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완견)랄카의 시간
동물들의 시간은 언제나 현재형이다.
랄카는 덥수룩한 붉은 털을 가진 암캐다. 랄카는 미시아를 가장 사랑한다. 미시아가 시야에 들어와 있으면 만사가 평안하다. 랄카는 현재를 살고 있다. 그렇기에 미시아가 옷을 차려입고 외출하면, 랄카는 그녀가 영원히 떠나버렸다고 느낀다. 릴카의 슬픔은 헤아릴 수 없이 깊어진다. 암캐는 주둥이를 땅바닥에 처박은 채 고통스러워한다.
인간은 자신의 고통 속에 시간을 묶어놓는다. 과거 때문에 고통 받고, 그 고통을 미래로 끌고 가기도 한다. 인간은 이런 식으로 절망을 창조한다. 하지만 랄카는 단지 이곳에서 지금 이 순간을 견딜 뿐이다.
인간의 생각은 시간을 삼키는 것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그것은 일종의 게걸스러운 흡입이다. 랄카는 신이 그린 정적인 그림으로 세상을 인식한다. 동물들에게 신은 화가이다. 아무런 의미도 담겨 있지 않은 냄새와 촉감, 맛 소리에서 릴카는 신이 대충 그린 그림의 본질을 감지한다.
동물은 의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때로는 인간도 꿈을 꾸다가 이와 비슷한 느낌을 맛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깨어 있는 동안엔 무조건 의미를 찾아 헤맨다. 인간은 시간의 포로이기 때문이다. 동물은 끊임없이, 헛되이 꿈을 꾼다. 꿈에서 깨어난다는 건, 동물에게는 죽음이다.
랄카는 세상의 이미지들과 더불어 꿋꿋이 살아간다. 때로는 인간의 정신세계가 만들어낸 이미지 속에 동참하기도 한다. 미시아가 “가자”라고 말하면, 랄카는 꼬리를 흔든다. 하지만 랄카는 인간처럼 말을 알아듣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랄카는 말이나 개념 때문에 꼬리를 흔드는 게 아니다. 미시아의 정신에서 싹튼 이미지에 반응하는 것이다. 이 이미지 속에는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과 움직임에 대한 기대감이 반영되어 있다.
랄카는 인간이 마지못해 만들어낸 이미지를 본다. 때로는 슬픔과 분노로 가득한 이미지도 있다. 하지만 이런 이미지일수록 오히려 더욱 선명하고 또렷하다. 그 속에 열정이 박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 랄카는 무방비 상태가 된다.
저 낯설고도 우울한 세상에서 길을 잃고 헤매지 않도록 자신을 보호해주는 아무런 수단도 갖고 있지 않으며, 독자성을 유지하게 도와주는 마법의 테두리도 없고, ‘자아’를 지켜주는 강렬한 에너지도 공급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랄카는 세상으로부터 압도당하게 된다. 개가 인간을 자신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건 그래서다. 그렇기에 가장 하찮은 인간도 자신의 개와 함께 있으면 영웅이 된 것처럼 느끼게 된다.
죽은 자들의 시간
보스키 영감은 숨을 거두고 난 뒤에, 죽은 자들의 시간 속에 머물게 되었다.
공동묘지의 담벼락에는 서투른 글씨체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진 현판이 걸려 있었다.
신이 보고 계신다.
시간은 달아난다.
죽음이 쫓아온다.
영생이 기다린다.
보스키는 죽자마자 자신이 큰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달았다. 그는 유연하지 못하고, 부주의하게 죽음을 맞았다. 그는 죽음 또한 삶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꿈이라 생각했다.
죽음에 대해 학습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어리석은 자들. 마치 시험처럼 죽음의 과정을 제대로 통과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렇게 죽은 자들의 시간 속에 갇히게 된다.
세상이 앞으로 나아갈수록, 생을 찬미할수록, 생과 더욱 강렬하게 연결될수록 죽은 자들의 시간은 더욱 혼잡해졌고, 공동묘지는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죽은 자들은 이곳에 와서야 ‘삶이 끝난 후’에 대해 인식하게 되고, 자신들이 지금까지 주어진 시간을 허비했음을 깨닫게 된다. 죽고 난 후에 생의 비밀을 발견하게 되지만, 그 발견은 헛된 것이었다.
미시아의 시간
미시아는 오랫동안 긴 백발을 자르지 않았다. 어느 날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미시아가 갑자기 머리카락을 잘랐다. 밤색으로 염색한 곱슬머리가 뭉텅뭉텅 바룻바닥에 떨어지고 난 뒤, 미시아는 거울을 보았다. 그리고 자기가 늙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봄이 되자 미시아는 딸에게 편지를 보내서 여름 휴양객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밤마다 심방박동이 거세지고 맥박이 빨라졌다. 손발도 부었다. 미시아는 발을 내려 보았다. 도무지 자기 발 같지 않았다.
자식들은 미시아를 의사에게 데려갔다. 고혈압이었다. 매일 약을 복용해야만 했고, 커피를 마시는 것은 금지되었다. “커피 없이 무슨 재미로 살라고?” 미시아아가 찬장에서 커피 그라인더를 꺼내면서 투덜거렸다.
“약속해줘요. 내가 먼저 죽으면, (아버지) 이지도르를 양로원에 보내지 마라” 미시아가 (아들) 파베우에게 부탁했다.
“약속할게.”
가을의 첫날. 미시아는 그라인더에 진짜 커피 원두를 갈아서 유리잔에 담고, 끓는 물을 부었다. 그리고 찬장에서 생강 과자를 꺼냈다. 그윽한 향이 온 주방에 퍼졌다. 미시아는 의자를 창가에 당겨 놓고는 홀짝이며 커피를 마셨다.
바로 그 순간 미시아의 머릿속에서 갑자기 세상이 폭발했고, 그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미시아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치 덫에 걸린 짐승처럼, 누군가가 와서 풀어줄 때까지 기다렸다.
미시아는 타슈프의 병원으로 가서 뇌졸중 진단을 받았다. 파베우와 이지도르, 딸들이 매일 그녀를 찾아왔다. 그들이 뭔가를 질문하면, 미시아는 이따금 ‘응’이라고 답하기 위해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아니’라고 하려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기도 했다. 하지만 미시아의 얼굴은 점점 무너져 내렸고, 눈빛은 갈수록 흐릿해졌다.
가족들은 복도로 나와서 의사를 붙잡고 미시아의 상태에 대해 물었지만, 의사는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병원마다 흰색과 붉은 색으로 이루어진 폴란드 국기가 걸려 있었고, 직원들은 전부 팔에다 파업 완장을 두르고 있었다.
가족들은 병원 창가에 서서 창밖의 동태를 살펴보며, 지금 그들에게 닥친 불행에 대해 이런저런 의견을 나누었다. 어쩌면 미시아는 마룻바닥에 머리를 부딪히는 바람에 감각을 상실했는지도 모른다. 언어능력, 삶의 환희, 생에 대한 호기심과 의욕을 전부 잃어버렸을 수도 있다. 아니면 다른 추론도 가능하다.
바닥에 쓰러질 때 미시아는 자신이 얼마나 허약한 존재인지 절감하면서 잔뜩 겁먹었을 것이다. 여태껏 살아 있는 건 기적이지만, 자신이 필멸의 존재임을 자각하면서 틀림없이 공포에 떨고 있을 것이다. 지금 그들의 눈에 미시아는 죽음에 대한 공포로 인해 죽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리에 담요를 덮은 채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듯한 얼굴로 망연히 침대에 앉아 있는 미시아를 보면서, 그들은 과연 미시아의 생각은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그녀가 내뱉는 말들처럼 단절되고 갈기갈기 찢겨 있을까. 아니면 정신의 깊숙한 곳 어딘가에 생생함과 원기를 간직한 채 온전히 보존되어 있을까. 그들은 미시아가 아예 생각을 멈췄을지도 모른다고 가정해보았다. 만약 그렇다면, 그녀를 둘러싼 껍데기가 견고하게 닫혀 있지 않았다는 뜻이며, 덕분에 아직 살아 있는 동안 미시아가 혼란과 파멸을 겪어야만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죽음을 맞기 전 한 달 동안 미시아는 줄곧 세상의 저편을 보았다. 그녀의 삶에서 정말로 중요한 고비마다 모습을 드러냈던 수호천사가 거기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파베우는 아버지 이지도르를 양로원에 데리고 가서 아버지를 받아준 수녀에게 상황을 정확히 설명하려 애썼다. “그렇게 늙지는 않았는데요. 오랫동안 아팠어요. 장애도 있고요. 제 힘으로는 적절한 간호와 보살핌이 불가능하다는 걸 잘 알고 있거든요.
양로원의 시간은 다른 곳에서의 시간과 다르게 흘러갔다. 시간의 물줄기가 훨씬 가늘고 비좁았다. 한달, 두 달이 지나면서 이지도르는 기력을 잃었다. 이지도르가 자신을 돌봐주는 아니엘라 수녀에게 말했다. “제가 많이 아픈 거 같아요. 아마 곧 죽으려나 봐요.”
“아니에요. 이지도르. 당신은 아직 젊고 튼튼해요.”
수녀는 어떻게든 이지도르의 기운을 북돋아주려 했다. “전 늙었어요.” 이지도르가 고집스럽게 말했다.
이지도르는 실망했다. 노년기가 되면 만물을 깊이 있게 볼 수 있는 혜안이 트이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이해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명확하지 않았다. 그저 뼈마디가 쑤시고, 잠을 이룰 수 없을 따름이었다. 죽은 사람도, 산 사람도, 그 누구도 그를 찾아오지 않았다.
이지도르는 밤마다 익숙한 영상을 보았다. 기하학적인 환상들, 텅 빈 공간 속에서 각이 지고 흐릿한 모형들이 둥둥 떠다녔다. 형체가 뒤틀리고 보잘것없어졌다. 영상 또한 그와 함께 점점 노쇠해지는 듯했다.
이지도르에게는 씨름할 힘이 더는 없었다. 그래서 세상의 사방위를 보기 위해 다리를 질질 끌며 침대에서 일어나 양로원 건물안을 돌아 다녔다. 이렇게 왔다 갔다 하는 데 하루가 꼬박 걸렸다.
이지도르는 잊어버리는 법을 터득했다. 망각은 그에게 안도감을 안겨주었다. 그러다 결국 이지도르는 걸을 수 없게 되었다. 항생제를 투입하고 방사선치료를 해도 그의 뼈와 관절은 점점 굳어갔고, 그 어떤 동작도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이지도르는 격리병동으로 옮겨져서 서서히 죽어갔다.
죽음이라는 건, 지금껏 이지도르를 형성해왔던 모든 것들이 체계적으로 분열되는 과정이었다. 급속도로 진전되는 돌이킬 수 없는 과정이면서, 자기 완성형이면서, 극도로 효과적인 과정이기도 했다. 마치 컴퓨터에서 불필요한 정보가 자동으로 삭제되는 과정과 비슷했다.
다음으로 이지도르가 사랑했던 장소들이 점차 흐릿해지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과 이름들이 희미해졌다. 그렇게 그가 아는 모든 이들이 망각 저편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뒤를 이어 이지도르의 감정이 사라졌다. 먼 옛날 그가 맛보았던 벅차오르는 감동(첫 아이 출산 했을 때), 끝없는 절망(루터가 떠났을 때), 기쁨(그녀에게서 편지가 왔을 때), 확신, 공포, 자부심, 그 밖의 수많은 다른 느낌들.
그러다 마침내 마지막으로 수녀가 ‘그가 사망했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이지도르가 내부에 간직하고 있던 빈 공간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그것은 천상의 것도 지상의 것도 아닌, 오직 이지도르의 것이었다. 그 공간이 산산이 부서지고 뿔뿔이 흩어지더니, 마침내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그것은 전쟁이나 화마, 아니면 행성의 폭발이나 블랙홀의 붕괴보다 더 끔찍한 파멸의 광경이었다.
<‘태고의 시간들’에서 P379중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님 옮김, 은행나무 출판>
올가 토카르추크 : 현재 폴란드에서 가장 두터운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는 작가로 201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바르샤바 대학교에서 심리학을 전공했고, 문화인류학과 철학에 조예가 깊으며, 특히 칼 융의 사상과 불교 철학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 <책의 인물들의 여정>,<방랑자들>,<야고보서>등이 있다.
농원 사과
지리산 청학동 계곡
'독서 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조리의 추론 (0) | 2020.09.02 |
---|---|
내가 살아야 할 생~! (0) | 2020.08.29 |
고독의 즐거움 (0) | 2020.08.16 |
살아있는 것은 아프다! (0) | 2020.08.09 |
성과 인간 (0) | 2020.08.05 |