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이해에 대한 괴테와 니체의 비교
[한글요약]
본 논문은 니체가 중심이 되어 진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하여 스스로 생각한 바를 과거 독일교양의 최대 으뜸가는 괴테와 비교해 진리이해를 밝혀 보았다.
우선 진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명확한 개념 규정도 쉽지 않고 어떻게 규정을 해도 결코 만족할 수 있는 성질의 일이 아니다. 진리의 진술이란 다만 나타난 것과 실제로 존재하는 것 사이를 언어로 대응관계만을 지칭할 수밖에 없는 하나의 형식논리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진리는 우리에게 대단히 유요함으로 어떻게 든 진리에 접근해 봐야 한다. 그 가능성이 우리 몸을 중심으로 감각기관이 그 기초 판단자료를 제공한다. 이 재료를 근거로 우리는 진리치를 논하여 진리에 접근하는 형식으로 삶을 유지시킨다. 니체는 절대적 진리는 없다고 보고 오로지 자신의 인식을 근거로 그 유용성과 관련하여 상대적인 관점에서 진리를 논하고 있다.
주제분야 : 독일 문학과 철학, 실존적 삶
주 제 어 : 진리, 진리의 효용성, 진실, 역사, 진리인식
1. 서론
인류의 역사를 점철해온 위대한 과학자나 사상가들 모두 한결같이 실제로 있는 것이 무엇이며 우리에게 드러난 것이 무엇인지를 밝히려고 무모한 도전을 서슴치 않았다. 진리에 대한 의식은 인간이란 동물이 언어를 개발하면서 얻은 최대의 부담 중에 하나가 되어 버렸다. 인간이 언어와 동시에 문명을 만들어야 했고 이 문명은 인간이 만들어나가는 인위적 질서이고 이 작위적 질서는 끊임없이 진리에 대한 탐구를 유발시켰다. 인간은 있는 그대로를 만족하지 못하고(sein), 이렇게 되어야 한다(sollen)는 당위적 측면을 가장 강하게 드러내는 동물이 된 것이다. 다른 말로 ‘그러한 것’과 ‘그러해야 할 것’과의 사이에 존속하는 거대한 괴리를 말한다. 문명의 구조가 실제 있는 것의 구조와 어떠한 상응관계를 가지느냐에 따라 그 문명의 구조가 결정되어왔다. 개는 마당에 있는 차를 보고 그런가 보다 하고 인정하지 왜 여기에다 차를 세워 두었지 하고 내면에서 어떤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다. 실제 있는 것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상응관계 이것이 바로 우리의 고민이자 인류의 최대의 관심이 되었다.
진리란 무엇인가. 진리란 ‘나타난 것’과 ‘실제로 있는 것‘과의 합치관계를 일컫는 말이다. (Truth is the conformation of Appearance to Reality) 나타난 것(appearance)은 다른 말로 현상(phenomena)이라 부른다. 현상이란 나타난 모습 드러난 모습이다. 반면에 실제로 있는 것(reality)은 實在, 본체(noumena) 또는 실체(實體 substance)라고 부른다. 진리란 바로 현상과 실체 사이의 합치관계, 또는 상응관계 내지 일치관계를 일컫는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일상 언어에서 진리라는 말이 오로지 그 대응관계만을 지칭하는 것이며 그 관계에서만 진리의 값이 발생한다. 왜냐하면 그 관계이상의 실체론 현상론은 우리에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진리는 영원히 형식 그 자체이고 그 형식을 통해 근사치에 접근하는 인간의 노력이 있을 뿐이다.
과학은 앎이다. 과학은 앎의 근원으로부터 근원적 해방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앎의 철저함을 추구한다. 이 때 철저함(Throughness of Knowledge)이란 합치성( conformation) 또는 정합성을 전제로 한다. 합치란 말은 사물의 2가지 가치를 갖는 두 가지 실체를 전제로 하여 갑과 을 사이에 두 실체가 그 합치의 문제가 된다. 모든 사물은 정도(degree)와 양태(mode)를 지니고 있어 그 대비가 역동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정태(靜態)일 수 없다. 즉 진리의 실체는 생성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서구 사회가 그 오랜 전통에도 여전히 존재(있음)를 진리의 문제로 삼는 것은 잘못되었다. 니체가 「에체호모 Ecce homo」에서 자기의 “우상의 여명”에 관한 해석을 시도하는 가운데 내가 처음으로 진리를 재는 척도를 가진 사람이다. ........ 모든 어두운 충동은 끝났다. 선인이란 정말 누구 하나 올바른 길을 알지 못했다고 쓰고 나보다 앞서 누구하나 올바른 길을 알지 못했다고 괴테의 파우스트를 비꼬면서 진리를 종말에 임한 낡은 진리라는 뜻으로 역설한다.(에체호모)1)
그런데도 우리는 진리가 끊임없이 정태적이기를 바란다. 앎이 곧 진리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진리에 대한 내용적 해답보다는 진리라는 형식을 먼저 정의하고 그 문제가 어떻게 괴테나 니체에게 적응되고 있는가를 살피려는 것이다.
서구의 과학이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는 한 진리라는 말이 우리 일상 언어의 중요한 개념이 되었다. 이제 진리라는 말만큼 막연한 종교도 없다. 따지고 보면 진리가 뭔지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진리가 우리 학문의 아카데미즘을 파괴하는 언어가 되었다. 때로는 진리가 우리들의 안온한 도피처가 되기도 한다. 토마스 쿤(Kuhn)의 파라다임 이론을 일별해도 확연해지는 일이다.
진리라 과연 무엇인가. 이제 진리의 바른 의미를 살펴보고 괴테가 본 진리 그리고 니체가 본 진리를 비교해 보자.
2. 본론
1) 진리의 이중성
(1)진리의 두 가지 측면
진리와 진실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진실은 과거에 한번 있었던 것의 실제적 구현이나 보다 정확한 정황증거를 전제로 사실적 서술을 의미한다. 따라서 진실은 역사에 사건에 주로 쓰이는 말이고 반면에 진리는 과학적 언어로 사실과의 관계규명을 뜻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주로 진리를 문제 삼기로 한다.
진리란 무엇인가. 진리가 주는 삶에의 의미는 때로는 크고 때로는 별 것 아닌 것으로 나타난다. 진리의 문제는 니체에게 엄청난 모순의 문제로 다가왔다. 진리에 대한 그의 입장은 두 개의 모순되는 행동양식으로 다가왔다. 달리 말해서 진리가 삶에 기여하는가? 또는 삶이 진리에 기여하는가 하는 두 개의 대립되는 명제로 정리해 볼 수 있겠다.
“옳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허용된다(Nichts ist wahr, alles ist erlaubt). 나는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짜라투스트라������, ‘그림자’)2)
우선 진리가 삶에 기여한다는 명제는 개인의 존재와 관계없이 참이요, 순수 이론적이면서 우리가 그런 진리를 삶에 받아들이도록 요구받고 살고 있다. 예를 들어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것은 개인이 원하던 그렇지 않던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는 돌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진리자체가 중요한 원리가 된다. 어떻게 진리의 대상이 되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진리의 의지에 빠진 사람에게 그 진리가 그를 지식의 황야로 몰아넣어도 그 진리의 참이 증명되는 한 아무 문제가 안 된다. 그 인식자체가 우리를 고통으로 몰아는 것이다. 인식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상황은 절망적이다. “인간이란 인식하는 동물이다. 영원히 비 진리로 저주받았다는 진리, 이 진리가 인간을 절망과 파멸로 몰아갈 것이다” (Friedrich Nietzsche: Saemtliche Werke, Kritische Studienausgabe in 15 Bde. Muenchen 1980 이 판본에 의거하여 권수와 쪽수 명기함)3)
그러나 니체에게 중요한 것은 객관적 진리가 아니라 주관적 진리, 나 개인의 삶이 환경과 의 교섭 속에서 어떻게 생명을 지켜나갈 것인가를 걱정하는 진리가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관심이 많다. 하늘이 지구를 중심으로 돌든 태양을 중심으로 돌든 그것은 별 상관이 없다. 당장 두통이 거치고 신선한 피가 몸에 흐르는 일이 나에게는 소중한 일이다. 컴퓨터 속에 내장된 그 많은 정보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 그 중에 어떤 정보가 나에게 살아 숨쉴 때 그것이 나의 중요한 호흡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니체는 정열에 넘친 인간의 의지를 존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인식이란 고통 죽음과 결탁되어 있고 그 죽음은 삶과 대립되어 있다. 삶은 그래서 투쟁이다. 니체는 서구 형이상학의 역사를 통해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온 궁극적 진리들을 비판, 부정하고 대립과 투쟁의 철학을 통해 허무의 새로운 가치를 긍정하고 새로운 시작을 추구했다. 플라톤 이래 서구 형이상학의 근간을 이루는 이념체계를 이루는 진리, 선, 덕의 이념체계를 깨부수려고 한다. 이들의 존재성, 진리성, 그 절대적 타당성은 자명한 것이었다.
“나는 일찍이 없었던 즐거움의 사자(froher Botschafter)이다. 나는 아무도 생각할 수 없었던 높은 위대한 임무를 발견하였다. ....... 나는 필연적으로 운명의 인간이다. 진리가 수 천 년 허위를 상대로 싸움을 시작할 때 세계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여러 가지 격동, 경련, 산과 골짜구니의 이동이 계속 일어날 것이다.(에체 호모, 나는 왜 운명인가,)4)
이와 같은 주장은 서구 사회의 가치의 전환이 없고 인식의 전환이 없이는 낡은 사회의 지배적 권력이 계속 인간을 괴롭힐 것이라는 전제에서 허위와 거짓을 몰아내려는 것이다. 이러한 최상 가치들의 탈 가시화는 기존의 진리관의 근본적 변화 없이 성립될 수 없는 기획이었다. 진리의 사도인 철학자들의 조명아래 도덕의 정초를 기도했고 이를 완수했다. 그런데 그의 논고 〈비도덕적 의미에서 진리의 거짓에 관하여 1873 KSA,1 875-890〉에서 도덕적
진리와 비 진리란 인간의 세계해석에서 결정된다. 5)
지성이란 인간의 생존을 위한 보조수단으로서 오직 인간적일 뿐 그 목적이외의 어떤 다른 가치도 사명도 들어있지 않다. 개인의 보존을 위해 확산되는 사회적 필요에 따른 계약에서 지식이 언어로 고정된다. 진리의 탐구는 이런 전제 하에서 진리가 사물의 본질에 접근할 가능성은 애초부터 배제된다. 인간의 감각으로 만들어진 개념이나 형상은 자연의 이법과는 다른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가 자연에 대해 갖는 표상들은 그 본질상 직관적 비유의 소산이다. 이 직관적 비유들이 비유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이들이 실재하는 대상으로 인식하는 데서 오류는 출발한다. 진리의 탐구가 이렇듯 오류를 전제로 출발하면 그 결과인 진리들이 오류로 귀결된다. 보편타당한 것으로 간주되어온 기존의 불변의 진리들이 오류가 된다. 진리탐구는 철두철미 인간적 관심에서 출발하며 그 결과인 진리는 오로지 상대적 관점에서 그 타당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상대적 진리란 세계 안에서 세계의 변형을 기도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세계란 인간의 행위가 무한히 굴절되는 반향으로 나타난다.
진리란 인간이란 동물의 원형이 여러 가지 다양한 모사로 나타날 것이다.6)
니체의 일생을 통해 전개되는 일관된 진리의 상대성 내지 오류는 그의 유고에서 이렇게 압축되어 나타난다.
“진리란 인간이란 생물이 진리 없이는 살 수 없는 오류의 방식이다. 이 진리가 생을 위한 가치를 최종적으로 결정한다."7)
인간의 삶은 아름다운 것이며 동시에 추한 것이다. 인간은 추하면서도 아름다운 것이다. 이러한 기의 모순은 존재의 영속성이다. 존재의 생명력이다. 생명은 그러한 모순을 통해 자기의 존재가치를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랑그로 표현되는 언어적 진리는 감각적 상징체계라는 의미 소통의 지극히 협소한 방편적 규정일 뿐이다.
플라톤 이래 보편타당하며 영구불변한 것으로 간주된 초월적 진리는 근본적으로 재조명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현세적인 것이며 역사적인 것이란 결국 가치평가에 의한 규정이므로 관점의 상대성으로 이들을 바라봐야 한다. 윤리적일 수 없는 역사를 윤리적(인위적) 가치체계로 바라본 것이 문제였다.
인간은 어떤 조건 아래 선과 악의 가치판단을 생각했던 것일까. 그리고 그 가치 판단들 자체는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가. 이제 진리의 문제가 가치의 문제로 환원된다.
다시 말해 가치체계로서 진리자체의 가치를 문제 삼는다. 물론 개별적 가치의 현상적 객관성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고 가치의 가상성을 폭로하고 인간을 독단적 형이상학에서 깨워 새로운 가치의 전기를 마련하려는 것이다.
니체는 괴테의 ‘파우스트’에 대고 이 작품에 괴테의 인식개념이 구현되어 있느냐고 묻는다. 괴테에게 인식이란 인간이 허약해지는 것에 대항하여 자신을 지켜나가는 것이고, 사물의 다양성을 알고 그 다양성을 즐기는 정도가 아닌가 하고 니체는 답하고 있다. 파우스트는 우리의 요구(인식욕구)를 전혀 이루어주지 못했으며 오히려 파우스트의 운명은 조용하고 정적인 인간상 즉 정태적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는 인식하려는 인간의 평면적 인물일 뿐이다. 니체는 진리를 얻기 위한 노력에 지적 절제를 요구하고 있다. 인간정신 아래에 삶이 종속되는 모양은 니체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차라리 삶의 모습에 진리가 언어적 진리가 종속되길 바란다. 니체는 「반시대적 고찰」을 다 쓰고는 괴테와 연결고리를 끊고 자신의 길로 들어선다. 그는 파우스트를 거부하고 자신의 신화적 우상인 디오니소스를 주장고 나선다. 니체에게 디오니소스란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충동, 망각의 심연으로서 실재를 넘어서는 보다 어둡고 보다 가득하고 보다 부유한 상태를 일컫는다. 생식, 번성, 영원에의 의지에서 삶의 불확실한 특성을 말한다. 이것은 위대한 범신론적 고통에의 동참을 말한다. 디오니소스는 이렇게 차별 이전의 총체적 통일 내지 혼돈을 말한다. 반면 이에 반해 아폴론적인 것은 전형적 개체, 일회적인 것을 만드는 모든 것들의 충동, 법칙아래서의 자유를 말한다. 7)
니체는 어떤 진리도 이면이 있다고 말하면서 진리에 대한 이중적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진리는 모순을 내포한다. 진리는 변증법적 사고의 과정에 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설정된 가치의 상대적 규정성은 절대적 타당성의 근거를 제공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절대적 가치로 간주된다면 그 가치는 반드시 그 진리치를 상실하고 가치전도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우상의 황혼 6권 160쪽 Ecce homo������에서 그의 처녀작 ������비극의 탄생������이 모든 가치에 대한 그의 첫 번째 가치전도임을 시사한다.8)
니체는 에체 호모에서 비극의 탄생이 성취한 혁신을 두 가지로 압축한다. 희랍인에 내재하는 디오니소스적 현상의 발견이며 소크라테스가 인간생명을 말살시키는 전형적 데카당트라는 사실의 발견이라 했다. 여기서 그는 이 세계는 비합리적이고 어리석고 환희적인 것과 합리적이고 이지적인 그러면서 조화로운 힘의 갈등과 투쟁이라고 본다. 비극은 이 두 힘의 융합에 있다. 비극의 주인공은 엄청난 고통과 신분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그 과정을 통해 죽음을 긍정한다. 이 죽음을 통해 뒤따르는 디오니소스적 힘과의 융합을 체험한다. 비극은 삶의 제식적 긍정이라는 것이다. 희랍의 비극은 희랍인의 낙관성, 즉 심리적 균형을 위한 다시 말해 그들의 생명을 긍정한 것이다. 니체가 처음으로 희랍인들이 결코 비관적이 아니었다고 지적한 것이다.
니체는 진리를 모순개념으로 바라보고 철학이 쉽지 않음을 지적한다. 외형상 전혀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도 시간이 지나면 문제가 노출된다. 그러고 보면 니체의 어떤 말도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이런 이중적 의미 또는 모순 때문에 유익하기도 하고 두렵다고도 말한다. 그에게 어떤 것도 절대적인 것이 아닌 상대적인 의미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경험체계는 시간성이 개재되면 반드시 상징성이 개재되고 이 상징은 반드시 에러(착오)를 수반한다. 상징이란 어디까지나 해석의 체계이기 때문이며, 나의 몸이 가진 느낌의 체계가 반드시 우주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리라는 보장이 없다. 그러나 이 착오야 말로 고등 생물이 고등생물임을 자부할 수 있는 특징이다. 진화란 반드시 이 착오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9)
그러면서 유익하고 결실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문제로 지적된 진리가 여러 가지 생각을 불러일으키고 최종적으로 사물과 고착시키지도 않으며 나아가 사고 장애요소를 완화시키며 생각을 유연하게 만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니체가 진리를 서술하는 두 얼굴을 규정함으로써 진리의 야누스적 사실을 보여준다.
다음으로 인간이 진리에 봉사할 수 있는가하는 다음의 문제를 생각해보자. 진실하다. 참되다는 무슨 의미인가. 참되다는 것이 무엇에 근거하여 거짓과 참을 구별할 것인가. 이런 참되다는 것이 왜 좋은 것이며 삶의 유지, 삶의 개선. 삶의 약화, 파괴 등에 어떤 영향을 준단 말인가. 참과 거짓을 결정하는 근거는 무엇이며 오류가 진리로 바뀔 수 있고 오류가 삶의 조건을 규정할 때 오류는 진리로 작동할 수 없는가.
판단의 오류가 판단에 대한 반증이 될 수 없다. 진리가 삶을 촉진시키고 삶을 유지할 수 있느냐에 따라 거짓을 삶의 조건으로 증언할 수 없다. 때로는 진리에 대한 신앙이 거짓을 믿게 만들기도 한다. 예수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태어나게 되었다는 명제는 여전히 이런 경우에 해당된다.
니체는 그리스인들의 삶의 진리를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즉 그들이 기능적 측면에서 진리를 바르게 조절하는 데서 그들의 지혜를 발휘한. 우주가 신비로운 기적을 숨겨두고 있는 동안에 그들은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법을 익혔다. 그들이 깊이에 있어 천박하지만 그러나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니체는 진리자체를 파악한다거나 진리를 안다는 사실을 중시하지 않았다. 진리자체는 고유의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삶의 실제적 적용에 따라 진리를 판단했다. 환상이 삶에 대한 공격으로 나타날 수도 있으므로 망상 속에 창조적 진리를 그대로 두는 일이 옳을 수도 있다.
그는 이렇게 계몽주의에 반기를 들고 합리주의에도 맞지 않는 진리개념을 지혜라 일컬었다. 짜라투스트라는 진리보다 지혜를 높이 여겼다. 그는 지혜가 인간 삶을 돌아보게 만들기 때문에 지혜에 익숙해지는 것이 진리자체의 정당성보다 우위에 있다고 믿었다. 이런 예는 ‘비극의 탄생’에 들어있다. 중년의 니체는 볼테르에게 열광하여 청년시절의 진리이해를 부정하고 절대적 진리체계에 기울어지더니 장년시절에는 비합리성에 경도된 디오니소스의 제자 니체는 지혜라는 의미에서 진리를 인정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니체는 진리개념을 명백하게 내세우지도 않고 병립시키지도 않는다. ‘반시대적 고찰3부’에서 그는 진리를 상대적 가치를 논했다면 그 2 부(반시대적 고찰)에서는 진리의 절대성을 보여주고 있다.
(2) 역사인식의 역동성
역사를 이해하는 니체의 인식에서도 그의 진리개념이 보인다. “인생을 위한 역사의 효용과 단점”이란 글에서 “역사가 인생에 기여하는 범위 내에서 우리도 역사에 기여 한다”고 밝히고 있다. 역사에 대한 지식이 역사를 바꾸어 가는 것이 아니라 지식이 역사가를 얼마만큼 부추기느냐에 따라 역사가 바뀐다. 역사는 진리개념이 아니라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역사의 해석방법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니체는 괴테의 의미 있는 글을 인용하고 있다. 즉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나를 가르치려고 하는 것은 다 싫고 그것이 내 활동력을 더욱 사그라들게 만든다.10)
이 말은 정신력을 북돋우어 주지 않고 교훈을 주는 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괴테가 일과 활동력을 별개로 본 것을 언급하고 여기에 동조하고 있다. 삶에 기여하지 않는 역사공부는 단지 교훈을 주는 역사학에 불과하다고 파우스트에서 밝히고 있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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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가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은 모든 현상이 노정하는 필연적인 대립의 이중성이다. 그의 모든 사유를 각인하는 근본경험은 온갖 현상의 이면에 숨겨진 대립 지향적 조화에 기초하고 있다. 그는 고대 희랍의 비극에 들어 있는 디오니소스적 세계관에서 그 단초를 얻고 있다.
이제 니체가 역사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헤시오도스가 쓴 ������신들의 기원 Hesiodos: Theogonie 116행 이하������에 카오스와 가이아(Gaia)라는 대립쌍의 등장이 있다. 이 양극의 투쟁은 어둠과 빛, 무형과 유형의 대립이다. 가이아 대지신은 大地母로서 신 자연, 인간 등 모든 형체를 가진 것들의 太母로서 모든 소생을 자신의 소생을 가슴에 품는다. 가이아는 모든 사물의 지탱하는 확고한 지반제공을 하고 있다. 형상의 질료에 해당한다. 카오스와의 투쟁에서 가이아가 일구어낸 이 저변 영토는몇 세대에 걸친 신들의 단계적 투쟁을 거치면서 올림프스 산상의 주제자 제우스의 영토로 변모한다. 헤시오도스가 전하는 희랍신화의 요체는 카오스와 코스모스, 혼돈과 질서의 대극 투쟁이다. 이것은 신화적 세계관이 본질적 대극상으로 나타난 하나의 보기이다. 이 형이상학적 전제의 이해는 원초적 존재이해, 나아가 본질적 생성에 근거한 존재이해이다.
니체의 디오니소스는 그 심층에 있어 이와 같은 원초적인 우주의 에로스의 현현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영원회귀, 죽음과 변전, 삶을 향한 긍정, 미래는 과거에서 약속되고 이루어 지는 것, 생식을 통해 성의 신비를 통해 총체적으로 지속되는 생명으로서의 진정한 삶”이다.12)
이와 같은 비의적 디오니소스에 비해 예술원리로서 거론되는 디오니소스는 우주적 에로스가 예술적 창조 혼으로 전이되어 나타나는 신격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과거를 모르는 동물이나 역사가 없는 어린아이들은 어떤가. 그들이 역사가 없기에 미래를 예측하지 못한다. 과거가 없고 미래가 없으니 오직 현재만 있을 뿐이다. 그들이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 여기서 니체는 실증적 지식만을 요구하는 모든 과학에 異意를 제기한다. 지식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 것은 공허한 이론일 뿐이다. 동양에서는 예로부터 지행합일의 고사를 교훈으로 삼아온 과거사가 있다. 위대한 역사를 만들어 내려는 사람이 과거만을 필요로 한다면 그는 과거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없다. 그러나 습관적인 것, 옛것을 존중하기를 바라는 것은 과거를 돌보는 사람이다. 지금 현재의 어려움에 힘들어하는 사람은 비판적 역사 또는 배움이 있는 선명한 역사를 필요로 한다.
역사가에 의해 희화된 역사는 지식이 없는 비평가가 만든 과거의 그림에 불과하다. 그 그림은 만화경이오, 골동품이며, 그 역사가는 많은 것을 알고 있으나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자에 불과하다. 모든 인간들은 과거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요한다. 이런 점에서 괴테는 그 개인의 위대함에도 불구하고 대수롭지 못한 역사가의 본보기가 되었다. 그렇다고 그가 역사를 거부한 것도 아니다. 한 시대는 다음 시대와 다르게 희귀한 덕성이 나타나고 때로는 더 높은 정의가 있다는 망상에 젖어 역사적 바리새주의가 생겨날 수 있다. 여기에 녹아들면 독창적 의식보다 모방적 아류가 생겨나고 냉소적 분위기가 생겨날 수 있다. 괴테는 자신의 시대적 가치를 지나치게 자기 개인에게만 적용시키고 있어 시대의 변화에는 무심했던 것이다.
니체는 인간의 본능 속에 삶을 향한 의지가 들어있다고 믿었다. 그는 무엇보다 개인적인 삶의 강한 의지를 믿은 것이다. 역사만이 인간에게서 그 천성적 본능을 끌어낼 수 있고 이념으로 인간을 순수 추상적 영역으로 끌고 갈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인간은 융이 말하는 페르조나(persona. 태생적 자아아는 다르게 사회화 되면서 점점 변모하여 그 역할 담당하는 것)와 역사를 일치시킬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인간은 개인적으로 두렵고 불안하여 더 이상 자신을 믿을 수 없어 때때로 그 내면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 자신을 관조한다. 그 결과 그는 학자, 시인, 정치가, 사업가 등의 가면을 쓰고 살아가고 있다. 이 가면을 쓰고 세상을 보면 우리 손에 누더기와 현란한 헝겊만을 보게 된다. 화장세계에서 眞我를 모르고 假我的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3) 진리란 무엇인가?
진리란 언어적 현상이며 사람이 사물을 이해하는 수단으로 삼는 그 무엇이다. 진리란 合致의 세계이며 진리라 그야말로 眞의 理이다. 이 때 진이란 진짜요, 가짜가 아니라 것이며 理란 무위의 세계이며 무작위이며 無色無臭한 그 무엇이다. 理法 자체는 진리의 대상이 아닌 자연 그대로의 세계이며 진리의 대상이 될 수 없는 道의 세계이고 하느님의 세계이다. 우주의 질서 그 자체이므로 우리가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세계이다. 다만 이 세계를 우리의 인식의 대상으로 우리의 지식 속으로 끌어내려는 노력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일 뿐이다. 理는 그 자체로서 인간인식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이다. 理는 영원히 理일 뿐이므로 우리가 진짜(true)는 진실한 것이며 가짜(false)와 짝을 이룬 것이다. 따라서 진짜는 眞으로 홀로 존재할 수 없는 상대적 개념이다. 불교의 인식론에 진(眞)과 가(假)는 진실과 방편의 양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眞假分判이란 진실한 가르침과 方便的 가르침을 분별하는 것이며 이 때의 진실과 방편 또한 흑백처럼 완벽하게 二價적인 것이 아니다. 이러한 불교적 사유의 특질은 진리의 다이내미즘(dynamism of truth)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진리란 분명 나타난 것과 실제로 있는 것, 분명 현상과 실체의 합치관계이다. 그러나 이 말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나타난 것과 실제로 있는 것 자체의 가변성과 무궁한 다양성이다. 실제로 있는 것 그리고 나타난 것 그 양자가 모두 미 확정적인 것이며 무한히 개방된 그 무엇이기 때문에 그 양자의 궁극적 기술이나 규정을 거부한다. 예를 들어 어떤 목사가 있다 그가 머리를 길렀다가 깎기도 하고 양복을 입기도 하고 한복을 입기도 하고 그가 앉았다가 누웠다가 잠자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웃었다가 울었다가 성내기도 하고 온갖 오도방정을 떨며 그 행위나 모습을 변형하는 것이다. 그의 실체가 과연 무엇이냐. 실제로 어려운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존재의 양태는 영원히 生成論적이며 비 규정적(non-definitive) 적이기 때문에 실제로 있는 것과 나타남, 이 양자사이의 관계를 운운하는 진리는 매우 복합적이며 중층적 구조를 들어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볼 때 저기 정원에 서 있는 나무는 무엇이냐/ 저것이 영원히 우리의 인식행위를 통하여 나타난 것일 뿐이라면 저기 정말 실제로 있는 것은 무엇이냐. 정말 나무가 있는가 과연 있다면 실제로 있는 것은 무엇이냐.
2) 실용적인 것이 바른 것이다.
과거 역사와 올바른 관계 설정은 축복(행운, 성공)이 인간에게 유익한가의 문제다. 인간이 온전하려면 강력한 인격이 있어야 하고 역사의 힘 앞에서 단호하게 자기 인격을 지켜나가야 한다. 니체는 역사에 대해 당당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히틀러가 제3제국의 등장을 위해 니체를 이용하여 이데올로기로 썼다. 본인은 그것을 막을 수 없었지만 괴테는 그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행위를 통해 그리스 문화극복의 과제’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는 옛사람들이 살아갔던 방식대로 시도해 본다. 이런 과정은 혼자 머리로 생각해 보는 것보다 훨씬 유식하고 더욱 중요한 것은 고대 사람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선 기분이다.”13)
니체는 문헌학자로서 고대 그리스사람들과 하나가 되어 고대 그리스를 바라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었다. 그가 문제 삼는 연구의 척도는 옛것을 모방하는 것 사랑으로 감동 받는 것 사랑으로 무엇인가 요구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지적하고 괴테가 옛것의 모방에 경쟁하는 마음으로 고대문화를 파악하였다.14)
이 때 모방이란 토마스 아켐피스가 말하는 “예수의 모방” (The Imitation of Christ)를 떠올린다. 여기서 말하는 모방은 대상화되는 어떤 실체에 대한 흉내가 아니다. 모방이란 융합이요, 실천이다. 우리 삶은 진리의 빛(the Light of Truth)과 은총의 빛(Light of Grace)으로 진행된다. 이 양자는 분리될 수 없다. 진리의 빛은 은총의 빛으로 완성된다. 그런데 은총의 빛은 막연한 계시가 아니다. 그것은 곧 예수의 십자가의 삶을 내 삶속에서 실천하고 구현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예수가 나에게서 대상화될 수 없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내가 예수의 삶을 실천하는 것이요, 그것은 곧 내가 예수와 같아지는 것이다. 이 ‘같아진다’는 말이 여기서 모방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즉 모방하는 것은 곧 같아진다는 의미이다.
이런 모방의 의미는 에커만에게 전해준 괴테의 심중고백이요, 과거의 훌륭하고 빼어난 문화를 살펴보는 자세가 자기의 창작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이것은 괴테가 진실을 추구하는 한 가지 사고과정이다. 그는 이해하고 인식하고 행동하고 창조하는 사고과정이 서로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너무 잘 안다. 그가 행동으로 실천해 가는 사고의 습관에는 이론보다는 경험적 진리를 더 인정 것이다. 괴테에게 객관적이며 시간을 초월해 무슨 진실이 있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그가 노년에 쓴(1829 an Zelter) 편지에 “나는 경험이 참이라고 믿는다. 그런 생각이 나에게 창작력이 풍성하고 많은 생각을 연상시키며 나를 격려해주는 것은 경험이다”라고 썼다. 또 다른 자리에서 괴테는 이렇게 말하고 있기도 하다. “우리에게 실제로 있었다는 사실은 그것이 진짜라서 좋은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인가라는 의미를 가질 좋은 것이라 믿었다.(장파울의 자서전을 에커만에게 언급) 장파울을 읽으면 그가 속물이라는 것 이외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실제와 달리 의미를 말하고 있다.
3) 실용성의 확대
(1) 괴테와 니체의 차이
자신의 연구 경험을 토대로 두 사람이 고대 예술을 바라보고 느낀 생각들은 서로 달랐다. 괴테와 니체가 그리스 예술을 보고 아름다움이 무엇이냐 또는 미적 형식에 대한 자기의 주장을 살펴보자.
괴테가 사물이나 역사를 바라보는 인식의 틀은 심리적으로 느끼는 니체와는 다르다. 괴테는 그의 감각으로 바라본다. 그는 눈으로 보고 관찰하여 말한다. 그리스 예술이 아폴로적 측면에서 호머의 서사시가 그리고 조각예술이 괴테를 감동시켰다. 그가 결정적 영향을 받는 것은 눈으로 본 미학적 인식의 틀이었다. 반면에 니체는 음악정신에서 나온 비극의 탄생을 보았다. 그리스 인들이 바카스의 축제에서 미친 듯이 춤을 추는 모습에서 그들을 탐색했다15)
. 그는 그들의 비극예술에 경탄을 했지만 그의 사랑은 조형예술에 있었다. 둘 다 조형예술을 바라보았지만 그 결론은 각기 달랐다. 니체는 자신을 전혀 조형적인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조형적인 사람은 시선을 내부로 돌려 음악가의 시선으로 말한다. 니체가 로마에서 “밤노래(Nachtlied)”를 남기고 로마 예술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남기지 않았다. 니체가 그리스의 신 디오니소스를 만난 것은 그의 운명이었다. 괴테는 아폴로 신을 실존하는 자신의 신으로 삼았던 것과는 차이가 있다.
괴테가 비극에 필요한 것은 인간적인 것이오 희랍비극에 보다 높이 산 것은 유연한 인간의 운명이었다. 이피게니에의 모습에 들어 있는 순수한 인간성이 타우리스 왕의 잔인성을 바꿀 수 있었다고 본 것이다. 반면에 니체는 비극은 화해를 염두에 둔 모든 생각은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을 고양시키는 힘은 근원적으로 서로 얽혀있는 비극성에 대한 환희이다. 비극이 환희로 나타날 때 삶에 필요한 자극제가 되는 것이다. 괴테가 동의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는 니체가 보기에 별다른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윤리적인 교양을 지향하는 사람은 비극감정에 자신을 내맡기지 않는다. 비극을 도덕 함양에 필요한 절차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직 덜 된 사람이고 더 높은 단계가 있다는 것도 우스꽝스럽거니와 필요하다면 디오니소스적 상승이 뒤따라야 한다고 믿은 것 같다. 괴테는 순수 자기 보전을 위해서는 비극이 도움이 되지 않고 이것은 니체가 말하는 비극적 인간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괴테는 체념을 말하고 니체는 근원적 포기, 인식의 해체를 말하고 있다.
비극작가 괴테는 자연스러우면서도 병적인 영역의 주술에 걸려있다. 니체는 그리스의 비극적 정서는 그들의 천성과 일치한다고 보고 괴테는 서사적이면서 아폴로적인 천성에 빠져있다고 보았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괴테는 한번도 제대로 된 비극을 쓰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니체는 괴테의 그리스 이해를 거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니체가 이해하는 비극예술가는 의심스럽고 두려운 것을 감행하기 좋아하며 감정의 충만, 축적된 힘의 감정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본질적으로 페시미스트이지만 그는 도덕적 비관주의자와는 아주 다른 사람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괴테는 전혀 비극적 예술가는 될 수 없는 사람이다. 괴테는 단지 자신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한 수단으로 드라마와 소설을 쓴 사람이다. 니체는 파우스트와 햄리트를 단지 독자를 웃기기 위해 창안한 풍자적 인물 정도로 생각했던 것이다.
(2) 니체의 시대체험과 괴테
니체는 괴테를 비판한다. 그 아래에는 괴테를 보는 니체의 시대적 체험이 도사리고 있다. 「힘에의 의지」에는 그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니체 본인의 정신적 태도가 각인되어 있다.
“내가 서술하는 것은 다음에 오는 200년 간의 역사이다. 나는 일어나는 일도 쓰고 또 달리 나타날 수 없는 것을 적고 있다. 그것은 허무주의의 도래이다. 왜냐하면 허무주의의 도래는 필연적이다. 그것이 역사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래는 여러 백 가지 그림으로 그려 볼 수 있을 것이다. 미래는 모든 사람들이 음악에 귀가 쫑 것 열려 있을 것이다. 유럽의 문화는 오래전부터 긴장으로 일그러져 있다. 긴장의 고통은 몇 십 년 전부터 자라나서 파국직전에 이르렀다. 시대는 불안하고 혼란스럽다. 종말로 치닫는 폭풍우 같다.”16)
이러한 서술은 권력의지의 서문에 들어있다. 니체는 도래하는 허무주의를 예감하고 있는 것이다. 니체의 허무주의는 행동하는 허무라기보다는 아직은 인식하는 허무주의이다.
그는 현상 뒤에 숨겨진 세계는 아무것도 없고 사물도 없고 또 다른 참된 세계도 없으며 그리스도교의 천국 같은 것은 더더욱 없고 단지 현상을 바라보는 원근법적 시선이 있을 뿐이라고 설파하고 있다. 신은 죽었다. 과거의 가치관에 따른 삶의 의미도 잃어버렸다. 윤리적 질서를 위한 신앙도 필요 없다. 그는 자신을 유럽 제일가는 니힐리스트로 자부했다. 그는 허무의 늪에서 허무를 극복하기 위한 대응책을 강구한다. 이 허무의 극복을 위한 힘이 ‘영원회귀’의 명제요, 힘을 향한 의지의 철학을 표방하고 나선다. 허무는 역사 현상에 대한 진단이요, 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허무를 극복할 아무런 대책도 찾을 수 없다. 그는 시장에 나와 신을 찾는 모습이 알레고리 형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큰 소리로 묻는다. 우리 모두 너와 내가 합쳐서 신을 죽였다. 이제 어디로 가느냐. 모두가 아무 말이 없을 때 그는 외친다. “내가 너무 일찍 시장에 나왔나? 시간이 틀렸나? 이 엄청난 사건은 아직 전달조차 안되었나? 니체는 당대의 문제를 데카당스라고 규정하고 몰락과 하강을 위한 동경의 근원에는 기독교적 사유가 있다고 전제하였다. 다행히 니체는 기독교 이전의 그리스 정신에 해박해서 기독교 정신과 비교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 그는 유럽 문화의 퇴폐성을 비판한 것이다.17)
이러한 독백은 니체가 그 시대를 본 시대상황이다. 그는 무시무시한 시대상황을 신의 사망으로 벗어 나오려고 한다. 정신적 긴장 속에 허무를 극복하려고 몸부림치는 것이다. 이것은 과분한 몫이었다. 그것은 자신의 분수에 넘쳤다. 토마스 만은 이 행위를 지나치다고 묘사하고 있다. 니체는 생각의 십자가를 진 죽음의 희생자요, 동시에 그 자신 희생자가 됨으로써 자신이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고 썼다.
4) 전통은 짐인가, 창조의 수단인가?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일 절이다. “우리가 사용하지 않는 물건을 부담스런 짐이다.(V684)”, 여기서 괴테도 실용주의의 유효성을 주장하고 있다.18)
우리가 가진 인식내용에 따른 의존성, 그것에 대한 시적 표현은 괴테의 시 “유산Vermaechtnis)”19)
에 나와 있다.
유산
모든 것은 소멸된다.
만물은 영원히 계속 움직인다.
존재하고 있는 것은 축복받은 것이야
존재는 영원하다. 우주의 원리는 생명을 지켜주고
만물은 보화로 장식되어 있다.
진리가 과거의 정령들을 묶어 두었다. 옛날의 진리 그것을 붙잡아 두어라. 지상의 아들에게 감사드려라, 태양을 돌고 있는 지구와 달에게 운행 길을 가르쳐주는 현자에게!
이제 즉시 내면으로 향하라.
중심이 여기 내부에 있다.
어느 고귀한 사람도 그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너는 어떤 규칙도 놓치지 않을 거야.
너의 양심이 너의 행동윤리의 태양이니까.
이제 넌 감각을 믿어야 한다.
너의 오감은 어떤 거짓도 용납하지 않는다.
너의 이성이 눈뜨고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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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과 충만을 적절하게 누리게
이성이 어느 곳에도 출현하리라. 생명이 생명을 환영하는 자리에
그러면 지난 과거가 임할 것이고
미래의 일이 생기 있게 눈 뜰 것이고
순간이 영원이 된다.
그리고 마침내 너는 이루었다.
너의 감정이 너를 휩쓸고 지나가는 일을.
생산적인 것, 그것이 옳은 거야.
너는 하늘의 섭리를 시험해보고
섭리는 섭리대로 진행될 것이다.
너도 그 섭리에 동참하면서.
생산적인 것이 바르고 좋은 것이다. 세상에는 많은 진리가 있고 진리는 보편적인 유용성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진리가 유익하다면 실용주의에 근거하고 있다. 실용주의는 괴테의 기본정서와는 다르다. 삶에 영향을 끼치고 성공을 가져다 주는 실용적인 진실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실용성이란 활동적인 일에 도움이 되는 그 무엇이다. 결실이 있고 생산을 촉진시킨다는 것은 꼭 유용성의 영역만은 아니다. 이것은 인간내면의 영역도 포함한다. 이익을 가져다 주니까 유익하지만 유익하기 때문에 참된 것은 아니다. 이렇게 보면 괴테의 역동적 진리관도 이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넌 너의 오감을 믿어야 한다. 너의 오감의 어떤 거짓도 용납하지 않을 거야. 너의 이성이 눈을 뜨고 있다면”20)
이런 태도는 괴테의 자기 삶과 관련하여 객관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노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자연과 괴테와의 관계에서 인식도 자신의 오감을 믿게 만든다. 그의 자연연구 결과는 진실로 보였다. 왜냐하면 그는 사실을 감각으로 보았고 이를 정신적으로 심화시켜 나갔다. 괴테는 진리의 이해를 자신의 감각에 의존하고 있다고 하겠다.
니체도 감각기관을 우리의 모든 인식의 판단기초로 삼았다. 바로 우리의 그물망에 걸리는 것 외는 아무것도 붙잡을 수 없다고 (서광117)에서 밝히고 있다.
동양이 이런 문제에 있어 먼저 그 위상을 밝힌 경우도 있다. 노자 12 장에 나오는 오감이 그것이다. 虛其心, 實其腹 이란 말에서 보는 것은 곧 제 3장의 이야기와 동일한 것이다. 눈으로 보는 目이란 인간이 가진 8 識 중에서 가장 원초적이고 가장 직접적이며 가장 또렷하고 가장 즉각적인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가장 에러의 가능성이 높고 가장 이 세계를 왜곡되게 구성할 수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 왜곡을 환(幻 maya)이라 부른다. 환이란 환상이오, 환유(幻有)이고 환술(幻術)이며, 환영(幻影)이다. 그것은 실체가 없는 것을 실체로서 인식하는 대표적인 작위이다. 새끼줄이 뱀으로 꿈틀거리고 세워놓은 낡은 빗자루가 도깨비로 변하여 나와 씨름하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눈에 비해 우리의 복감 (腹感)은 다르다고 말한다. 배의 인식은 보다 근원적이고 막대하며 보다 무차별적이며 보다 지속적인 것이다. 그리하여 노자는 결론적으로 눈을 버리고 차라리 배를 취하라고 알리고 있다.(去彼取此)
정신적 감각적인 인식은 눈이 되었던 배가 되었던 진리를 얻어내려는 사람의 몸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절대적 인식의 원리가 될 수 없다. 이는 다만 형식이나 내용에서 인식자의 구미에 맞게 만든 내용이다. 인식 방법에 따라 진리가 결정될 수 있기도 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보편적으로 이러한 관계를 파악했어야 한다. 우리는 내 자신과 외부와의 관계를 알고 있다. 관계의 파악이 진리이다. 누구나 다 나름대로 관계를 설정하고 자신의 보편적 진리관계를 설정할 수 있고 이 때 이것이 진리가 된다. 진리의 주관성은 진리의 유효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이러하다. 누구나 참된 것을 받아드리려는 성질이 있고 자신의 행위를 다른 사람이 행한 행동과 연결시키려는 일에 진리의 효율성이 있다.
“바른 것은 이미 찾아내었다.
진리가 고귀한 정신을 묶어 두었다
옛날의 진리 그것을 바로 붙들어두어라.“21)
5) 학문의 역사적 전제
역사적 과거의 인정이란 무엇인가. 옛날 조상들이 알게 된 것을 받아들여 계속 발전시켜 나가고 그것을 역사에 무엇인가 기여하게 하려는 것이 과거사의 인정이다. 이 점에서 역사에 대한 괴테의 독특한 위치가 생각난다. 이러 관계는 여러 가지 점에서 고무적이다.
“우리 모두 과거에 살고 과거에 부딪쳐 몰락해 가고 있다.22)
이 말은 괴테의 확신에 넘친 발언이다 그의 확신에 의하면 인간은 역사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역사에 의해 부분적으로 자신의 정신적 향상에 기여한다. 과거를 현존하는 것 조직적으로 녹여 넣을 수 있는 그런 무능력자의 정신적 죽음을 의미한다. 이런 것이 모두 괴테의 확신에 따른 결과이다.
괴테는 호머 문학의 시대를 초월한 보편성을 칭송했다. 문학의 소재에 따른 충실한 역사 내용의 성격을 뛰어넘어 칭찬했다. 「격언과 반성」의 경구를 살펴보자.
“시적 구상적 창조정신은 고대에 비교해보면 편안하고 이상적인 자연 상태로 돌아간 기분이다. 오늘날까지 호머가 읊은 싯귀들은 지긋지긋한 생활고로부터 한순간 해방시켜 준다. 생활의 어려움은 수천 년 동안 전해오는 과거의 습관과 전통을 흔들어 놓았다.”23)
괴테는 어느 사람보다도 더 전통에 살았던 사람이다. 그는 대단히 주관적인 정신으로 과거의 쓸만한 전통을 자기 것을 만들어 나갔다. 그는 시적 상상력으로 과거의 사랑과 종교, 희망과 절망, 영혼의 정열 등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나갔다. 그의 경험이나 정신적인 내용이 과거를 자기 것으로 독립시켜 만들어 나갔다 괴쯔, 파우스트, 타소, 이피게니에 등은 그 때마다 새롭게 만들어진 새 시대의 인물들이다. 반면에 에그몬트, 소크라테스, 체자르, 마호메트, 알킬레스 등은 역사적 모티프를 이용하여 자기 시대에 맞는 개성적 인물로 변형시켜 나간 인물들이다.
개인적 경험, 역사적 전통, 미래 예언적 내용 등은 문학의 기본요소이고 그것 자체가 괴테에 의하여 수용된 문학의 일부가 되었다.
니체는 나름대로 자기 목적을 위해 과거를 이용하는 예술정신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서광 Morgenroete」에서 긴 경구를 괴테를 위해 헌정하고 동시에 전통에 대한 독자적 견해를 기록해 두었다. 옛날의 독일적 교양에서 온건하게 반항하고 자신은 더욱 탁월한 길을 걸음으로서 자기를 더욱 강화시겼다.24)
미켈란젤로는 라파엘에게 공부를 배워 자신의 천재적 재주를 개발했다. 그는 배움을 통해 자신을 개발한 것이다. 재주란 다름 아닌 과거로부터 있어왔던 것을 공부하고 경험하여 연습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복습하는 과정이다. 다시 말해 배우려는 사람은 재주 있는 사람이다. 배우기가 쉽지 아니하고 능력을 개발하는 일이 단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종종 배우는 일이 질투, 자부심 등으로 괴로워한다. 그는 자부심에 멍들고 배우는 자세보다는 이미 공격받고 방어하는 사람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파엘과 괴테는 질투심, 자부심이 넘치지 아니했다. 그들은 훌륭하게 배울 자세를 가진 자들이었다. 지성의 개방이 그들의 장점이었다.
니체도 배움에는 좋은 학생이었다. 그는 과거를 배우는 일에 열심이었고 그 덕분에 그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는 좋은 두뇌에 많은 것을 담을 수 있었다. 그는 역사의식이 있는 사람으로 위대한 인간을 생각할 때면 그 위대함을 만들어주는 역사를 생각했다. 인간은 역사를 통해 과거정신의 우수성을 물러 받을 수 있고 역사를 통해 지평을 넓혀나가 종당에는 자신의 이후로도 많은 시간이 허여되는 줄 알고 있었다.
그는 귀족들 중에서 고귀한 귀족이며 동시에 새로운 귀족의 상속자로서 이 모든 것을 자신의 가슴속에 받아들이는 사람이었다. 그는 가장 오래된 것, 가장 새로운 것, 잃어버린 것, 희망, 정복, 인간성의 승리 등 이 모든 것을 자기 가슴속에 받아들이고자 노력했다. 이 모든 것을 자신의 감정 속에 담아 그것이 남이 알지 못하는 행복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과거를 흘러 보내야 하고 붙잡아 둘 수 없다는 두려움에서 「짜라투스트라」의 다음 말은 쉽게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선량한 자는 결코 진리를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선량하다는 것은 하나의 병이기 때문이다. ... 그래서 차라리 진리를 낳기 위해 충분히 악한 자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25)
「불만의 서 Buch des Unmuts)」26)
에 나오는 괴테의 싯귀도 들어보자.
“3000년 전에 일어날 일을 직접 변호하고 싶지 않은 사람
그는 알지도 못한 채 어둠 속에서 나날이 살아간다.“
Wer nicht von 3000 Jahren sich weiss Rechenschaft zu geben,
bleib' im Dunkeln unerfahren mag von Tag zu Tage leben.
괴테와 니체 두 사람 문헌을 통해 과거 사실을 탐색하는 일에는 상당히 회의적이다. 왜냐하면 그 시대에 어울리는 역사해석은 결국 그 시대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괴테 시절에도 훌륭한 역사 평가들이 있었다. 그도 이런 평가에 호의를 표하여, 헤르더가 인류의 역사철학에 대한 이념을 쓰도록 도와 보편적 역사이해의 기록을 남기도록 노력했다. 그가 이태리에서 이 책을 읽어보기도 했지만 역사학에 관한 한 그의 일생 내내 비판적 태도를 보였다.
역사비판에 관한 내용은 파우스트에도 나오고 있다. 역사비판이란 주관적 성향에 기인하기 때문이리라. 역사서술이란 그 서술한 선생들의 자기 정신이오 그 속에는 그 시대가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Vers 578)
이런 진술은 괴테가 역사를 학문으로 인정하기에는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역사학의 전제인 객관성의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니체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역사의 객관성이란 역사가의 정신(가치관, 역사의식)상태를 말한다. 사가들이 역사를 너무 단순하게 봄으로써 사건의 주체에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미학적 현상을 개인과 무관한 것으로 바라본다. 마치 화가가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천둥번개가 몰아치면 자신을 잊어버려 마치 그 그림에는 천둥번개가 없는 것으로 나타나는 거와 같다. 우리는 역사가로부터 그 역사적 사실자체에 침잠하여 그 역사적 구체화를 요구한다. 그러나 바로 이점이 허점이다. 역사적 분위기에 젖어 있은 사람이 그린 그림은 실제모습이 아닌 기분에 젖은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순간의 사물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생기에 넘치는 활동성으로 자기를 보여 줄 수 있는가. 이것이 신화이고 이 신화조차 때로는 잘못된 것이 된다.
사가는 전해오는 문서에 충실하게 역사를 구현한다. 사건의 순간이 만들어 내는 그림이 아니다. 괴테는 이 문서에 의존하여 과거가 살아 숨쉰다고 알고 있다 . 남겨진 편지, 일기, 메모 등 모든 것이 지난 과거를 보여주지만 이것이 진짜 역사자체일 수 없다는 것이다. 여행기나 전기류를 읽을 때 생기 있는 현안 문제를 재미있게 읽지만 역사는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즉 역사는 비록 사실에 입각해서 쓰고 있지만 무엇인가 뚜렷하지 않는 내용이 들어있다. 역사는 오래되면 될수록 그것을 읽어내기가 쉽지 않고 그 만큼 싫증을 느낄 것이다. 그 이유는 역사를 읽는 후손들이 사건에서 예리하고 섬세한 결과를 승화시켜 뽑아내려고 하기 때문이다.
괴테가 실제로 쓴 예술가 전기(첼리니 Cellini, 하케르트 Hackert, 빙켈만 Winkelmann)에서 사실적 요소의 부족 분은 자신의 상상력으로 보충하여 메꾸어 놓았다. 그래야 과거 사실에 생기를 불어넣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다시 말해 역사는 가급적 독자적 역사연구를 희망하고 있다고 해야 괴테적 역사연구의 의미와 가까울 것이다.
3. 결론
이제 진리의 바른 의미를 살펴보고 괴테가 본 진리 그리고 니체가 본 진리는 무엇인가를 밝혀보자. 진리란 있는 것과 나타난 것의 대응관계를 지칭하는 언어에 불과하고 어떤 경우에도 인간은 그런 진리치를 다 이해할 수 없다. 아니 이해는 한다 해도 진리가 다 표현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진리에 대한 많은 오해를 야기 시킨다. 우리는 그 이상의 논의를 진리에 적용시킬 수 없다. 괴테는 진리의 의미를 보편성에 입각한 객관적 진리를 주장하고 있고, 반면 니체는 진리란 있는 그대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몸과 사실과의 관계가 어떻게 상응하는 가에 따라 더 큰 진리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다만 역사가 주는 교훈문제에서 과거에서 인간이 자유롭기 어려우니 배우기를 힘쓰도록 장려하고 있다는 점에서 둘의 일치감을 보인다.
논문인용-이영수(동아대)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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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Wahrheiterkenntnis-Vergleich
bei Goethe und Nietzsche
Meine Arbeit kann unter folgenden Gliederungen verstanden werden
ⅰ Zweierlei Wahrheit
1) Wahrheit hat zwei Seiten
2) Dynamik der Geschichte- Verstaentnis
3) Was ist die Wahrheit
ⅱ Die Nutzbarkeit ist gut
ⅲ Vermehrung der Nutzbarkeit
1) Der Unterschied von Goethe und Nitzsche
2) Goethe und Zeiterfahrung von Nitzsche
ⅳ Tradition ist eine Last oder ein Mittel der Schaffung
ⅴ Was ist die Voraussetzung der Wissensgeschichte?
Hauptsaechlich moechte ich untersuchen ,was die Wahrheit ist und wie Goethe und Nietzsche sie verstanden haben und was der Unterschied von Beiden ist.
Der Leitende Gedanke in der Philosopie bei Nitzsche ist immer mehr der, dass dem Leben in der Rangordnung der Werte der oberste Platze zukomme. Das Leben erhaehlt nicht erst seinen Sinn durch etwas anderes, Sinn und Zweck liegen in ihm selbst, und Aufgabe der Philosophie ist es, zu seiner Mehrung, Erhoehung beizutragen, seine Hochschaetzung in Geltung zu bringen.
Goethe aeuserte sich, er wies nicht woher der Mensch kommt, noch wohin geht, er weis wenig von der Welt und am wenigsten von sich selbst.( Eckerman, 10. April 1829). Natuerlich habe Goethe die Selbsterkenntnis ueberhaupt nicht abgelehnt.. Dieser Art Selbsterkenntnis hat sich Goethe nie widersetzt, ja gerade als sein einges Verfahren gekennzeichnet.
Goethisch ist der Ausgangspunkt, den Nietzsche fuer seine Bildungskritik waehlt, Goetisch ebenso ihre positive Forderung, Goetisch endlich der angegebene Weg zu deren Erfuellung. Nietzsche interpretiert das hergebrachte Bildung im Sinne von Gebilde von erwas Auferbautem. ..........
Hauptsaechlich ist die Wahrheit die Konformitaet von Phenomena fuer Substanz. Bei unserer Erkenntnis gibt es nur eine Nahverstaendnis von Erscheinung zu Substanz. Das ist mit Bezug auf Wahrheit nur eine Gegenueberstellung woertlich zu Substanz.
Alles andere Seele, Geist, Vernunft, Wahrheit gewinnen dadurch nur noch funktionelle, nicht mehr eine absolute Bedeutung. Die Verabsolvierung des Lebensbegriffs steht in Mittelpunkt dieser Philosophie. Uns geht es darum zu zeigen, wie dadurch die Geltung der Wahrheit relativiert wird. Das gilt auch von der Wahrheit ueber sich selbst, von der Kenntnis des eigenen Ic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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