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산담론

어떻게 나이를 먹어야~!

[중산] 2015. 11. 27. 18:51

 

 

“어떻게 나이를 먹어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은 가장 큰 지혜이며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인간은 자신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오로지 얼마나 살 것인가만 생각한다. 그러나 인생은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잘 살았느냐의 문제이다.”

 

늙음에 대하여 세네카가 한 말이다. 현직에 물러나 자녀들까지 출가시키고 나면 한번쯤 눈앞에 떠오르는 큰 화두가 이거라고 본다.

 

‘누가 잘 사는 법을 몰라 이렇게 사냐? 어쩔 수 없이 먹고 살다 보니 이렇게 사는 거지 그걸 꼭 따져 봐야 해’ 한편으로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더러 있을 게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인생의 본질을 깜빡 잊고 사는 것이 맞다. 그 이유가 생계로 인해 바빠서든 깊게 사유해보지 않아서든 말이다.

 

‘지금 존재하는 내가 머지않아 죽는다’라는 이 가공할 만한 수수께끼를 옆으로 제쳐 놓은 채 이 문제와 전혀 상관없는 ‘일반적인 일‘에 엄청난 시간을 낭비하며 살고 있다. 내 가까이 있는 의문을 철저히 덮어버리고 인생에서 고작 두 번째로 중요한 일을 하느라 허둥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인생 반 내려 놓기‘에 기술한 내용이다.

 

세네카 역시 시간의 소중함을 이야기 하였다. 의무적이거나 공적인 일에 쓰는 시간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쓰는 시간‘을 뜻하는 '여가'에 대하여, 대다수 사람들은 그의 말이 지극히 당연하다며 수긍하지만 행동은 이와 반대로 한다. 그리고 그대로 죽는다는 사실이다. “자네는 이렇게 하면 되네, 자네 자신을 위해 스스로 자유로워지게, 여태껏 자네가 빼앗기고 도둑맞은 시간을, 또 자네에게서 도망친 시간을 주워 모아서 지키게”

 

세네카의 말도 나이 들어서는 물질적 가치를 내려놓고 정신적 가치로 전환하여 얼마나 의미 있고 설레 임을 동반한 자아실현을 하느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최근 선진국의 노인들이 65세에서 75세까지 정신적 가치와 함께 인생의 행복감을 가장 크게 느꼈다는 통계를 보았다.

 

 

아이들 등록금과 가족생계를 책임져야 할 시기까지는 물질적 가치를 추구하는 시기라고 본다. 옛날수명으로 보면 약 40세인데, 그래서 물질과 이성의 무게 중심에서 벗어 난 시기를 불혹의 나이라고 불렀을 게다. 그러나 이제는 대다수 수명이 늘어나 60세 이후를 불혹이라고 불러야 할 판이다. 이 시기마저도 물질적 가치를 계속 추구하다보면 죽을 때까지 일 중독자처럼 노동과 돈 사이를 오가면서 살아야 한다. 그것도 그거지만 심리적으로 일손 놓은 이후를 상상도 못하고 두렵기 때문에 불안해서라도 일을 해야 한다. 같은 또래를 만나면 지금 일하는지 노는지를 먼저 묻는다. 쉬고 있다고 하면 '안됐다'는 듯, 퇴물취급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는 노년을 바라보는 우리사회가 아직도 존재중심(Be)보다 소유 중심(have)으로 상당히 쏠려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나이 들어서도 경로당까지 직함을 달고 다닌다. 한번 지점장이면 평생 지점장이다. 본인도 은근히 등판에 달고 다니는 걸 싫어하지 않는 모양새다. 사회 축소판인 가족관계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여보, 부모님! 든든히 곁에 있어줘서 아무 걱정없이 저희들이 살고 있어요! 당신의 존재가 없다는 것은 상상도 못해봤어요!"  이렇듯 존재중심으로 부모와 부부를 바라봐야 할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답한 노인처럼 물론 여기에도 철없는 자녀에 대한 기대보다 어른들의 마음가짐, 성격이 중요할 것이다.

 

나이 들어 가족의 생계가 아닌 자기 혼자만의 생계를 책임져야 할 정도의 시기라면 소유 중심을 탈출하는 방법은 ‘과감한 용기’라고 본다. 이는 무모한 용기가 아닌 자유로워 질 용기인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인간을 구속하고 제약하는 이 환경조건인 필연성 한계를 뛰어 넘는 것을 일찌기 쇠뢴 키르케고르는 '결단'이란 개념으로 표현하였다. 이런 결단은 무한한 가능성이 명백해질때까지 상상을 매개로 자신에게 반문과 반성을 계속하여야 한다. 이는 자신의 이상적 자기(자아)와 현실적 자기를 연계시키는 '역동적 활동체'가 자유로운 존재가 되어야만 가능하다고 한다.  이런 단계를 뛰어넘지 못한 것을 쇼펜하우어는 '자신 스스로에게 동기를 일으키는 탄력의 결여'라고 하였다.  

물론 이런 전제조건이면서 기본조건들을 갖춘다면 정신적 가치를 향유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다 갖추었다고 볼수 있을것이다.

 

그래서 용기 내어 확 뛰어 들었다고 치자! 두려움 반 기대 반일 거다.

평범하면서 한가로운 생활을 즐길 줄 아는 것은 매우 쉬운듯하지만 무지 어려운 일이다. 스님들이나 신부, 수녀님들이 하는 고차원적 내공이 필요한 기술이다. 건강 다음으로 최고 보배인 참된 마음의 안정과 평온한 기분은 오직 고독속에서만 발견할 수있다. 그리고 이 상태를 오래 지속시켜야 세상과 교섭없이 지낼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안의 내적 공허와 권태에 질려 자칫하다간 술판을 벌이거나 친구들을 불러 모으게 된다. 이 방식은 생기나 쾌락을 충족시키는 극단적인 방식이다. 이 유혹과 과정을 벗어나야 한다. "완전히 자기 자신에 의해 좌우되고, 자기 자신 속에서만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키케로가 말한 것처럼 타인의 무거운 짐을 싣고 다니는 낙타에서 해맑은 웃음을 머금는 순수한 어린아이로 한번 변해보자는 것이다. 그렇다고 세상과 담을 완전히 쌓으면서 살아가자는 말은 아니다.

 

우리보다 먼저 삶을 실천한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자.

귀거래사 주인공 도연명의 이야기다. 41세에 관직을 버리고 62세에 돌아가기 까지는 그는 무위자연을 즐기면서 편안한 생활을 했다.

 

 

뜰은 날마다 거닐어도 언제나 정취가 있고  문이야 달아 놓았지만 찾아오는 이 없어 항상 닫혀 있다.(...)세상과 사귀지 않고 속세와도 단절된 생활을 하겠다.(...)친척들과 정담을 나누며 즐거워하고 거문고를 타고 책을 읽으며 시름을 달래련다.(...)농부가 나에게 봄이되었다고 일러주니 앞으로는 서쪽 밭에 나가 밭을 갈련다(...) 이 몸이 세상에 남아있는 날이 그 얼마 이리, 어찌 마음을 대자연의 섭리에 맡기기 않으며, 이제 세삼 초조하고 황망스런 마음으로 무엇을 욕심낼 것인가. 돈도 지위도 바라지 않고, 죽어 신선이 사는 나라에 태어 날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도연명은 몰입의 도구인 음악(거문고), 산책, 독서와 적당한 일(농사)들을 골고루 갖추며 조화로운 삶을 실천하였다.  음악은 위대한 공자와 니체마저 평생을 광적으로 즐겼듯이, 흥과 재미를 더해주어 지루함이 발을 못붙인다. 산책은 사유하며 여유를 가질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적당한 일은 건강과 보람을 선사한다. 특히 독서는 속세의 즐거움들이 시시하게 느껴지고 인간사회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해준다. 니체와 임어당은 독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를 나 자신으로 부터 해방시키고, 나를 다른 사람의 혼속을 거닐게 한다".  "평소에 독서를 하지 않는 사람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자기 하나만의 세계에 감금되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이라도 손에 책을 들면 별천지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렇듯 음악과 독서는 몰입에 있어서 감초와 같은 도구인 것이다. 여기에다 실존주의 철학에서부터 스피노자, 장자크 루소와 니어링 부부에 이르기까지 간접 체험할 기회가 얼마든지 많다. 이런 실례들을 보면서 편협되지 않은 마음가짐을 다듬어 가는 방법도 좋을 듯싶다.

 

 

자료에 의하면, 노년에 관하여 수용된 관념들은 역사 속에서 상당히 변했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 중세 말까지는 일반적으로 노년은 단지 내세에서의 보상을 위해 견뎌내어야 할, 하나의 완전한 비극으로 인식하였고 18,19세기 들어서 이 이미지는 가난이나 질병처럼 감내해야 할 또 시련에 직면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가벼워진다. 20세기 말에서야 노년은 행운, 건강, 자유와 함께 그 자체로 즐길 수 있는 삶의 한 단계로 보게 되었다고 한다.

 

누구나 예외 없이 즐길 수 있는 삶이다. 더구나 100억년의 인류 역사상 65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전쟁 없이 축복받은 평화스런 시기에 우리들이 태어났다. 우리부모 세대는 일제36년, 6,25를 거치면서 평생을 지옥같이 보냈다. 세계사도 군주제에서 시민혁명을 거치면서 온통 난리판이었다. 이 시기에 실존주의 철학이 탄생하면서 인간의 깊은 고뇌와 현재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중요성을  되짚어보게 하였다. 이를 접하지 않더라도 우리에게 축복을 내린 여건을 한껏 활용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아무리 어렵다하더라도 정신과 물질을 앗아가고 가족과 일상생활이 완전히 붕괴된 전쟁보다 더 하겠는가!

 

시절이 좋다한들, 현실이 어렵다 한들, 이대로 아등바등 일만하다 죽으면 얼마나 억울할까. 나이들어 고통과 지루함이 없다면 행복의 절반을 가졌다고 말하지 않던가. 더 늙어 고통이 찾아오기 전에, 범사에 감사하면서, 지금의 순간을 즐겨야 할 것이다.  누구나 태어나 죽어야만 한다는 부조리에 여 있지만 “삶을 정리해야 할 마지막 순간에 삶을 시작 한다면 너무 늦지 않을 까”세네카의 말처럼 즐길 수 있는 것도 때가 있는 것이다.

 

 

“나의 의지가 나의 미래를 만든다. 나의 성공은 그 어떤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의 일이다. 나 자신이 바로 힘이므로 내 앞의 어떤 장애물도 없앨 수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미로에 빠질 것이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것은 나의 선택이며 책임이다. 오직 나만이 내 운명의 열쇠를 손에 쥘 수 있다.” 맥스웰의 ‘삶의 주인이 되어라’는 말로 끝을 맺고자 한다. 늦지 않다. 이제라도 노년에 자유로워 질 용기를 가지고 실행으로 한번 옮겨보면 어떨까 !!

<2015.11.29. 나의 인생좌표도 더듬어 볼 겸 무례를 무릅쓰고, 귀거래사와 중산 담론을 함께 적어보다.>

 

                                                             귀거래사 전문

도연명의 귀거래사 서문을 쉽게 풀어서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가난하여 농사지어도 곳간이 비어있어 친구권유와 숙부의 보살핌으로 벼슬길로 나아갔다. 집에서 100리길 떨어진 곳에서 생활하였지만, 성질이 천연 그대로라 비위 맞추는 일을 못하며 춥고 배고파도 내 뜻에 맞지 않는 일에는 이래 저래 머리를 앓게 된다. 일찌기 인사를 쫓는 일이 먹고 살고자 함의 방편이므로, 근심하며 깊이 평생의 지조에 부끄러워 한다. 가을 수확 때 가려던 차에 누이 상을 맞아 사직을 하고 가는 것이다.

 

 

-도연명의 귀거래사 전문-

歸去來兮 (귀거래혜) 자, 돌아가자.
田園將蕪胡不歸 (전원장무호불귀) 고향 전원이 황폐해지려 하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
旣自以心爲形役 (기자이심위형역) 지금까지는 고귀한 정신을 육신의 노예로 만들어 버렸다.
奚惆悵而獨悲 (해추창이독비) 어찌 슬퍼하여 서러워만 할 것인가.

悟已往之不諫 (오이왕지불간) 이미 지난 일은 탓해야 소용 없음을 깨달았다.
知來者之可追 (지래자지가추) 앞으로 바른 길을 쫓는 것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實迷塗其未遠 (실미도기미원) 내가 인생길을 잘못 들어 헤맨 것은 사실이나, 아직은 그리 멀지 않았다.
覺今是而昨非 (각금시이작비) 이제는 깨달아 바른 길을 찾았고, 지난날의 벼슬살이가 그릇된 것이었음을 알았다.

舟遙遙以輕 (주요요이경양) 배는 흔들흔들 가볍게 흔들리고
風飄飄而吹衣 (풍표표이취의) 바람은 한들한들 옷깃을 스쳐가네,
問征夫以前路 (문정부이전로) 길손에게 고향이 예서 얼마나 머냐 물어 보며,
恨晨光之熹微 (한신광지희미) 새벽빛이 희미한 것을 한스러워한다.

乃瞻衡宇 (내첨형우) 마침내 저 멀리 우리 집 대문과 처마가 보이자
載欣載奔 (재흔재분) 기쁜 마음에 급히 뛰어갔다.
僮僕歡迎 (동복환영) 머슴아이 길에 나와 나를 반기고
稚子候門 (치자후문) 어린 것들이 대문에서 손 흔들어 나를 맞는다.

三徑就荒 (삼경취황) 뜰 안의 세 갈래 작은 길에는 잡초가 무성하지만,
松菊猶存 (송국유존) 소나무와 국화는 아직도 꿋꿋하다.
携幼入室 (휴유입실) 어린 놈 손 잡고 방에 들어오니,
有酒盈樽 (유주영준) 언제 빚었는지 항아리엔 향기로운 술이 가득,
引壺觴以自酌 (인호상이자작) 술단지 끌어당겨 나 스스로 잔에 따라 마시며,
眄庭柯以怡顔 (면정가이이안) 뜰의 나뭇가지 바라보며 웃음 짓는다.

倚南窓以寄傲 (의남창이기오) 남쪽 창가에 기대어 마냥 의기 양양해하니,
園日涉以成趣 (원일섭이성취) 뜰은 날마다 거닐어도 언제나 정취가 있고 
門雖設而常關 (문수설이상관) 문이야 달아 놓았지만 찾아오는 이 없어 항상 닫혀 있다.
策扶老以流憩 (책부노이류게) 지팡이에 늙은 몸 의지하며 발길 멎는 대로 쉬다가,
時矯首而遐觀 (시교수이하관) 때때로 머리 들어 먼 하늘을 바라본다.

雲無心以出岫 (운무심이출수)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를 돌아 나오고,
鳥倦飛而知還 (조권비이지환) 날기에 지친 새들은 둥지로 돌아올 줄 안다.
影翳翳以將入 (영예예이장입) 저녁빛이 어두워지며 서산에 해가 지려 하는데,
撫孤松而盤桓 (무고송이반환) 나는 외로운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서성이고 있다.
 

歸去來兮 (귀거래혜) 돌아왔노라.
請息交以絶遊 (청식교이절유) 세상과 사귀지 않고 속세와 단절된 생활을 하겠다.
世與我而相違 (세여아이상위) 세상과 나는 서로 인연을 끊었으니,
復駕言兮焉求 (복가언혜언구) 다시 벼슬길에 올라 무엇을 구할 것이 있겠는가.

悅親戚之情話 (열친척지정화) 친척들과 정담을 나누며 즐거워하고,
樂琴書以消憂 (낙금서이소우) 거문고를 타고 책을 읽으며 시름을 달래련다.
農人告余以春及 (농인고여이춘급)농부가 나에게 봄이되었다고 일러주니

將有事於西疇 (장유사어서주) 앞으로는 서쪽 밭에 나가 밭을 갈련다.

或命巾車 (혹명건차) 혹은 장식한 수레를 부르고,
或棹孤舟 (혹도고주) 혹은 한 척의 배를 저어
旣窈窕以尋壑 (기요조이심학) 깊은 골짜기의 시냇물을 찾아가고
亦崎嶇而經丘 (역기구이경구) 험한 산을 넘어 언덕을 지나가리라.

木欣欣以向榮 (목흔흔이향영) 나무들은 즐거운 듯 생기있게 자라고,
泉涓涓而始流 (천연연이시류) 샘물은 졸졸 솟아 흐른다.
善萬物之得時 (선만물지득시) 만물이 때를 얻어 즐거워하는 것을 부러워하며,
感吾生之行休 (감오생지행휴) 나의 생이 머지 않았음을 느낀다.

已矣乎 (이의호) 아, 인제 모든 것이 끝이로다!
寓形宇內復幾時 (우형우내복기시) 이 몸이 세상에 남아 있을 날이 그 얼마이리.
曷不委心任去留 (갈불위심임거류) 어찌 마음을 대자연의 섭리에 맡기지 않으며.
胡爲乎遑遑欲何之 (호위호황황욕하지) 이제 새삼 초조하고 황망스런 마음으로 무엇을 욕심낼 것인가

富貴非吾願 (부귀비오원) 돈도 지위도 바라지 않고,
帝鄕不可期 (제향불가기) 죽어 신선이 사는 나라에 태어날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懷良辰以孤往 (회양진이고왕) 좋은 때라 생각되면 혼자 거닐고,
或植杖而耘 (혹식장이운자) 때로는 지팡이 세워 놓고 김을 매기도 한다.

登東皐以舒嘯 (등동고이서소) 동쪽 언덕에 올라 조용히 읊조리고,
臨淸流而賦詩 (임청류이부시)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는다.
聊乘化以歸盡 (요승화이귀진) 잠시 조화의 수레를 탔다가 이 생명 다하는 대로 돌아가니,
樂夫天命復奚疑 (낙부천명복해의) 주어진 천명을 즐길 뿐 무엇을 의심하고 망설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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