칼 마르크스 철학 정도뿐일 것이다. 역시 ‘총체적 철학’인 마르크스주의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비해서는 폭이 훨씬 좁았다.

 

좋은 삶, ‘에우다이모니아’를 찾아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들 니코마코스를 위해 쓴 <니코마스 윤리학>과 <정치학>은 인간의 심리와 윤리학, 정치학과 관련해 통합 비전을 제공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본성에 관한 생물학적 이론에 기초해 윤리학을 정립했다. 즉, 인간의 정신은 합리적인 요소와 불합리적인 요소로 이루어져 있고, 본질적으로 사회적이고 정치적이며 정신적이라 했다. 그리고 ‘좋은 삶’이란 이런 본성을 충족시켜서 행복과 성취로 이끄는 삶이라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비전은 목적론이다. 즉, 모든 것은 어떤 목적을 위해 설계되며, 그 목적을 달성할 때 선을 얻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본성이 만들어진 의도를 만족시킬 때 좋은 삶을 이룬다. 스토아 철학자들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합리성을 이용하여 불합리한 정신을 완전히 무찌르고 열정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스승 플라톤에 좀 더 가깝게 생각했다. 그는 인간이 이성을 이용해 감정을 좋은 쪽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플라톤과는 달리 인간이 절대적이고 영원하며 형태가 변하지 않는 미덕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분별력을 이용하여 끝없이 변화하는 환경속에서 어느 것이 옳은지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플루타르코스의 영웅들처럼 우리는 적절한 때에 적절한 일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중도’에 존재하는 기본적인 미덕이 분명히 있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그 미덕은 용기, 절제, 기분 좋은 유머, 우호적인 태도, 인내 등이다. 예를 들어 용기는 무모함과 겁 사이의 중도에 존재한다. 기분 좋은 유머는 지나친 엄숙함과 저속한 익살 사이의 중도에 존재한다. 지나친 것들 사이에서 이렇게 올바른 지점을 찾을 수 있으려면 연습을 해야 한다. 인간이 미덕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실생활에서 그 미덕을 연습해서 몸에 배게 만드는 것이다. 그는 윤리를 리라를 연주하는 것에 비유한다. 리라 연주자가 연습을 할수록 기량이 나아지듯, 인간도 연습을 통해 성격을 개선할 수 있다는 얘기다.

 

 

오랫동안 훈련하면 습관이 완전히 몸에 배고, 그러면 적절한 때에 자동적으로 적절한 행동을 하게 된다. 그래서 누군가가 우리에게 해를 입히면, 적절하게 분노를 느끼고 적절하게 반응을 한다. 만일 정치인이 된다면 신중하면서도 대담하게 균형을 맞추어 행동한다. 저녁 만찬 자리에 있다면, 적절히 가벼운 농담을 한다. 이러다 보면 결국 잘 살아가는 데에서 거장이 된다. 그리고 윤리적 성취에 대한 일종의 보너스로 행복을 얻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진정한 행복은 에피쿠로스학파에서 말하는 것처럼 단지 기분이 좋거나 고통이 없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진정한 행복을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라고 했는데, 이는 인간 본성에서 가장 고결하고 가장 좋은 것을 성취하는데서 오는 기쁨을 말힌다.

 

 

그는 “행복이란 영혼의 활동이 미덕과 부합하는 것”이며, 그런 최고의 행복을 조국이나 신같이 “더 높은 명분”을 위해 자기 목숨을 희생하는 데서 찾을 수도 있다고 썼다. 에피쿠로스 철학자들은 정신 나간 일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좋은 사회를 위한 행복의 정치학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좋은 삶에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차원이 있었다. 스토아철학에서는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이 좋은 삶을 같이 따라야 할 필요가 없다. 유배지에서든, 감옥에서든, 나 혼자 좋은 삶을 살면 도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미덕은 기분 좋은 유머, 우호적인 태도, 인내 등 많은 부분이 사회적이다. 다시 말해, 좋은 삶은 함께하여야만 성취 할수 있다는 뜻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생물이므로, 공동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면 다른 사람들과 우정으로 맺어져야 성취감을 느낀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우정은 중요한 미덕이다.

 

 

그는 실제로 <니코마코스 윤리학> 전체를 우정이라는 미덕에 할애했다. 에피쿠로스학파도 우정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우정은 정치적 삶과는 단절된 개인적인 우정이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우정의 최고 형태는 정치적이거나 시민적인 차원에서의 우정이다.

 

우리가 친구를 좋아하는 것은 단지 서로를 좋아하고 서로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만은 아니라 사회에 대해 같은 가치와 이상을 공유하고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모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좋은 사회란 구성원들이 인간으로서의 성취에 이르게 해주는 사회다. 인간은 알고자 하는 욕구, 어떤 기술이나 미덕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욕구,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공동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려는 욕구 등 본성의 최고위 욕구들이 충족될 때 행복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한 인간의 본성을 1970년대에 에드워드 디시와 리처드 라이언이라는 두 심리학자가 실험했다. 그리고 인간은 자유주의 경제학에서 믿듯이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사실 디시와 라이언이 행한 일련의 실험에서 사람들은 프로젝트가 의미 있고 도전의식을 북돋우며 사람들과 함께하고 재미있는 것이라면, 돈을 덜 받거나 아예 받지 않아도 그 일을 더 열심히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인간은 블로그나 위키피디아처럼 이익이 나타나지 않는 일에 그렇게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는다. 그런 일을 하면서 우리는 시간을 죽이는 게 아니라 의미를 만들어 낸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예견한 것처럼 인간은 의미(물언가에) 숙달, 참여, 탁월성, 재미 등 고차원적 욕구를 충족시킬 방법을 찾는다. 좋은 사회는 시민들이 그런 욕구를 충족할 기회를 만들어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은 삶을 추구하는 데 최고로 좋은 구조는 민주주의라고 생각했다. 민주사회는 사람들이 모여서 클럼, 협회, 네트워크, 공동체 등을 만들게 해주고, 그것들을 통해 사람들은 철학을 행하고 공동선을 향해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모두가 생각하고 모두가 참여해서 찾아내는 해결책은 소수민이 참여하는 독재사회의 해결책보다 훨씬 나을 것이다.

 

 

자기계발을 넘어 집단계발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사회에서 철학의 역할에 대해 아주 낙관적인 견해를 내 놓았다. 그는 인간이 철학을 통해 자기계발을 넘어서 집단계발로 나아간다고 했다. 우리는 스스로를 도울 수 없으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동의 프로젝트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런 정치적 견해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요구한다. 모두가 철학자/시민이 되어야 하고, 그래서 공약을 위해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지금 당장 그럴 수 있는 건 아니다. 소수의 사람들, 말하자면 플라톤이 말한 엘리트층이 사회를 이끌어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교육을 훨씬 더 진지하게 생각하고 교육에 시간과 자원을 더 많이 투입할 것을 요구한다. 교육이 좋은 사회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도미니크 수도회 사제였던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0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기독교 신앙을 통합하고 로마 교황청에 설득해 그것을 공식철학으로 승인하게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기독교 국가들 전체의 공식 철학이었던 때가 있다.

물론, 실제로는 지적인 엘리트 계층만이 철학을 공부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를 수용한 아퀴나스의 사상은 유럽문화의 기초가 되었고, 공통된 가치관을 형성했으며, 과학과 문화, 이성과 신앙, 인간과 우주 사이에서 가교역할을 했다. 이런 기초는 초서, 단테, 라파엘로의 탁월한 비전으로 이어지는 길을 닦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가톨릭 교회의 공식 철학이 되어 종교적 신조 속으로 편입됨으로써 화석화되고 말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천체물리학은 16, 17세기 과학혁명 동안 갈릴레오, 베이컨, 케플러 등의 과학자들이 개발한 경험론에 한껏 뒤떨어지는 게 당연했다. 자연과학자들이 천체물리학에 이의를 제기하는데 성공하는 순간, 기독교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윤리학과 정치학이 도전받기 시작 했다. 그 뒤 계몽주의 시대까지 서로 대립되는 윤리철학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시대가 열렸다.

 

교회가 지닌 권위가 쇠퇴했다는 것은 18세기부터 지금까지 서양사회에 더 이상 좋은 삶이나 공익에 관해 공통된 철학이 없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대신, 계몽주의는 공리주의, 칸트철학, 버크주의, 존 로크의 사상, 데이비드 흄과 애덤 스미스의 도덕관념 이론, 마르크스와 레닌의 사회주의 이론 등 서로 대립되는 윤리이론들을 놀라울 정도로 많이 탄생시켰다.

 

현대철학은 가톨릭 교회의 도덕적 권위를 약화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보통사람들에게 기독교를 대신할 것을 주지는 못했다. 즉, 상징, 이야기, 의식, 축제, 공동체 등에 토대를 둔, 보통사람들을 위한 윤리체계를 제공하는 데는 실패했다. 갑남을녀들이 고생하고 관심을 갖는 문제와 칸트가 무슨 상관이 있을까? 칸트가 그들에게 어떤 희망이나 위로를 줄 수 있었을까?

 

기독교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필적할 만한 총체적 철학체계를 만들려고 시도한 계몽주의적철학이 마르크스주의였다.(마르크스는 저널리스트가 되려고 학계를 떠나기 전에 아리스토텔레스에  강의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며, 아리스토텔레스를 ‘위대한 수사관’이라고 불렀다.) 마르크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행복에 관해 지식인과 사람들을 연결해 주고, 사회과학과 인문학을 연결해 주는 철학적 틀을 만들었다.

 

그러나 20세기에 마르크스주의가 지배하던 사회에 나타난 잔혹한 현실은 마르크스주의를 지지하는 지식인들이 꿈꾸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실, 구소련과 마오쩌둥이 이끌던 중국공산당 정권이 너무나도 잔악한 폭정을 일삼는 바람에, 20세기 후반기에 서양의 정책 입안자들은 정부가 국민에게 행복과 만족을 찾는 방법을 가르치려 들면 안 된다는 사실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마오쩌둥주의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대신하여 오늘날의 자유민주주의 사회는 훨씬 제한된 국가 개념을 받아 들였다. 즉, 철학자 로버트 노직이 말한 것처럼, 국가는 야간 경비원으로서 국민의 신체적, 경제적 안전을 보호 하되, 그들이 어떻게 행복해질지는 스스로 결정하게 놔둬야 한다. 빌린은 국가는 국민의 ‘부정적 자유’, 다시말해 다른 사람들의 개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하고, 각자가 ‘긍정적 자유’, 즉 좋은 삶에 대한 개인적 견해를 추구하게 놔둬야 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철학의 목적은 좋은 삶의 특정 모델을 홍보하는 게 아니라 좋은 삶의 모든 모델을 자기본위의 픽션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자신에게 맞는 삶이 좋은 삶이다. 아로마 요법에 관심이 많다면 그게 자신에게 맞는 것이다. 사도마조히즘에 빠져 있다면 그게 자신에게 맞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일을 용인하는 한, 누구나 자유롭게 자신의 일을 추구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에게 맞는 일, 자신을 흥분시키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철학을 말하다‘에서 극히 일부 요약발췌, 줄스 에반스 지음, 서영조 옮김, 더 퀘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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