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가 소멸해감을 바라볼 때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순간이 오면 괜히 쓸데없는 치료 같은 것 하지 말고 바로 죽었으면 좋겠소” 그날따라 힘든 하루를 보낸 베른하르트가 말한다.
“당신 자신을 잃어버리다니, 그게 무슨 말이요? 기준이 뭔데요?” 자라가 묻는다.
“기준? 내가 나를 정의하는 데 사용했던 모든 것들이 기준이오. 내 정신적 정체성을 이뤘던 것들이지.”
“예를 들면요?”
“인식할 수 있는 여러 능력. 그런 능력 중에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들도 있소. 귀가 어두워져 음악을 즐길 수 없다면 가슴 아프겠지만 그것만 제외한다면 소리 없는 조용한 세상에 나 자신을 맞춰갈 수 있을 거요. 귀가 먹어도 계속 책은 읽을 수 있으니까. 만일 눈마저 먼다면 끝장이오. 방향감각을 잃어도 끔찍할 거요. 혼자서 집에 올 줄도 모르고 내가 있는 장소와 시간을 모른다면 말이오.
그건 무력감, 독립성의 상실, 의존성을 의미하니까.“
“그런 증상들을 견뎌낼 수 있도록 내가 옆에서 도와줄 게요.“
“그런 종류의 상실은 사람이 견뎌낼 수 있는 게 아니오. 그 누구라도 할 수 없소”
“그래도 옛날 추억이 있잖아요. 우리의 기억이 있어요. 좋은 기억도 많고요.”
“맞아. 처음에야 물론 그렇겠지. 그렇지만 그 기억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빛이 바래가다가 결국은 완전히 없어질 거요. 중요한 일을 잊기 시작하면,
예를 들어 삶의 중대한 상황이나 다른 사람과의 특별한 관계, 소중하고 인생을 결정지을 수 있는 감정들을 잊어버리기 시작한다면 나는 더 살기 싫어질 거요. 과거에 내가 구사했고 그것을 통해 세계의 일부를 경험했던 언어들이 조금씩 무너져버린다면, 그래서 내 과거의 자취가 없어진다면 말이오.
그게 왜 그렇게 중요하냐고? 왜냐하면 현재의 개별화된 의식과 감정이 이 기억에 기반을 두고 있고 만일 그렇지 않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기 때문에, 그 속에서 살아 숨 쉬는 풍부한 기억이 없다면 현재의 인식은 평면적이고 단조로운 것이 되기 때문이지.“
“만일 당신이 그런 상실의 현상을 알아채지 못하면요?”
“그런 것들이 어느 날 갑자기 날벼락처럼 찾아오거나 한꺼번에 남김없이 잊히는 건 아니오. 그저 하나씩, 조금씩 부스러져 가루가 되고 마는 것이지. 사람은 조금씩 능력이 없어지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소. 언젠가부터 기억에 구멍이 뚫리고 빈칸이 생기고 있다는 것을 아는 법이지. 예전에는 전혀 힘들지 않고 했던 것이 더 이상 되지 않으면 무력감과 고립감을 느끼오. 그럴 때를 두고 누군가는 굴욕적이라고 할지 모르지.
“그래도 미래를 향해 살아갈 수 있는 거잖아요. 열린 미래를 느끼고 아직 오지 않은 앞날이 가져다줄지도 모르는 선물을 기다리면서요.”
“소명이라는 것은 학습 능력에도 영향을 미치지. 그것은 다시 말해 미래의 상실과도 같은 말이오.
그리고 살아갈 만한 미래는 새로 발생하는 것들에서 항상 새로운 인상을 얻어가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새로 얻은 그 인상과 느낌을 가지고 무언가를 한다는 데 있는 거요. 지력의 실천, 그게 바로 배움이오. 배움의 기본적 능력까지 없어진 건 아니니까.
정말로 끝나는 건 나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변화들, 새로운 것들을 내가 그동안 알고 있던 것들과 어떻게 연관 지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기 시작 할 때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거지. 나는 방향을 가늠할 수조차 없게 되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나 자신을 이해시킬 수 없는 지경이 되겠지. 말문도 막히고 따라서 생각의 문도 막히는 느낌을 갖게 될 거요. 그런데 어떻게 인간관계가 가능하다는 말이오?“
“감정을 통해 직접적으로 교류하는 방법도 있잖아요.”
“내가 말하는 소멸에는 감성의 단순화도 포함되오. 무엇을 경험할 때 예리함도, 명쾌함도 없이 언제나 흐리멍덩한 무언가가 따라붙어 급기야는 형체 모를 잡탕이 된다는 거요. 하지만 괴로움보다 나쁜 것은 그 감정들이 이제 없다는 것, 그들의 부재가 크게 느껴진다는 것이오.
그 중에서도 가장 싫은 건 지난 세월동안 나라는 사람을 정의해오던 자아상을 잃어버리는 거요. 내가 누구인지 잊어버리는 과정이 시작되는 거지. 사람이 쇠락해가는 과정에서 신체 기능을 마음대로 통제하지 못하게 되는 일이 허다하지. 배설 기능도 그렇고 나는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소.“
“당신은 인간으로서의 능력이 하나씩 없어지면 존엄성도 사라진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인데 사람들은 그렇게 보지 않을 수도 있어요. ”저 양반이 옛날 같지 않군.“ 하고 생각하다가도 ”사람이 나이가 들면 다 그렇지. 옛날과 똑 같을 수 있겠어? ‘내가 보기엔 저 늙은 양반이 정신이 좀 말짱하지 않다고 해서 존엄성을 잃었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은데.‘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다른 시각으로 볼 수도 있어요. 인간의 성장과 소멸이라는 법칙에 따라 지배되는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에 애써 저항하지 않는 거예요.
“쇠락한다고 해서 타인의 시선을 피하거나 혼자 자격지심을 느끼지 않는 사람의 존엄성인 것이죠.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줄어들고 남의 손을 빌려야 하는 일이 늘어나며 진정한 인간관계보다는 누군가 돌봐주는 것에 대한 감사함과 송구함만이 남게 되는 시절에 대해 미리 대비하는 것도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는 한 방법이 되겠지요.”<‘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법, 삶의 격’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페터 비에리 지음, 문항심님 옮김, 은행나무 출판>
* 페터 비에리 : 1944년 스위스 베른에서 태어났다.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 철학부 박사, 버클리대학, 하버드대학,베를린 자유대학 등에서 연구 활동
예년에 비해 남녘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개화가 빠르다. 애석하게도 지금 핀 매화 꽃은 우리의 눈을 즐겁게는 해주지만 찬날씨로 인해 벌의 수정을 못받는다. 그리고 이번에 한번 폈기 때문에 나중 따뜻한 봄날에는 꽃 몽우리와 열매를 맺지 못하니 안타까울 뿐이다,
'독서 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열 번의 산책~! (0) | 2020.02.29 |
---|---|
진리를 원한다면 자아를 단념하라! (0) | 2020.02.21 |
철학산책-실존주의! (0) | 2020.02.08 |
수치심의 논리학! (0) | 2020.01.31 |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그리고 해방~! (0) | 2020.0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