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중심으로 본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그리고 해방~!
이승만이 태어난 1875년은 일제가 한반도에 본격적으로 침략의 마수를 드러낸 해다. 그해 1월19일, 일본정부 이사관 모리야마 시게루 등이 외무성의 서계(書契)를 가지고 부산 동래부에 나타났다. 서계접수를 거부하자 군함3척이 4월21일 부산항에 무단 입항하였다.
다시 8월20일 강화도에 나타나자 상륙을 저지, 포격을 가하자 퇴각하면서 영종진을 포격했다. 운요호 사건의 발단이다. 이듬해 침략 야욕은 더욱 노골화되었다. 1월17일 한일수호조약 체결을 명분으로 경기도 남양만에 나타났다.
2월2일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최초의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승만은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났는데, 어린 시절 가정 사정에 의해서 서울로 이사해서 친척인 이근수의 지반인 남대문 밖 도동에 살 곳을 마련했다. 가계는 조선왕조 청건자 이성계의 후예로서 이승만은 세종대왕의 형님인 양녕대군의 16대손이다.
이승만은 13세부터 11차례나 과거에 응시했다. 역설적이지만 당시 과거제도가 문란하지 않았더라면 대단히 총명했던 이승만과 김구는 대한민국의 총망 받는 관리가 되어 전혀 다른 생애를 보냈을지도 모른다.
이승만은 1894년 갑오경장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면서 더 이상 과거를 볼 수없게되자 신학문에 눈을 돌려 영어를 배우게 되었다. 1895년(당시20세)4.2일에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배제학당에 입학했다.
이승만이 배재학당 2년여 동안 크게 감명 받았던 것은 기독교 신앙이나 외국인 선교사와의 교제 그리고 영어회화도 중요했지만, 1896년 5월부터 매주 듣게 된 서재필 박사의 강의였다. 이승만은 서재필의 영향으로 배재학당 내에 조직된 협성회에 참가했다. 협성회를 통해 사회활동참여, 언론활동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서재필(1866~1951)은 20세에 김옥균, 홍영식이 일으킨 갑신정변에 참여, 정부를 전복시켰으나 3일 천하로 끝나면서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승만의 눈에서재필은 위대한 선각이었다. 그로부터 두 사람의 인연은 해방 뒤 이승만이 집권하면서 귀국한 서재필을 냉대할 때까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1895년 8월 20일, 일제가 보낸 폭도들에게 명성왕후가 살해당했다. 1896년 2월에는 아관파천으로 친일내각이 붕괴되고 친러내각이 들어서면서 총리대신 김홍집이 군중에게 타살되었다. 3월9일, 김구가 일본 육군 중위 조스케를 명성왕후 살해범으로 지목하여 처단했다.
고종이 을미사변, 아관파천 등으로 추락한 왕실의 권위를 다시 높이는 기회로 삼아 왕권강화에만 역점을 둔 나머지 근대적 국정개혁은 뒷전으로 밀렸다.
이승만은, 박영효 일파가 고종을 폐위시키고 일본에 피신 중인 의회군 이강을 황제로 옹립하여 박영효 중심의 혁신내각을 구성하려는 쿠테타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았다. 이승만의 정치활동은 정부 전복음모 혐의로 구속되면서 중단되고, 그는 20대 초기에 ‘사형수’로 파란만장한 정치 생명의 서막을 열었다. 김구도 이 무렵 사형수가 되었다.
23세 이승만은 정국이 요동치고 있는 가운데 정치적 개화의 야망을 품고 나왔다. 조선은 개국이래 임진, 병자난 등 여러 차례 국난을 겪었지만, 이때처럼 친체제와 반체제, 지배층과 피지배층, 위정척사파와 개화파, 양반과 상민, 유교와 천주교 그리고 민족종교(동학) 등이 얽힌 총체적인 갈등과 분화를 동시에 겪은 것은 초유의 일이었다. 새로운 시대를 향한 진통일 수도 있었지만 붕괴의 서곡이기도 했다.
23세에 투옥되어 6년 동안 옥중에서 공부한 뒤의 저술은 프린스턴대학 재학시절인 1910년 하와이에서 처음으로 출판되었다. 여기에는 세계정세의 흐름, 청러일의 각축과 일본인의 의도 등과 ‘독립정신 실천 6대 강령’을 실었다.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조선에 온 해로이드 여사가 신약성서를 차입해준 것이 이승만에게는 기독교 신앙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다. 감옥생활을 통해 신심이 두터운 크리스천으로 성장했다.
이승만에게 박사칭호가 아호처럼 붙기 시작한 것은 1910년11월 23일 신한민보가 보도한 ‘리 박사 귀국’이라는 기사가 처음으로 보인다. 이승만 유학비용은 대부분 미국 기독계의 지원으로 충당되었고 일부는 이상재, 전덕기 등 국내 인사들의 도움도 받았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그리고 해방공간에서 때로 협력관계와 경쟁관계의 쌍두마차로 활약한 이승만과 김구는 이 시기에 벌써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김구는 명성왕후 살해범 쓰치다를 척살하여 사형수가 되고, 이승만은 민족지 주필로서 항일투쟁을 벌였다. 김구는 직접행동으로, 이승만은 언론과 사회운동으로 일제와 싸우기 시작했다. 이승만의 정치활동은 정부 전복음모 혐의로 구속되면서 중단되고, 그는 20대 초기에 ‘사형수’로 파란만장한 정치 생애의 서막을 열었다.
이승만이 수형생활을 하고 있을 때 내외정세는 급변하고 있었다. 1904년 2월6일, 일본 군함 60여 척이 조선 파견군과 러시아 정벌군을 싣고 인천해상에서 러시아 함정 2척을 격파하고 그 길로 서울에 들어왔다. 2월9일 일본은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함으로써 러일전쟁이 발발했다.
일본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가 특파대사로 조선에 파견되어 친일세력이 세를 얻게 되었다.
4월에는 군사침략 중추기관이 된 일본군 주차사령부가 용산에 설치되었다.
이승만이 감옥에서 풀려나올 무렵 조선왕조는 마지막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러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은 재빠리 군대를 서울에 진주시키고(2월9일),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했다. 이 협정으로 그들의 내정간섭을 받게 되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통해 대륙세력을 제압한 일본은 영일동맹에 이어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준비하는 등 한국을 송두리째 집어 삼키려 들었다.
조미통상수호조약은 1882년 3월(고종19) 조선과 미국이 국교 수립과 통상을 목적으로 맺은 조약을 말한다. 일본의 조선 진출을 막으려는 청나라 리홍장의 알선으로 미국의 슈펠트 제독은 인천에 들어와, 조선 측 신헌, 부관 김홍집과 전문 14조로 된 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은 조선이 일본과 맥은 여러 조약에 비하여 불평등이 배제된 주권 독립국 간의 최초의 쌍무적 협약이었다.
이승만은 명성황후의 조카인 민영환과 한규설의 밀지를 받고 도미 길에 올랐다. 미국은 조미수호조약을 준수하여 한국의 독립을 지켜주라는 것이다. 사절로 윤병규와 이승만을 위촉했다.
루스벨트가 이들을 만난 것은 외교적 제스처에 불과했다. 루스벨트 특사인 태프트는 7월31일 일본 수상 가쓰라와 비밀협정을 맺고, 미국이 필리핀 지배를 일본이 인정함을 전제로 미국은 “일본이 한국에 대한 보호권을 확립하는 것이 러일전쟁의 논리적 귀결이며 극동의 평화에 직접 공헌 할 것으로 인정한다.”고 하여, 한국을 식민지화하려는 일본의 침략정책을 묵인하는 밀약을 체결했다.
구국외교활동에 실패한 이승만은 귀국을 단념하고 눌러앉아 공부하기로 작정했다.
그는 미국 기독계 인사들의 지원으로 1905년 가을 학기부터 조지워싱턴대학에 입학했다. 조지워싱턴대학을 마친 이승만은 서재필 등의 주선으로 하버드대학에서 석사를 마치고 1910년 7월에는 프린스터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제는 대한제국이라는 국호를 없애고 조선이라 쓰도록 했다.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초대조선총독으로 부임하여 가혹한 무단통치를 시행했다.
이승만은 1910년10월 10일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912년 3월에 다시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종교행사나 관혼상제가 아니면 서울에서는 장성한 남자 3인이 함께 걸어 다니는 것도 금지되었다. 새 주인이 된 조선총독부는 조선인을 이렇듯 억압과 무단으로 다스렸다.
1911년 데라우치 총독 암살음모사건을 조작하여 신민회 회원 등 700여 명을 체포했다. 105인을 최종 지소하여, ‘105인 사건’으로 불리지만, 일제가 한국의 대표적 기독교인과 신민회 간부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이 사건을 날조한 것이다.
숱한 민족주의자, 기독교인들이 고난을 겪는 105인 사건의 와중에 친일파의 목사의 주선으로 출국허가를 일본정부에서 얻어주었다.
제1차 세게대전은 독일과 4개 연합국(미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간의 휴전(1919.11.11)이 성립되면서 5년 동안 4000만 명의 희생자로 유럽을 피로 물들이고 폐허로 만든 끝에 간신히 마무리 되었다. 안창호가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을 조직(1913.5) 상하이에서 박은식, 여운형 등이 신한혁명당을 창당하여 독립운동의 전진기지를 만들었다.
1919.3.항쟁은 한민족의 근현대사에 결정적인 분수령이 되었다.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것은 1919년 4월 11일이다. 임시헌장 10개 조항에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제1조)”, 임시의정원 의장에 이동년, 국무총리는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로 구성했다.
임시정부와 이승만의 갈등은 접점을 찾지 못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25년 이승만을 탄핵하고 박은식이 제2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1929년 세계대공황이 일어나자 독일, 일본, 이탈리아 등이 식민지를 확대, 재편성하여 제국을 건설하려는 파시즘 세력이 등장했다. 일제는 1931년 9월18일 만주침략을 감행하고 이듬해 3월1일 만주국을 세워서 지배권을 행사했다. 또 1937년 중국 본토를 침략하여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1938년 독일의 오스트리아 침략 등 세계각지에서 침략전쟁이 잇따랐다.
이승만과 한미협회는 1943년 3월 하원이원을 통해 한국 임정의 승인을 제출했으나,임정의 대표성과 한인단체의 분열상을 들어 승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충칭임시정부는 1942년 10월 김규식, 김원봉 등 민족혁명당이 참여하고, 이에 앞서 조선의용대를 광복군에 편입하는 등 명실상부한 좌우합작 정부체제를 갖추었다.
1945년 4월26일부터 6월 28일까지 샌프란시스코에서 연합국 50개국이 모여 국제연합(유엔)을 창설했다. 이승만은 1945년 10월 4일 워싱턴을 떠나 일본을 통해서 33년 만의 귀국을 하였다.
이승만은 1945년 7월말 태평양전쟁을 승전으로 지휘하고 있는 맥아더에게 전문을 보내 자신의 반소, 반공의 입장을 전했다. 이것은 반소주의자 맥아더의 주목을 받게되고, 그의 협력으로 귀국하여 해방정국에서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는 하나의 전기가 되었다.
한국인들이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과 한국의 해방을 알리는 일왕의 목소리를 듣기 전에, 국무.전쟁.해군 3부 조정위원회는 한국을 분할할 지점(38도 선)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미국은 전쟁 중기부터 한국의 장기 신탁을 구상했다. 루스벨트는 소련을 다국적 통치에 참여시킴으로써 일방적인 해결책을 사전에 차단하는 한편 한국에서의 미국의 이익을 보장하는 조항을 마련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인들과 전혀 의논하지 않은 채 38도선이 그어지고, 미.소가 가각 군대를 남북한에 진주시킨 것이다. 9월 2일 맥아더가 남한에 군정을 실시한다고 선포했다.
이승만이 9월 16일 귀국했을 때 미군정과는 별도로 여운형에 의해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구성되고, 9월14일에는 건준명칭을 조선인민공화국으로 바꾸고 내각을 발표했다.
주석 이승만, 부주석 여운형, 국무총리 허헌, 내무부장 김구, 군사부장 김원봉 등이다. 그러나 이승만은 주석 초대를 거부했다. 해방직후 한국의 정치.사회적 주도권은 여운형의 건준과 공산(사회)주의 계열의 인사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1945년12월 말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영.소 외상회의에서 한반도의 5년 신탁통치안이 채택되었다. 김구와 임정 계열은 반탁과 즉각 독립을 내걸고 반탁운동의 선두에 섰다. 남한에서 탁치를 둘러싸고 좌우익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한반도를 분단시킨 미.소양국이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한국 문제를 유엔으로 넘기는 계기를 만들었다.
1947년 11월 14일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의 감시아래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 독립국가를 세우자는 미국의 결의안을 소련대표가 퇴장한 가운데 가결시켰다. 결의안이 채택되고 1948년 2월 임시위원단의 접근 가능지역 즉 남한만의 총선거 실시안을 가결했다. 유엔에서 한국 문제가 토의될 즈음인 11월 4일 이승만은 성명을 통해 단독정부 수립을 촉구했다.
1947년 7월 19일 여운형이 암살되어 중도세력이 큰 타격을 입었다. 그해 12월 22일 김구는 남한 단정 수립을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김구,김규식이 불참을 선언한 남한의 5.10총선은 이승만의 독무대였다.
정부 수립 이후에도 남한에 잔존했던 공산주의 세력이 극렬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1948년 4월3일 제주도에는 좌익세력이 남한만의 단독선거, 단독정부를 반대하는 반미, 반경찰, 반서북청년단 등의 구호를 외치는 무장폭동이 일었다. 제주도는 피로 물들었고 살인,방화 파괴가 자행되었다. 10월19일에는 제주도 4.3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군경비대가 여수와 순천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11월 25일 국회는 국가보안법을 통과시켰다.
정부는 파괴와 선동적인 논조의 신문을 사전에 차단하기위해 1948년 9월18일 신문기사 게재금지7개 사항을 언론기관에 통보하였다. 정부의 반공정책은 광복 직후부터 좌우익의 극단적인 대립이 가져온 결과였다.
해방3주년 기념일인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기념행사가 거행되었다. 일제강점36년과 미군정 3년이 끝나고 비록 반쪽이지만 민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북한에서는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어 김일성이 수상에 선임되었다. 이로써 한반도에 상이한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었다. 김구는 남북에 각각 정부가 수립되면 동족 간에 피를 흘리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독부’ 이승만 평전, ‘두 언론 대통령 이승만과 박은식“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