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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심의 논리학!

[중산] 2020. 1. 31. 21:30

수치심의 논리학

왜 그럴까? 탄로가 났기 때문이다. 탄로가 나려면 우선 무엇을 숨기려는 시도가 있어야 한다. 숨기고자 하는 것은 결함이다. 남의 눈을 속이기 위해 보호 장막을 설치했는데 그 장막이 무너져 결함이 드러난 것이다. 우리는 단죄하는 듯한 시선들 앞으로 끌어내졌다. 갑자기 발가벗겨진 것 같은 기분이다. 이럴 때 제일 먼저 느끼는 포괄적인 감정은 수치다.


수치심에 대해 언급하는 방식은 이중으로 두루뭉술하다. 첫째로 이 말의 범위가 그렇다. 도덕적 결함, 즉 과오가 드러났을 때 경험하는 감정으로 방금 설명한 바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과오의 여부와 상관없이 단순히 민망하거나 난처한 상황에 처했을 때 흔히들 이 말을 쓴다.


자신의 중독이나 가난이나 말더듬이나 문맹 때문에 수치심을 느낀다고 할 수도 있고 수백만이 지켜보는 가운데 소중한 페널티킥을 엉뚱한 곳으로 날려버린 축구 선수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쌀 때도 그렇다. 이 장에서는 수치심의 논리는 과오가 개입되어 있을 때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므로 좁은 법위로 한정 짓고자 한다. 

 

여기서 수치심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 모두 억지로 숨기려고 하는 노력이 수반된, 탄로 날 것에 대한 공포이다. 물론 과오를 저지른 경우에도 이 공포는 유효하다. 거짓말에 대한 수치심 때문에 그것을 덮으려는 거짓말이 이어진다. 폭로에 대한 두려움의 정확한 대상은 무엇이며 당장의 수치심이 유발하는 강력한 정신적 붕괴 상태의 순간에 경험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상실이다. 우리는 타인으로부터의 인정, 신망을 상실하는 것이다.


결과는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가하는 행위의 변화다. 그뿐만이 아니다. 나를 보는 시선도 변했다. 그것은 멸시의 시선이며 성경적으로 말해서 추방과 배척의 시선이다. 그 시선은 “이제부터 너는 우리 편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바로 이처럼 배척당하고 따돌림 당하고 내쫓길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나는 과오로 인한 결함이 드러나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는 것이다. 

 

수치심이라는 것은 사람들 앞에서만 느껴졌다가 그들이 물러가면 다시 사라져버리는 순간적인 경험이 아니다. 정체가 폭로된 사람의 수치심은 잊힐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수치심이 왜 이렇게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인가? 우리는 결함이 타인 앞에 한번 까발려진 이상, 타인의 시선 앞에 힘없이 널브러진 것과 똑같다고 생각한다. 내 주위에는 방어벽도 없다. 수치심으로부터 막아주는 내적방어벽이 왜 없을까? 그 이유는 나 자신이 직접 무력감에 한몫을 하기 때문이다. 정말로 파괴력을 가진 것은 내가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굴복한다는 사실이다. 외부의 판결을 나 자신의 시선과 자립적 판단 능력으로 맞서는 대신에 외부의 판단을 그대로 받아들여 나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들의 시각을 내면화한다는 말이다.



수치심을 극복함으로써 존엄성 지키기

존엄성은 수치심을 느끼지 않아도 될 권리라고 표현할 수 있다. 즉, 존엄성을 굴욕을 느끼지 않을 권리로 이해하는 것이다. ‘나는 하나도 부끄럽지 않아. 떳떳하단 말이오’. ‘당신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는 신경쓰지 않습니다’. 라는 생각을 한다.


문맹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문맹자가 읽기 기초반에 등록한다. ‘맞아, 나이가 이렇게 지긋하도록 글을 배우지 못했어. 오랫동안 부끄러움 속에 살았지’.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말이야.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존엄성을 다시 찾은 사람은 외부의 판단을 반드시 나 자신의 판단과 동일시해야만 할 불가피한 이유가 없다는 것을, 어째서 나 자신을 타인의 눈을 통해 바라봐야만 하는지 아무런 근거가 없음을 아는 사람이다.


이전에는 결함으로 생각되던 것들이 이젠 그렇지 않다. 나는 당당하다. 이제 내 모습 그대로 보는 타인들 앞에서 고개를 수그리지 않는다. 그들은 여전히 독선적이고 비타협적인 생각을 가지고 나를 판단하지만 그것까지 어쩔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경계 밖에 있고 내 안으로 침범할 수도 없으며 내게 아무 힘도 휘두르지 못한다. 내게 일을 맡기지 않거나 내 공을 인정하기 거부하는 방식으로 날 소외시키겠지만 나는 다른 곳으로 이사 가서 거기서 맘 편하게 살 수도 있다.



진정성으로서의 존엄성

체면을 지키는데 일조하는 거짓말은 놀라울 정도다. 너무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기 때문이다. 거짓말을 하는 측과 거짓말을 들어야 하는 측, 양측 다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용되는 것이다. 거짓이 마치 진실인 것처럼 취급된다. 왜냐, 누군가 수모를 당한다면 중대한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지W.부시가 이라크에서 전쟁을 일으켰을 때의 일이다. 거짓에 기반을 두었으며 국제법에 위반되는 전쟁이었다. “시간이 없습니다.” 그의 수하들이 온갖 매체에서 떠들어댔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이렇게 말하지 않앗다. “거짓말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금기였다. 신문들마저도 거짓말이라는 단어를 명확하게 표현하기를 꺼렸다. 시간이 지나 정말 모든 사람들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고 난 후에도 거짓이라는 말은 사용되지 않았다.


명확한 단어로 거론되지 못했던 부시의 거짓말과 기만은 진실을 향한 의지라는 면에서 존엄성에 위배된다. 누군가의 체면을 지켜줄 필요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진실을 덮어주자는 암묵적인 동의가 이루어져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존엄성을 파괴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켜주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유는 무엇일까?


결정적인 것은 동기에 있다. 끔찍함과 무자비함으로부터 보호하려는 동기다. “ 존엄성이라는 건 어쩌면 오해, 그것도 아주 절망적인 오해가 아닐까. 툭 터놓고 말한다면 사실 그것은 그냥 두려워서가 아닐까 싶다. 딱 들어맞는 말이 두려운 거지. 좀 더 부드러운 말에 왠지 의지하고 싶은 거야. 인간은 무언가에 의지하고 싶으니까.....“


지적 정직성에는 모르는 것을 인정하는 것 말고도 사실의 인정이라는 것이 포함된다. 그러므로 진실이 결여될 때 법적 사안으로 다루어지기까지 한다. 실재했던 민족 학살을 부정하는 행위는 법의 처벌 대상이다. 설령 그 주장으로 아무도 실제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안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며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보고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존엄성의 부재로 인한 역겨움이다.


다른 사람을 미신으로 끌어들이는 행위도 존엄성을 훼손하는 행위이다.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으로 기적의 치유를 바라며 루르드에 모여든 수많은 마비 환자와 장애인의 광경이다.

지적 정직성의 결여, 거짓말, 미신 말고도 또 하나 더 있다. 현실감각과 진위 분간 능력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어리석은 허언이 그것이다. 어리석은 허언은 의미의 유무를 떠나서 말하는 사람이 자기가 쓰는 말이 사실에 부합되는지 아닌지 신경 쓰지 않는, 그리고 중요하지도 않은 그런 말을 뜻한다.



도덕적 진실성으로서의 존엄성

누구에게 죄를 짓는다는 것은 그에게 고통을 안겨준다는 것을 뜻한다. 죄의 인식은 도덕적 진실성을 파괴했다는 인식과 같다. 또한 상대방이 느끼는 고통이 도덕적 존엄성을 잃었다는 것을 인식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그러한 행위를 했을 때 혼란에 빠진다. 자기 자신 때문에 혼란스러운 것이다. 이 혼란스러움의 감정은 죄의식이다.


죄를 저지른 자의 존엄성은 그가 자기 잘못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지니고 있는지 그리고 상실된 도덕적 질서를 어떠한 방식으로 바로 잡으려고 노력하는지에 달렸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차를 모는 바람에 인도에 서 있던 아이를 치었다고 상상해보자.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에게는 책임이 있다. 법적 책임을 떠나서 나는 존엄성과 관련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부정이나 변명, 궤변 없이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최소한일 것이다.


내 의도를 용서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 부주의와 스스로의 상태를 제대로 통제하거나 돌보지 않았음에 대해 용서를 청하는 것이다. 얼마간의 금액을 자동이체되도록 해놓고 내 할 일은 끝났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존엄성의 부재일 것이다.

자신에 대해 책임지는 존엄성이 될 수 있도록 경험을 통해 성숙하는 것, 인생에 대해 전체적으로 더 큰 책임감을 느끼고 기존의 우선순위를 점검해보는 것이 존엄성 있는 태도에 가깝다.


* 존엄성이란 아주 중요한 것, 절대로 훼손되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존엄이란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특정한 방법이다. 그것은 사고와 경험, 행위의 틀이다.

존엄한 삶의 형태를 세 가지 차원으로 나눠서 생각해볼 수 있다. 첫 번째는 내가 타인에게 어떤 취급을 받느냐 하는 것이다. 두 번째 차원은 내가 그들을 어떻게 대하느냐, 즉 내가 타인을 대하는 생각과 태도라는 측면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세 번째 차원에서의 접근 역시 결정권은 나에게 있다. 그것은 내가 나를 어떻게 대하느냐다. 우리는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한다.

남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 나는 남을 어떻게 대하는가? 나는 나에게 어떻게 대하는가? 이 세 가지의 물음, 세 가지 경험의 종류, 세 가지 분석의 차원은 모두 존엄성이라는 개념으로 흘러 모인다.


<‘삶의 격‘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방법‘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페터 비에리 지음 문항심님 옮김,은행나무 출판>

** 페터 비에리 : 1944년 스위스 베른에서 태어났다.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 철학부 박사, 버클리대학, 하버드대학,베를린 자유대학 등에서 연구 활동





                                                                                               부산 기장 학리해변


                                                                                                   기장 죽성 드라마셋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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