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트란스포머 4'라는 영화를 우연이 관람한 적이 있다. 새롭게 변신한 우주인 로봇과 도움을 준 지구인이 합동으로 지구를 공격하는 나쁜 로봇을 물리치는 영화이다. 새롭게 변신한 다양성을 가진 첨단로봇만이 최종적으로 살아남아 임무를 충실히 완수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해준다. 이렇게 가상의 세계에서 그래픽으로 그려진 영화를 인간과 견주어 보기에는 상당히 무리가 있지만 사람은 로봇과는 달리 살면서 자기가 알고 있는 상식선에서 자기중심적으로 판단하고 행동을 하는 특징이 있다.
어릴 때는 먹을 것이나 가지고 싶은 것을 앞에 두고 떼를 쓰다가 어른들께 꾸중을 들은 기억들이 많다. 먹고 싶거나 갖고 싶다는 본능에 이끌린 행동일 뿐이다. 커가면서 주위친구들, 어른들의 이야기나 직간접 경험을 통해 많은 지식을 축적 해가면서 더욱 변신하게 된다.
몇 년 전에 한 행동들이 부끄럽고 바보스럽게 느끼는 경우도 현재의 지적 수준으로 판단해보기 때문이다. 이렇듯 나이 들수록 더 나은 친구들이나 최신 정보의 버전을 가지고 있는 소프트웨어를 접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정체된 구닥다리 프로그램으로 네트워크를 할 수밖에 없다. 변신을 게을리 하면 지혜로운 또래의 술친구나 차 마실 친구들도 하나둘 떠나게 되고 항상 고만고만한 친구들만 남아 교류하게 된다.
나이 40이 되어도 군대이야기 밖에 없다거나 그 당시 경험이 인생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등 수 십년을 같은 버전의 프로그램으로 자신을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이다. 특히 주변에 늙어 막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소위 말하는 일류대학 출신자라고 자기를 뽐내며 평생을 대학간판하나로 사골곰탕을 우려먹듯이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사람도 있다. 인간은 자신의 우월성을 주장할 근거가 약할수록 자신의 학교, 지위나 재산 등으로 배경을 내보이기 마련이다.
이는 내 머릿속에 떠도는 진학, 취업, 죽음, 행복, 실패, 성공과 사랑 등 수 많은 상황들을 놓고 고민해야 할 시기에 자아인식이라는 혹독한 홍역을 제대로 치루지 않은 결과라고 본다. 이렇듯 청,중년시기에 나 자신을 알아가는 자아인식의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하고 이를 슬기롭게 잘 대처해나가는 방법도 스스로 터득하여야 한다. 그래야만 자신이 딴딴해져 무엇을 할 건가하는 목적론적 행동을 하게 되고 불필요한 소모적 행동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아인식이 확고히 정립되면 자신의 우울, 불안, 분노에 대한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지 않고 자신의 감정의 흐름을 조절하게 되며 관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추게 될것이다. 목적론적 행동에 있어서는 타인의 시선에 아량곳 하지 않고 요리사를 꿈꾸든 운동선수가 되 든 길거리에 노점상을 하든 자연속에 파무치든 그곳을 향해 몰입하게 되어 과정마다 행복한 자아실현의 맛을 보게 된다.
그리고 광대역 넓은 정보지식 분야로 나아가기 위한 몰입의 툴(도구)로 독서가 큰 길잡이가 될 수도 있을 것이고 쇼펜하우가 말했듯이 사색이 독서보다 훨씬 특효약이 될 수가 있겠다. 오늘날 혼을 빼는 정보 홍수 속에서 사색과 독서는 유린당하고 있다. 횡단보도를 건널 때나 가족 대화 시에도 나를 지켜주는 수호신처럼 스마트 폰을 가슴에 품고 들여다보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지식을 전달해주는 정보는 될지언정 나를 지켜줄 지혜는 되지 못한다. 더군다나 독서에게는 쉽게 눈이 가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일기를 쓴다거나 블로그를 만들어 나만의 공간을 만들어 가다보면 조금씩 흥미를 가지게 되고 자신이 변신해 간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독서방법으로는 딱딱한 철학책이나 방대한 문학책일수록 끈기로 무장하여 지루하고 가혹할 수밖에 없는 터널을 통과하여야 한다. 짬짬이 방대한 삶의 파노라마를 엮어낸 문학들을 읽다보면 등장인물들의 시끌벅적한 생명의 숨결 소리를 느끼게 하는 재미도 있지만 처음에는 많은 인내가 필요 할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이런 혹독한 자아인식의 과정 없이 오래된 정보와 관습으로 무장한 채 변신에 실패한 기성세대의 부모들은 자신의 갈등마저도 가족에게 전이시킨다. 흔히들 40대 중년쯤에는 쟈신의 성장성과 경제성을 고민하면서 개인의 갈등이 최고조로 달하는 거 같다. 이젠 40대가 불혹의 절제미학의 시대가 아니라, 자본주의 팽창과 수명연장으로 이마저도 욕망의 수명이 10년 내지 20년이 더 연장된 느낌이다. 이 시기는 사회적 성장이 더뎌 갈등에 몸부림친다거나 자녀공부와 재정적 비교열등에 쌓이게 되어가는 시기이기도 하다.
50대가 들어서도, 남편이 아내에게나 장모가 사위에게 지나친 간섭을 한다거나 결혼한 자식이 기대치에 못 미칠 경우 서운함에 몸부림치는 부모들의 일례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과거의 기억에 얽메어서 일일이 부정적으로 바라본다거나 미래의 지나친 기대에 부풀어 있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할 수가 있게 된다. 노년층에 접어들면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자녀들의 결혼과 분가로 인해 혼란들이 많이 생긴다. 결혼한 자녀는 엄밀히 말해서 한 세대가 끝난 엄연한 객체인데도 말이다.
좋은 것은 대리만족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서운함은 부모의 기대치에서 비롯됨으로 윗대로부터 물려받은 사랑을 자녀에게 되갚았다고 여겨보면 어떨까.
식물이 자라서 꽃을 피우고 씨앗을 퍼뜨리는 것이 생의 한 주기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자식을 낳아 기르고 결혼시켜 손자라는 두 번의 씨앗까지 볼 수 있는 과실수와 같은 혜택을 받은 존재이다.
인간은 말을 하고 이성을 가진 존재이기에 좀 뇌구조가 복잡한 동물이다. 그런데 잘만 다듬어가면 자기만족의 열매를 맛볼 수있다.
이는 깨달음이라는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철학자는 삶이란 고통과 위험으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이라고 했으며, 철학자 에릭호프는 “교육을 통해 ‘배운 인간’이 아닌 계속 ‘배워 나가는 인간’을 배출해야 한다고 하였다. 진정으로 인간적인 사회란 조부모도, 부모도, 아이도 모두 배우는 사회이다.“라고 하였다. 나이 든 조부모도 어린 아이도 평생을 새로운 정보지식과 교육을 통해 변해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말일게다.
본능적인 자아와 감정에 사로잡히는 자아에서 벗어나 신피질의 고차원적 추론을 하는 자아의 방으로 자신의 정신적 거처를 옮겨야 할 것이다. 그럴려면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기대들을 비워야 하는 훈련과정들이 필요하다. 전문가들은 노력을 하여도 95%는 관습을 바꾸기 어렵다고 하지만 부단히 노력을 한다면 나머지 5%의 좁은문을 통과할 수 있다고 말한다. 주관과 객관이 절반이 구성되면 이상적이라 하는데 어느 정도 적절히 섞어져 있는 소프트웨어로 구성되어야만 타인과의 소통이 원활 할 것이다.
살아가면서 앞서가진 정보는 이미 구닥다리이고 새로운 지식으로 무장 된 나로 변신해가야만 한다. 몇 년 전의 일들과 핸드폰은 이미 기억에서 사라졌고 새로운 스마트폰에 빠져 시간여행을 하고 있다. 아는 지인들이나 모르는 사람들과 사진과 글들을 수시로 공유하면서 소소한 일상의 변화에도 보람과 행복을 느끼는 순기능도 많다. 그러나 이렇게만 바라보고 깔깔대며 늙어가기엔 조금 아쉽다. 말하자면 수많은 정보(지식)마저 불필요한 것은 버리고 단순화하면서 고차원적 자아의 방으로 옮겨 가야 할 것이다.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죽기 전에 사색이든 독서를 통해서든 철이 들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불순물이 섞인 소금으로 방치되지 않고 여러번 강한 불에 구워져 이로운 죽염이 되듯이 변신을 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예순이면 이순이라고 하여 귀가 뚫려 누구와도 소통이 가능한 어른이 되어야 하는데 정신 연령은 정체되어 아집의 철갑으로 에워싸고 있어서는 안 된다. 살아가는 순간마다 새로운 변신으로 과정을 이해하고 지혜를 쌓지 않으면 종국엔 나이 들어서만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는 죽음을 앞 둔 상태에서 삶의 허무함을 바라보며 모든 것을 놓았을 때 순간 깨달게 되는 경우이다. 너무 늦지 않은가?
공동묘지가 많은 산책로를 걸어가 보았는가? 아무도 없는 깊은 산골에서 나 홀로 어두운 밤을 몇 번 지새워 보았는가? 떠나 보낸 친한 벗이나 친척들을 생각해 보면서 얼마 남지 않은 우리들의 시간여행도 짐작 해 보아야 할 것이다.
동일한 사물이나 사람을 깊이 응시하고 자신이 사라지는 상태로 진입하는 단계를 '관조(觀照)라고 한다.아리스토텔레스는 관조를 그리스어로 '테오리아(theoria)', 즉 '인간의 최선'이라고 했다. 홀로 지새우는 밤! 한적한 가운데서 자기를 관조하며 마음을 정리해가는 그 시간과 공간은 고독만이 지닌 마력이며 또 하나의 행복으로 바꾸어 놓는 과정이다. 인간은 친한 친구나 부부일지라도 개성이나 기분의 차이가 있어 불협화음이 생길 수밖에 없다. 다만 예외로 자기 자신에게만은 완전하게 협조 할 수있다. 따라서 건강 다음으로 최고의 보물인 참된 마음과 평온한 기분은 오직 고독 속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상태를 오래 유지시켜야 이 세상과 타협없이 자신감과 평온함을 만끽할 수 있다. 조오르다노 브루노는 "이 세상에서 천국과 같은 생활을 맛보려는 사람 대부분은 한결같이 고독 속에 살고 있다"고 말했으며, 베르나르단 드 상 피페르 역시 "영양을 섭취할 때는 절제를 함으로써 육체적 건강이 얻어지지만, 사람과 사귈 때는 제한함으로써 영혼의 안정이 얻어진다'고 고독을 칭송했다.
'마음이 정화되지 않으면, 얼마만한 투쟁과 위험을 소득없이 겪어야 할 것인가? 얼마만한 수고와 공포로 정열에 사로잡힌 인간이 찢겨야 할 것인가? 오만,음탕,분노는 얼마만한 파멸을 일으킬 것인가! 방종과 나태는 또한 얼마나!' 루크레티우스는 쇠사슬을 짊어지고 다니며 부자유로 가득찬 마음을 표현하였다.
오늘날 당신의 관점에서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며 티끌만한 일을 태산만큼 키워 트집잡으려고 밤잠을 설친다거나 스스로 만든 사고의 틀속에 자승자박되어 살아가고 있지 않은지, 허망과 방황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새로운 여행을 시작해보면 어떨까! 비록 성현들만이 이룰 수 있는 거창한 깨달음은 아닐지라도 나를 짓누르고 조정하는 아집의 철갑에서 벗어나 보자는 의미이다! 이제 과거의 뼈따귀를 핥거나 미래의 몽롱한 꿈을 꾸거나 주무르지 말고 오직 거울 앞에 선 현재의 나의 참모습만 바라 볼 수있는 연습을 하여야 할 것이다. 또다시 굴러 떨어질 지언정 시시포스가 거대한 바위를 수백번 정상을 향해 떠받쳐 올리듯이 포기하지 않는다면 손 끝에 잡히지 않을까 감히 생각해 본다! <'14.7.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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