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의 견해에 따르면, 도덕적 행위자는 자기를 제 자신만의 특별한 소망과 생리적 욕구를 생각하지 않고, 오직 공유하는 목적을 가진 공동체의 구성원, 즉 ‘목적의 왕국에서 제 자신을 규제하면서 사는 구성원’으로만 생각해야 한다.
니체는 누군가의 도덕 법칙 제정은 제 자신을 위해서 제정하는 것이라고 한다. 니체는 칸트의 방식에 따르는 ‘누군가가 세운 도덕적 격률의 보편화’는 실제로는 올바르게 진행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특정한 방식으로 하는 행동을 기술하는 결정에는 평가적 요소가 개입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내가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받고 나서 진실을 말하는 것이 올바르기 때문에 진실한 대답을 해야 한다고 결정했다면, 내가 누구나 똑 같은 상황에서 똑 같은 행동을 해야 한다고 결정한 것이라고 칸트는 인정할 것이다.
니체는 나를 그렇게 속박하는 것이 나의 입법 의지이긴 하지만, 내 의지가 창조한 그 법칙은 나를 위한 그리고 나만을 위한 법칙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실제로 니체 자신은 개인이 자신의 앞날에 내세우고 도달하려고 노력할 수 있는 것은 법칙이 아니라 이상(ideal)이라고 말하였다.
이상은 단연코 법칙이 아니다. 이상은 긴장과 수양을 초래하며, 이상이 없으면 어떤 도덕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상은-법칙을 위해 작용하지 않으므로-오직 누군가 한 사람이 소유할 것만을 강조한다는 말은 이치에 맞는 말이다. 니체는 이상의 요구는 ‘너는 해야 한다’로서가 아니라 ‘나는 하겠다’로서, 더 나아가 궁극적으로는 ‘나는 나다’로서 체험되는데, 그 까닭은 내가 지금의 나인 것은 ‘나는 어런 사람이 되겠다’고 내가 선택했던 덕분이기 때문이다.
대다수 사람은 자기 사회의 도덕을 의심 없이 그저 받아들이고 나서 그 도덕에 얽매어 산다고 느낀다. 니체는 그런 사람들에게 그들이 실제로는 속박되어 있지 않으며, 인간이기 때문에 자신을 위해 다른 도덕을 채택할 수 있는 의지를 갖고 있다는 점을 일깨워 준다. 니체는 사람들이 다른 가치 체계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첫째는 사람들은 특별한 자격과 위치를 갖지 못한 관습 도덕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둘째는 사람들이 다른 가치 체계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순전히 인간의 입장에서 탐구하고 있다. 다시 말해 사르트르는 일차적으로 인간의 존재 방식에 관심을 갖고 있다. 어쨌든 우리는 존재가 아니라 무와 함께 출발해야 하는데, 그 까닭은 ‘무’라는 개념이 사르트르 실존주의의 핵심개념이다.
‘무’라는 낱말이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무’의 첫 번째 의미는 어떤 사람과 세계, 더 정확히 말하면 어떤 사람의 의식과 그가 자각한 대상들의 세계 사이에 있는 간격이나 분리 같은 것이었다.
‘무’의 두 번째 의미는 세계 속 대상들의 헛됨, 덧없음, 소멸과 거의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든 이 두 번째 의미의 무를 자각하지 못하면 통속적 존재로부터 진정한 존재로 나아가기 시작할 수 없었다.
만일 이 두 가지 의미의 특징을 전자는 인식론적 의미이고 후자는 정서적 의미라고 말할 수 있다면, 사르트르는 무라는 낱말을 주로 인식론적 의미로 사용하였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인간은 의식을-가진-존재(conscious being)이자 ‘자신의-의식을--자각하고-무화하는-존재(Being-for-itself)이므로 존재-자체((Being-in-itself)인 의식을-갖지-않은-대상(conscious object)과 구별된다.
하이데거의 철학에서 본 바와 같이 의식을-가진-존재와 의식을-갖지-않은-대상물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의식을-가진-존재가 제 자신을 발견하는 세계를 숙고하고 또 자신을 의식을-갖지-않은-대상들과 다른 것으로 생각하는 능력이다.
그러므로 의식을-가진-존재의 의식은 존재-자체로부터 의식을-가진-존재를 분리하는 간격이나 공간, 즉 허공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무는 공간과 비슷하다.
인간-존재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잠재력을 가진 존재이다. 반면에 존재-자체는 단단한 덩어리로 완전히 굳어 있는 것이다. 인간-존재는 전혀 본질을 갖고 있지 않다.(인간은 ‘실존이 본질을 선행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통째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떤 방식을 선택하든 그 선택한 방식으로 자신의 본성 속에 있는 내적 허공을 채우는 자유를 누리는 존재이다.
인간 본성의 무는 역설적으로 인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의식을-가진-존재는 외부와 내부 양쪽 모두에서 무를 통해 자기와 자신의 세계의 차이를 자각한다. 그래서 지각하는 능력을 가진 인간은 아무리 미약한 정도라도 지각하고 있는 자신을 항상 자각할 것이다.
인간의 지각 대상이 바깥 세계인지 제 자신의 어떤 면인지 자각하는 것은 아직 일차-질서 자각의 수준이며, 자각하는 자기를 다시 자각하는 이차-질서자각이 있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이 이차-질서 자각이야말로 의식 자체를 본질적으로 규정하는 특성이다.
사르트르는 우리를 행동하게 하는 것이 미래라는 점을 역설한다. 우리는 미래의 자기를 의도적으로 마음에 그려보아야 하며, 만일 우리가 정말로 행동할 예정이라면 과거로부터 멀어져야 한다. 이런 식으로 동기가 부여되지 않은 것은 행동으로 간주되지 않을 것이다.
사르트르는 순수한 실존주의자의 신조. 즉 인간은 제 자신을 만들려고 선택하는 존재라는 것, 우리의 성격이 태어날 때부터 주어졌다든가 어린 시절의 사건과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는 것은 자기-기만에 빠져버리는 일이다. 자기-기만의 기능은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는 일로부터 우리를 방어해주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정직하다면, 우리는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 이외의 어떤 것도 지금의 ‘자기 성격‘을 형성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만일 내 키가 150 센티미터라면 사다리 없이는 도서관 서가의 높은 곳에 손이 닿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내 성격은 내 키가 매우 작다는 맹목적인 단순한 사실에 의해서 형성되지 않는다. 내 작은 키는 단지 내가 자유로운 선택의 구상에 필요한 원재료일 뿐이다.
똑 같은 작은 키를 가진 다른 사람의 차이는-두 사람이 작은 키로 ‘살아가는’ 다른 방식에 있다. 자신의 사고방식과 우리가 세우는 가정의 종류와 사물에 부여하는 가치에 미치는 상황의 영향을 얼마나 허용 하는가 등의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선택 능력의 범위 안에 있다. 사르트르는 이 모든 선택의 책임은 완전히 우리에게 있다고 주장한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성격으로 언급되는 것은 우리는 자신의 성격이나 과거를 자기가 실제로 행하는 대로 행동하는 일에 대한 핑계로 사용할 수 없다.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 이 점에 대한 긴 대화를 제시하고 있다.
그는 엇비슷한 나이와 엇비슷한 체격을 가진 여러 사람이 어느 시골을 구경 삼아 걸어서 여행하는 과정을 기술하고 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도중에 뒤처지다가는 배낭을 벗어 놓으며 못 가겠다고 말했다. 사르트르는 이 사람이 실은 걷는 일에 집중하지 않아서 피곤을 경험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처음에는 길이 가파르고, 태양이 뜨겁고, 배낭이 무겁고, 발바닥에 물집이 생겼다고 자각했지만 아주 가볍게 느꼈을 뿐이다. 그러나 어느 단계에 이르러 그는 제 자신을 이런 현상들로부터 분리했고, 그 다음 그 현상들에 가치를 부여했다고 사르트르는 주장한다.
그의 포기 행동은 길의 가파름이나 태양의 열기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단지 그가 특정한 관점에서 그것들을 도전이나 즐길 것이나 참을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을 선택하는 상황 속에 있는 요인들일 뿐이다.
사르트르는 이 사람이 피곤을 경험하고 노력을 포기하는 특정한 방식을 일반적인 열등감 콤플렉스로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그 열등감 콤플렉스 자체가 이 특정한 사람이 제 자신을 세계에 투영하는 그 나름의 방식이라고 주장하였다. “그것은 나 자신을 선택하는 나의 방법이다”
사르트르는 계속해서 우리 삶에 주어지는 그대로의 사실들, 즉 언덕의 가파름, 태양의 열기 등등은 자유에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자유는 선택되지 않은 요소들을 배경으로 하지 않고는 생길 수 없다. 그러나 이 요소들은 자유를 제한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요소들을 경험하는 방식에서 전적으로 자유롭다. 제 자신을 선택하는 우리의 자유는 무한하다.
실존주의 심리 분석은 과거에 의해서 현재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미래의 자신을 위해서 선택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설명을 탐구한다. 사르트르가 의식-있는-존재 누구나 세계에 대한 경험에서 겪는 절대 피할 수 없는 느낌으로 여겨지는 끈적거리는 것의 공포에 반영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 공포의 일부는 시간 자체가 끈끈해지고 끈적거리게 되어서, 우리 누구나 선택된 미래에 도달하려고 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과거라는 끈적거리고 걸쭉한 혼돈이 자유롭지-않은-상태로 후진시킬 것이라는 두려움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어떻게든지 과거에 예속된 노예라는 생각은 사르트르에게는 몹시 끔찍한 것이었으므로, 어떤 사람의 행동이나 성격에 대해서 오래전 과거의 사건들이 현재의 그 사람을 만들었다고 핑계를 대면서 하는 해명은 결코 정직한 변명일 수 없다.
나는 자신이 출생하는 것이나 특정한 부모를 갖는 것이나 현재의 건강을 전혀 선택할 수 없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내 처지의 실상에 대한 반응이다. 사르트르는 절대적 가치를 지닌 것은 전혀 없다고 강변한다. 누군가가 어떤 것이 좋다든가 나쁘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그것을 목표로 선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모든 도덕 철학이 인간의 행복이건 다른 어떤 것이건 어떤 절대적 가치를 갖는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한다. 이것은 자기-기만의 다른 형태인 ‘진지성의 유령’(Sprit of seriousness)에 굴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치가 어떤 방식으로든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중산 계급에서 존경받는 사람을 고민에 빠뜨리는 일, 즉 제 자신의 자유에 직면하는 일을 거부하는 습관을 보여줄 따름이다. 중산 계급에서 존경받는 사람의 모든 의무는 그를 위해 세밀히 계획된 것으로 보이며, 그래서 그는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 규칙들에 의해 완전히 속박되어 있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사르트르는 평가가 행동에 붙박여 있기 때문에 이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가치가 “단연코 우리 삶의 바로 핵심에 살아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사물을 자각하고 사물을 평가하고 사물에 영향을 미치는데, 이 모두를 언제나 동시에 한다. 그러나 기치에 관한 이론은 없다. 철학자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가치가 무엇이고 우리 삶에 어떤 기능을 하는지 말해주는 것뿐이다.
<‘실존주의’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메리 워낙 지음, 이명숙/곽강제님 옮김>
*메리 워낙: 1924년 생. 옥스퍼드대학 교수. 1985년 케임브리지 대학 학장 역임.
**실존주의: 1940년대와 1950년대에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일종의 철학 활동을 총괄적으로 지칭하는 용어이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공통의 관심은 인간의 자유이다. 선택의 자유가 가져오는 결과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떻게 평가되어야 하는지, 이 두 가지 주제는 모든 실존주의자의 핵심적인 관심사이다. 스피노자는 우주 속에서의 사람의 분수를 밝힌 다음, 그 분수에 맞게 인간의 정서와 지성을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을 밝혔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진정한 실존으로 살아가기 위해 자기를 어떤 점에서 사회로부터 해방시키려고 노력하는 존재로 본다. 사르트르는 더 나아가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로잡아야 하고 또 우리가 그들에게 부여한 역할에 순응하려는 욕망을 반대편에서 기술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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